204화. 미친놈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4)
“이것 참.”
쏟아지는 폭우도,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소리도,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도 그들의 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내 칠십을 넘게 살아왔소만, 설마하니 살아생전 반역 사태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소.”
깡마른 노인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러자 한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당당한 체구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직 진짜 반역인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다행이겠지. 그 소문을 유포한 놈만 족치면 되니까.”
그때, 그들 뒤에서 젖은 풀을 매만지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을 것이네.”
두 노인이 등을 돌렸다.
풀을 매만지던 노인, 혈수마존(血手魔尊)이 담담하게 말했다.
“반역이어도, 반역이 아니어도 우리가 낄 수 있는 판때기가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선배?”
“마인들을 보게. 잔뜩 긴장한 와중에도 눈빛은 흉흉한 것이 반역자가 보이면 단숨에 토막을 내 버릴 기세로군. 하지만 말일세, 저들은 이미 알고 있네.”
“무엇을 말이오?”
“이 갑작스러운 사태가 실상 허상의 무대임을.”
뚝.
풀이 뜯겼다.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피비린내 나는 후계자들 간의 악의 넘치는 싸움이라는 것을 저들도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이야.”
깡마른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후계 싸움이라도 반역이란 허위 사실을 유포하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목숨이 성치 못할 것이오.”
“그게 삼공자라도?”
“……!”
“고루(枯樓) 자네, 삼공자를 내심 지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깡마른 노인, 고루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내 아무리 삼공자를 지지한다 한들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외다. 마땅히 책임을 져야지.”
“맞네. 응당 책임을 져야지. 하지만 자네는,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없네.”
“왜 그렇소?”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평범한 체격이었지만 그가 허리를 펴자 태산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을 벌이든, 후계를 정하는 것은 바로 교주님이시기 때문이야.”
고루마존과 철검마존(鐵劍魔尊)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교주님께서도 우리처럼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네.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만 교주님께서 후계자를 두둔한다면, 우리 역시 그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지.”
“…….”
“그것이 바로 천마신교의 교주, 파순의 대리자이자 만마를 다스리는 신(神)의 권속에 있는 우리의 숙명일세.”
절대 권력이란 것을 실감케 하는 말이었다. 역대 어떤 국가의 황제도, 왕들도 이만한 권력을 쥐어 보진 못했을 것이다.
고루마존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곤란한 분이로군. 그렇다고 대공자와 이공자가 정말 반역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도 없…… 응?”
으아아악!
저 멀리서 피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고루마존의 눈빛이 형형해지고, 철검마존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혈수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이공자……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는가.”
무려 천마군을 건드렸다. 신교 최강의 조직이라는 천마군을.
게다가 저들은 반역을 진압하려 모였다. 그런 천마군을 공격했다는 것은 반역을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령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비상령을 받고 출동한 마군(魔軍)을 죽였으니 이는 중죄 중의 중죄다.
그때, 철검마존의 눈이 빛났다.
“저 아이는……?”
“음? 왜 그러나?”
“인연이 있는 아이가 보여서 그렇소.”
“누군데?”
“광마대주외다.”
“아, 본교 최악의 미친년이라는 그?”
혈수마존이 슬쩍 눈치를 주자 고루마존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뭐,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이다. 한데 저 아이가 왜?”
“저 아이는 검객이거늘 어찌 저 많은 칼을 이고 있는지 모르겠소?”
“음? 허, 정말이군. 한데 저거…… 칠야도 아닌가?”
“그런 것 같소.”
“유성쌍도와 칠야도, 그리고 무명도 네 자루는 삼공자님의 애병이라고 들었는데?”
철검마존이 희미하게 웃었다.
“위험한 곳만 골라서 찾아다니는 건 여전하군.”
* * *
쾅!
“후우. 후우.”
고개를 젖혀 관평의 장력을 피한 서량이 허공에 짧게 주먹을 내질렀다.
펑!
관평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가벼운 권풍 일격이었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야 했다.
관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쌍소리를 내뱉으며 마기를 끌어 올리는 관평.
‘역시 이상해.’
눈빛부터가 이전과는 달랐다. 분노를 넘어 광기마저 느껴지는 놈의 눈빛은 마치 야수궁주 천호를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저리 변할 수 있지?’
슈웅!
날카로운 연검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그의 정강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관평의 공격처럼 가벼이 받아 낼 수가 없다. 마황군림보를 구사하며 검격을 피하니, 그다음엔 소암장이 날아왔다.
서량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콰앙!
두 사람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일대일 대결에선 압도적인 전투 능력으로 진관용에게 우위를 점했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관평의 합세로 서량의 체력 역시 빠르게 깎이고 있었다.
‘역시 무리로군.’
관평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십 합 이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관평은 극마의 고수의 손에서 십 합이나 버틸 수 있을 만한 실력자였다.
그 정도 고수가 참전했으니 신경이 아니 분산될 리 없다.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어도 충분히 정신을 어지럽힐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진관용이 파고들었다.
치이이이이잉!
빳빳하게 선 영마검과 붉은 마기로 둘러쳐진 서량의 수도가 부딪쳤다.
끼기기기긱!
넘치는 공력으로 부딪친 두 무기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겨루기를 했다.
진관용이 웃으며 말했다.
“벗어나고 싶으냐?”
서량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보다 우위를 점했던 마기가 지금은 밀리고 있다. 그만큼 내공 소모가 심했다는 소리였다.
“전세가 역전되었구나.”
“…….”
“널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하지만 네놈의 팔 하나 정돈 가져가야겠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결코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게 책임을 묻기 전에 너희들 모가지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저 머저리의 바보짓을 너도 감당해야 할 텐데.”
진관용이 차갑게 웃었다.
“그거야 네가 알 바 아니지.”
쿠구궁!
일순간 뿜어지는 대량의 마기에 서량의 자세가 낮아졌다.
까가가각.
영마검이 조금씩 서량의 수도를 파고들었다. 극한의 마기로도 신병이기의 힘은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맨손으로 영마검을 막은 네놈의 배포는 칭찬해 주마.”
“고맙군.”
“자, 이제 슬슬 끝내 보도록 할까?”
스르르륵.
서량의 등 뒤로 관평이 나타났다.
핏발 선 눈으로 서량을 노려보던 그가 손을 들었다. 일장(一掌)에 때려죽일 기세였다.
진관용이 외쳤다.
“안 돼! 이놈은 살려야 한다!”
“……이익!”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등판에 갈겨!”
별수 없다는 듯 관평이 손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보다 서량의 기합성이 먼저였다.
“으아아압!!”
쿠구구궁!
진관용의 마기가 비틀렸다.
마기가 비틀리자 자세도 틀어졌다. 수도를 세워 영마검을 비껴 낸 서량이 진관용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후방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앙!
충격파에 튕겨 날아간 서량이 땅을 몇 바퀴나 구르곤 다시 일어났다.
“……놀라운 체술이로군.”
관평의 손목을 잡아 장력을 막아 낸 진관용이 이를 갈았다.
“아직도 그만한 힘이 남았더냐?”
“후욱! 후욱!”
진관용의 말에 대답할 기력도 없다.
서량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인가?’
진관용과 부딪친 그 순간부터 그는 끊임없이 구유마공을 자극하고 있었다.
바로 세 번째 지옥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어떻게든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지만, 저만한 고수가 주는 자극이라면 충분히 열어젖힐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아직까지 지옥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제기랄! 구결을 다 알고 있는데도 열지 못하다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심지어 살왕이었을 적 얻은 깨달음은 현재 마공의 깨달음보다 앞서 있었다. 당연히 지옥문을 열 수 있어야 했다.
지옥문만 열 수 있다면, 생전의 경지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관평의 참전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 수 있다. 지금보다 ‘한 수’ 강해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한 수는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듯 꽉 찬 잔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술과 같다.
어느 단계의 끝자락에 도달한 그에게 삼 단계의 지옥문은 그런 의미였다. 단숨에 생전의 경지를, 그 이상을 넘볼 수도 있는 것이다.
‘별수 없어. 언제 열릴지 모르는 지옥문을 물고 늘어질 순 없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칼이라도 한 자루 챙겨 올 것을.’
하도 안 차고 다녀 버릇했더니 기어이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실력에 큰 차이는 없겠지만, 관평을 죽이는 데에는 더 용이할 것이다.
푸스스스.
진관용과 관평이 서량에게 접근했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너, 왜 그렇게 변한 거냐?”
진관용이 손을 들었다.
“저놈 말을 듣지 마라. 저놈 도발에 넘어갔다가는 될 일도 안 된다.”
“도발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번쩍!
영마검의 검격에 대지가 쩍 갈라졌다. 서량은 이미 몸을 옆으로 틀고 있었다.
“궁금함은 나중에 풀도록 해라.”
“그 흡정마공 비슷한 무공 때문이냐?”
“닥쳐라!”
“음?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군. 정통 마공은 흡정과 맞지 않는다고 하셨지. 잡스러운 마공이야 그럴지 몰라도 말이야.”
관평이 버럭 소리쳤다.
“미친놈! 감히 이신합마(二身合魔)를 잡스럽다고 말하다니!”
“누가? 내가? 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니까?”
“입 닥쳐!”
신경질적으로 외치지만 관평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인내도 서량의 다음 말에 깨져 버렸다.
“교주님을 미친놈이라 하다니, 과연 반역자답군.”
“이 새끼가!”
파아악!
단숨에 날아가 서량을 공격하려던 관평.
하지만 그의 시도는 불발로 그쳤다. 어느새 진관용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은 것이다.
쾅!
“크윽!”
“정신 차리지 못해!”
“이, 이것 놔!”
진관용은 끝까지 서량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그가 기습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놈은 널 자극하고 있어! 병신처럼 휩쓸리지 말란 말이다!”
“닥쳐, 이 개자식아!”
“뭐라?”
“극마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 준다 하지 않았더냐! 그 방법이란 걸로 내 마공을 어그러트려 놓은 놈이 날 병신이라고 불러?!”
“이놈이……!”
“좋다, 지금은 약속대로 네놈을 돕겠어! 하지만 이번 승부가 끝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을 물어뜯을 것이다! 네놈의 진짜 모습을 아는 놈은 나뿐이야!”
진관용의 눈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맺혔다.
“네놈을 고쳐 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이지.”
“이익!”
“한 번만 더 내 심기를 건드리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관평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상관 말고 계속해. 보기 좋네.”
아예 공격할 의사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는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는 사이 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먹질 몇 번 할 체력을 얻었다.
그때였다.
‘……!’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이 기운은?’
익숙한 기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천마군은 아니었다. 천마군은 일천이 진군을, 나머지 이천은 이곳 사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당연히 접근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망갈 곳은 이미 다 막아 두었지만.
그렇다면?
“공자님!!”
서량의 눈이 커졌다.
“이 바보 같은! 저리 가!”
진관용과 관평의 눈이 악랄하게 빛났다.
파아아아악!
진관용이 서량에게 일장을 날리고, 관평이 위홍련에게로 달려갔다.
관평부터 막고 싶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진관용의 공격이 너무 거셌다. 관평을 죽이다간 자신도 죽는 것이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그 순간.
번쩍!
서량의 기감에, 위홍련의 인기척만큼이나 익숙한 예기가 포착되었다.
‘칼?’
생각이 이는 순간 의지가 일며, 의지가 이는 순간 하단의 마기와 상단의 신기(神氣)가 솟구쳤다.
‘너 이 미친년, 잘했어!’
콰아아앙!
서량과 진관용이 부딪치며 폭음이 일었다.
그리고 관평이 위홍련의 삼 장 거리에 도달했을 때.
차아아아앙!
유성쌍도와 칠야도가 저절로 뽑혀 나왔다.
“얼레?!”
당황한 위홍련이 관평을 바라보았다.
관평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위홍련이 씨익 웃었다.
“나도 모르게 터득해 버린 걸까?”
세 자루의 마도(魔刀)가 그대로 관평을 꿰뚫었다.
퍼어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