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승부수를 띄우다 (1)
“헉!”
눈을 뜬 마동필이 상체를 벌떡 세웠다.
그때, 옆에서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눕게.”
“……?”
“누우라 했네. 그러다 상처가 터지면…… 터졌군.”
주르륵.
복부를 두른 하얀 붕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밭은기침을 내뱉던 마동필이 고개를 돌렸다.
“형법당주님?”
“눕게. 의원을 불러 주지.”
“괘, 괜찮습니다.”
우우웅.
내상으로 다소 탁해졌지만 여전히 굴강한 마기였다. 금강야차의 마기가 일자 찢어진 상처가 확 오그라들었다. 기로 근육을 조여 벌어진 상처를 막아 버린 것이다.
고구의 눈이 빛났다.
“체력이 굉장하군.”
“감사합니다.”
“그래도 당분간 쉬는 게 좋을 걸세.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만성이 될 내상이야. 정말 지독하게 싸웠군.”
고구가 마동필의 가슴을 눌렀다. 마동필은 끙 소리를 내며 누웠다.
“의원 말이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켰다고 했네. 다만 마기의 질이 놀랍도록 좋아서, 얼추 두어 달이면 검을 들 수 있을 거라더군. 물론 무리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두 달이나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동필의 경지와 금강야차마공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극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숨을 쉰 마동필의 눈이 일순 번뜩였다.
“여, 여 소저는?!”
“괜찮네. 앵화라는 시녀도 멀쩡하고. 자네 덕분이야.”
마동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마동필을 내려다보던 고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다리라도 멀쩡한 걸 다행으로 여기게.”
“예?”
“자네, 고수들에게 합공을 당하지 않았나.”
“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들이닥친 의문의 고수들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중 절반을 참살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중엔 자신에 근접한 고수도 한 명 끼어 있었다.
“대체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건 나중에 듣도록 하게. 중요한 건 자네들 모두가 안전하다는 것 아니겠나.”
고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여인과 함께 납치당한 채 이틀이나 방치되었어. 그래서 상처가 더 심해졌네. 만일 자네가 이만큼이나 강해지지 않았다면, 마기가 역류해 기혈이 엉켰을 걸세.”
초절정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대로 황천길로 떠났을 거란 말이었다.
“나중에 칠공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하게.”
“칠공녀님이요?”
“칠공녀가 오공녀, 육공자를 설득해 내성 전체를 뒤지고 다녔네. 놀랍게도 그분들이 본당은 물론 천마군보다도 먼저 자네들을 발견했어.”
“……!”
“그분들께서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네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 있었을 걸세. 운이 나빴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겠지.”
“……그렇군요.”
“나중에 꼭 감사 인사를 드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미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마동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주님.”
“말하게.”
“그럼…… 공자님께서는?”
“공자님이라…….”
고구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그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안전하시네. 자네보다 상태는 안 좋지만.”
“예?!”
“대공자, 그리고 이공자와 생사결을 벌이셨네. 다행히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셨어. 다만 워낙 치열했던지라 공자님의 몸도 성치는 않으시네.”
마동필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급하진 않지만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공자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내 말을 어디로 들었나? 누워 있게. 당분간 움직여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이불을 젖히고 일어섰다. 전신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고구가 한숨을 쉬었다.
“형법당 뇌옥에 계시네.”
“뇌, 뇌옥이라니요?!”
“오해하지 말게. 수감되신 게 아니라 사로잡힌 이공자를 보러 가신 거니까. 다시 돌아오실 거야.”
고구의 손이 마동필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마동필이 저절로 침상에 앉았다.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회복이나 열심히 하게. 호위무사로서 이런 꼴을 보이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
“쉬게.”
방을 나선 고구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창가를 바라보았다.
십만대산의 햇살은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걸 보니 바람은 제법 선선해 보였다.
“서량, 삼공자라…….”
고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결과가 좋다면 과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번 삼공자의 행동은 정쟁(政爭)의 한계를 찢어 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신교의 분위기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아마 마인들 대다수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반역 사태가 후계자들 간의 싸움에서 기인한 사태라는 것을. 악덕으로 가공된 허상의 반역이라는 걸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한다. 대공자가 죽고 이공자가 뇌옥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조직의 분위기가 한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고 있다. 고죽림에서 나온 이후부터 그랬었지.’
씁쓸하게 웃던 고구의 표정이 이내 편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서량이란 사람의 역량이 자신을 한참이나 웃돈다는 걸.
* * *
“신고식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신교 생활의 첫 시작부터 아주 화려하네요.”
여상린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러다가 납치 전문 피해자로 사해오호에 명성을 휘날리겠어요. 어떻게 싸움만 났다, 싶으면 억류를 당하는지.”
앵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우리 공자님 나쁘게 보지 마세요. 공자님께서 얼마나 화를 내셨는지 아시잖아요?”
“모르는데요.”
“…….”
“봤어야 알지.”
할 말이 없었다.
헛기침을 한 앵화가 비질을 계속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손님한테 일 시키시게요?”
“어차피 도와주실 거잖아요.”
여상린이 빙긋 웃었다. 앵화에 대한 첫인상은 어설프지만 귀여운 사람 정도였는데, 이제는 책임감 넘치는 귀여운 아이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죠. 또 음식 해서 가져가게요?”
“네.”
“전에도 말했지만, 혈혼각 의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까요? 환자한테 주는 약식(藥食)도 잘 관리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건 어디서 들으셨어요?”
“관계자한테 들었죠. 저도 진찰받았잖아요.”
앵화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요. 저도 어지간한 약식은 만들 줄 아니까.”
“정성이네요.”
“덕분에 저희가 무사했잖아요.”
꼭 그렇지는 않다. 습격을 당했을 때, 습격자들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고압적이었지만 적어도 살의는 엿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상린은 앵화의 마음을 이해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을 위해 헌신해 준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다니, 마음이 울적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 청소 먼저 빨리 끝내고 저랑 같이 만들어요.”
“음식 만들 줄 아세요?”
“거드는 것 정도도 못 하겠어요, 설마?”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두 여자가 거처 청소를 깔끔하게 마쳤다.
주방에 들어서서 죽을 끓이던 와중, 여상린이 물었다.
“굉장하더군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앵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삼공자님의 추진력이요.”
앵화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일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두고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공자님을 칭찬해 주시니 저도 모르게 뿌듯했던 것이다.
“우리 공자님은 뭐든 잘하세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앵화.
여상린은 별나다는 듯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앵화의 말에 진지하게 동감했다.
‘틀린 말이 아니야.’
무공만 해도 이미 천하제일의 기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도 무림에서 제일가는 가치가 바로 힘이다. 비단 그것은 마도 무림만이 아니라, 이 강호라는 세상이 그러하다.
하지만 보통 무공이 강하거나 힘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분란도 종식시킬 무(武)가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개인에게는.
하지만 서량은 그렇지 않았다.
‘힘을 문제 해결의 수단 중 하나로 생각할 뿐, 모든 것을 힘으로만 해결하진 않는다.’
겉으론 그래 보일지라도 서량은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치밀하고 대담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이란 누명을 씌워 조직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갈 사람은 세상에 서량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미리 방법을 세워 둔 것이냐?
또 그렇지도 않다. 그런 걸 보면 지극히 단순할 뿐인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서량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서슴없이 한계를 넘나드는 배포에 있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군사(軍師)가 딸린다면…….’
여상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하를 도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어.’
과대 해석일 수도 있다. 무공을 제외하면, 세상엔 서량보다 대담하고 능력 좋은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딱 하나, 누구도 갖지 못한 서량만의 무기가 있다.
‘눈.’
안목이라고 해야 할까.
야수궁 때도 그렇고, 이번 후계 싸움에서도 그렇고 서량은 단숨에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드는 데에 능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파고든 이후, 싸움을 자신의 의지대로 주무르고 있어. 그런 건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거야.’
진관용은 신교의 대공자다. 능력치가 비슷하다면 당연히 싸움은 대공자인 진관용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다.
끝도 없이 싸워야 할 상대, 상황상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반역이란 시궁창에 처박아 조리해 버렸다.
안목, 대담함, 무공, 나아가 분위기 조성 능력까지.
‘조금은 어설프지만 지닌 능력만큼은 이미 천하 정점에서 노닌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여상린은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도움이 필요할 상황은 아니라서 말이지.
- 차라리 내가 차기 후계자가 된 이후를 논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
첫 식사 자리에서 서량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빙궁주의 여식이 도움을 주겠다 하면, 종류가 무엇이든 반색하고 받아들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서량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나아가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너무 위험한 사람과 손을 잡았어요.’
능력이 좋은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적어도 서량이 경우 없는 사람 같지는 않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이왕 손을 잡았으니, 이 관계를 결코 위험하게 만들어선 안 돼요.’
그때, 앵화가 손을 내밀었다.
“거기 주걱 좀 주실래요?”
여상린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저을 테니까 다른 거 하세요.”
“앗, 감사합니다.”
죽을 살살 저으며 여상린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오라비 걱정할 때가 아니야. 나나 잘해야지.”
일단 죽부터 제대로 만들자.
* * *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수고했네.”
호요성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 제 수명이 뭉텅뭉텅 깎여 나가는 느낌입니다, 교주님.”
“답지 않게 엄살인가?”
“진짭니다.”
이천상이 말없이 잔을 채웠다.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 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분위기는 대강 잡아 두었습니다. 앞으로 빠르면 사흘, 넉넉하게 열흘 정도 더 통제를 해 두면 잘 풀릴 거라고 예상됩니다.”
“알겠네.”
“대외 출입은…….”
“금지령을 내리게.”
“그로 인해 발생할 손해가 막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것은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에게 책임을 물면 되겠군.”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삼공자를 만나 보진 않으셨지요?”
“그렇다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직접 만나서 확인할 생각이네.”
“그러니까 그게…….”
순간 호요성의 눈이 빛났다. 이천상이 채우는 잔이 두 개였던 것이다.
병을 놓은 이천상이 나른하게 말했다.
“날 제대로 설득하면 앞으로도 이전과 같을 것이고, 설득하지 못하면 이 잔은 녀석이 마시는 마지막 술이 될 걸세.”
기다렸다는 듯 대전 밖에서 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삼공자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이게.”
쿠구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고 서량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