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승부수를 띄우다 (2)
마신궁 입구에 선 채여민이 뒷짐을 지곤 발끝으로 돌멩이를 툭툭 걷어찼다.
소당은 안절부절못했다.
“공녀님. 이만 거처로…….”
“싫어.”
“공녀님!”
“오라버니 나오면 같이 밥 먹을 거야. 안 가.”
소당이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삼공자님께서도 공녀님이 기다리시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
“괜히 자신 때문에 기다리는 걸 아시면 얼마나 속상해하시겠어요. 삼공자님께서 공녀님을 많이 아끼시는 거, 아시잖아요?”
채여민이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 여기서 기다리면 오라버니가 별로 안 좋아할까?”
“아마 그러실…….”
“근데 소당도 오라버니한테 안 물어봤잖아.”
이 정도면 괜히 떼를 쓰는 거라 봐도 무방하다.
소당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좋지 않아.’
그녀는 채여민이 서량과 어울리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물론 그 악질적인 소문이 대공자가 꾸민 짓이라는 건 뒤늦게나마 알아챘다. 그 부분에선 확실히 자신이 오해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오해는 오해일 뿐이다. 소당이 본 서량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의 공녀님은 삼공자님을 감당하지 못해. 아니, 어쩌면 평생 그럴 수도 있어.’
소당이 입술을 깨물었다.
‘후계 싸움이 금년에 마무리된다지만 그래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아.’
그녀는 채여민이 보다 더 강해지길 원했다. 단단해지길 원했다.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길 원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대권을 차지하고 신교의 주인이 되어 땅땅거리며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채여민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정말 소문대로 금년 안에 후계 싸움이 마무리 된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후보들을 없애 버릴 가능성이 있어.’
황자(皇子)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 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했다.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날뛰는 동시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왜? 황제가 되면 차후 정적이 될 수도 있는 다른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게 정석이니까.
황제가 되지 못한 형제들에게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황통(皇統)을 잇지 못한 황자들을 중심으로 반역이 일어날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 두지 않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에야…….’
소당의 눈에 위험한 빛이 일렁였다.
고수를 암살하는 방법은 많다. 극마의 고수라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겠지만, 그래도 찾다 보면 나올 것이다.
그때, 채여민이 소당을 올려다보았다.
“소당?”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소당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잠시나마 삼공자를 암살할 생각을 한 스스로가 답답했다. 성공해도 문제지만, 만일 실패하면 그 화(禍)는 채여민에게도 미칠 것이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방법이다. 채여민을 위해서라도 그래선 안 된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참고 기다리는 것뿐일까?’
채여민의 눈이 커졌다.
“어?”
“왜 그러시는지요?”
“언니야.”
“네?”
채여민이 가리키는 곳을 본 소당은 깜짝 놀랐다.
“오공녀님?!”
주서윤이 채여민에게 다가왔다.
채여민이 양손을 배에 모으곤 허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소당과 있을 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무척이나 예의가 바른 모습을 보아, 채여민이 주서윤을 다소 어려워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서윤이 힐끔 소당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네? 아, 네! 공녀님께서도 이만 거처로 들어가시려…….”
채여민이 손을 저었다.
“셋째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주서윤의 눈이 빛났다.
“셋째 오라버니를?”
“네. 나오시면 같이 밥 먹으려고요.”
“밥이라…….”
주서윤이 마신궁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사부님께서는 오라버니와 대화 중이시겠구나.”
“네!”
무표정한 주서윤의 얼굴 위로 한 줄기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흘러가는 상황을 대략 알고 있었다. 나아가 지금 서량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도.
‘이번만큼은 사부님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반역을 무기로 썼다. 그것 때문에 신교 전체가 초비상 상태가 되었다.
하물며 진관용과 관평은 진짜로 반역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허위 정보로 신교를 마비시킨 것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서량은 저 문을 걸어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주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밥은 나랑 먹으러 가자.”
“네?”
“싫으니?”
채여민은 당황했다.
“아, 아뇨! 근데 저랑 먹어도 괜찮아요?”
“안 괜찮을 이유는?”
“……언니가 저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주서윤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뻔했다. 이토록 솔직한 채여민을 보면 가끔 부럽기도 하다.
“자미루로 가자.”
입을 앙다물고 생각에 잠겼던 채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요. 대신 저 맛있는 거 알려 주세요. 나중에 오라버니한테도 사 드릴 거예요.”
주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어? 근데 자미루로 가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자미루는 한동안 폐쇄한다고 들었는데요? 루주도 혈혼각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몸은 안 다쳤는데…….”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
하지만 주서윤은 굳이 루주의 정신 상태까지 신경 써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미루의 숙수들이 만들어 낸 음식이 먹고 싶을 뿐이다.
“폐쇄한 건 아니야. 가자.”
“네!”
그렇게 두 여인이 나란히 걸었다.
뒤에서 둘을 따르는 소당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차라리 삼공자보다는 오공녀가 낫지.
* * *
기분 탓일까?
서량이 대전으로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갑절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저 왔습니다.”
“왔나.”
분위기가 그리 텁텁한데도 두 사람은 평소와 같았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랬다.
호요성이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 하면 소신은 이만 나가…….”
“여기 있게.”
“예?”
이천상이 여전히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신교 역사상 최악의 정쟁(政爭)을 만들어 낸 놈일세. 교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군사부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 그렇긴 합니다만.”
“대화를 듣고, 저 녀석을 뇌옥에 수감시킬지 말지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듣는 이로선 등골이 오싹해질 말이었다. 호요성의 눈이 저절로 서량에게 향했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시작부터 얼큰하군요.”
“네가 자초한 일이다.”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부인해서도 안 될 일이다.”
스르륵.
태사의에 등을 묻고 있던 이천상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보기 드문 꼿꼿한 자세였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수법으로 반역을 택한 것은 실수였다. 이유를 아느냐?”
“차후 본교의 수뇌부들이 악용할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질이 나쁘지요.”
“그렇다. 교내 마인들 대다수가 이번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 반역이란 어떤 대의명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거늘, 이를 정쟁의 무기로 꺼내 들었어.”
이천상의 눈빛이 칙칙해졌다.
“동시에 너 자신의 능력이 모두를 압도할 정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 싸움이기도 하다. 네가 진짜 능력이 있었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겠지.”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고로 너의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든 나를 설득하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시간 길게 끌 필요는 없겠지. 시작해라.”
잠시 고민하던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부담이 되기는 하네요.”
“…….”
“일단 이것부터 드리겠습니다.”
서량이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우우우웅.
서신이 저절로 떠올라 이천상에게 날아갔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서신에서 풍기는 기묘한 피 냄새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엇이냐?”
“읽어 보십시오.”
꽤나 건방진 작태다. 물론 이천상은 이전처럼 그런 사소한 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서신을 펼쳐 든 이천상.
번쩍!
그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하나 남은 손으로 잘도 적더군요. 당연히 자필입니다.”
“…….”
“믿기 힘드시면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호요성은 깜짝 놀랐다.
저 서신이 관평의 자백서라는 데에 놀랐고, 그것을 보는 이천상의 얼굴에 흔치 않은 놀라움이 엿보여 놀랐다.
놀란 눈으로 서량을 보던 이천상이 다시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두 사형제의 능력이 출중해 이번 후계 싸움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대공자 진관용이 극마에 오르는 방법을 제시함과 동시에 부교주(副敎主)직을 새로이 만들고 저를 그 자리에 앉혀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에 그와 연수할 것을 수락하였으나 교주님의 치세(治世)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이 기회에 교주님을…….’”
그 뒷말은 서량이 받았다.
“제거하기 위해 이신합마(二身合魔)의 마공을 개량키로 하였습니다.”
“…….”
“결국 대공자 진관용은 죽어 버렸고, 저는 천마군에게 위해를 가한 중죄로 뇌옥에 갇혔습니다. 어차피 후계자로서 자격을 상실한 마당에 마지막에나마 당당해지고자 그간의 사정을 적사오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 외우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리 적으라고 시켰으니까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서로가 이번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기에 서슴없이 뱉을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교주 면전에서 말할 수 있는 배포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호요성은 서량의 담대함에 혀를 내둘렀다.
스륵.
탁자에 서신을 올려놓은 이천상이 서량을 주시했다.
“어떻게 했느냐?”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변호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이번 사태가 반역이라는 걸 인정하기만 한다면요.”
“그걸로 둘째가 자백을 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반역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참형에 처해진다. 한데도 이런 자백을 받아 냈다니.”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넌 약점을 잡힐 만큼 어설픈 녀석이 아니니, 따로 거래라도 한 것이냐?”
놀란 와중에도 날카로운 안목은 여전하다. 새삼 느끼지만 무엇 하나 숨길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광증을 고쳐 주고 극마에 오를 방법을 알려 준다고 했습니다.”
“극마에 오를 방법이라?”
“예. 그리고 극마를 깨우치게 되면, 그때 중용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중용?”
“예, 제가 교주가 된다면요.”
후욱.
안 그래도 무거웠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천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용케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구나.”
“예?”
“……진정 둘째를 중용할 생각이냐?”
“물론입니다. 아! 제가 교주가 된다면요. 제가 싸가지는 없어도 한 번 했던 약속은 지킵니다.”
“흥미롭군. 하지만 그 약속은 둘째가 죽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서량이 넙죽 엎드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녀석 좀 살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