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승부수를 띄우다 (3)
정말이지 이놈은 흥미로운 녀석이다.
‘반역의 자백을 받아 왔으면서 오히려 녀석을 살려 달라고?’
지금 서량은 관평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다. 만일 관평이 생각을 바꿔 자백서가 거짓이라 외친다 해도, 이미 적은 자백서가 어디로 가진 않는다.
그저 관평을 반역죄로 처벌해 버리면 그만이란 말이다. 서량에게는, 그를 따르는 여론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한데도 약속을 지키려 하다니?
“황자(皇子)들의 싸움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이천상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황자 중 하나가 황제의 위(位)에 오르면,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다. 나아가 그들을 따르던 수하들도 모조리 도륙을 내 버린다. 이유를 아느냐?”
“혹시 모를 반역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지요.”
“정확하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권력자는 혹시 모를 반역자들의 위협에 항상 긴장하고, 권력을 얻으려는 이들은 언제 칼을 뽑아 권력자를 끌어내릴지 고민하지. 오로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서.”
“예, 알고 있습니다.”
“한데도 넌 정통성 있는 사형제들을 살려 주겠다고 하는구나. 네 밑의 동생들이야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리 치열하게 싸운 둘째를 왜 살려 주겠다는 것이지?”
“약속했으니까요.”
“그 약속이 그리도 대단한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약속은 원래 중요합니다. 기본이죠. 대상이 누구든 자기 말에 책임도 못 지는 놈이 어찌 대사(大事)를 논하겠습니까?”
“제법 그럴듯한 말이다만, 그간의 너를 봐 온 내겐 언제든 약속을 주무를 수 있는 놈으로 보인다.”
서량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약속은 중요하지만, 언제나 저의 상황을 이롭게 만드는 게 우선이거든요. 그래도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흡족한 대답이었다. 인간 이천상에게도, 천마신교의 교주 이천상에게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릅니다.”
“설명해라.”
“나쁜 놈이라고, 경쟁자였다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만큼 제가 약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천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
“그만큼 네가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적어도 유혹에 흔들리는 머저리 하나 다루지 못할 만큼 약해 빠진 졸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용인술(用人術)에 자신이 있단 말이지.”
“예. 그놈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거든요.”
“흥미롭구나. 둘째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관심입니다.”
풉!
이천상과 서량이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호요성이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숙였다.
“크허허험! 죄송합니다, 너무 의외여서요.”
이천상이 다시 서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관심이라고?”
“놈이 그러더군요. 최고 권력자가 되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게 꿈이었다고.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 모두가 찾아오는 신(神)의 삶을 영위하는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
“예, 그놈이 원하는 이상은 바로 교주님입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교주님과는 너무나도 다르지요.”
“그 또한 맞는 말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이천상이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대전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웅.
탁자에 놓여 있던 잔 하나가 두둥실 떠올라 서량에게로 향했다.
“육천심주네요?”
“별로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냉큼 잔을 받아 든 서량이 그대로 잔을 비웠다.
이천상이 호요성에게 물었다.
“군사는 어떤가?”
“예?”
“저 앙큼한 놈이 허상의 반역을 진짜 반역으로 만들어 버렸네. 군사부의 수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
호요성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용납할 수 없지요.”
“역시 그런가?”
서량이 얼굴을 구겼다.
웃으며 서량을 보는 호요성, 그의 입에서 살벌한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허위 정보로 본교 전체에 비상을 걸었습니다. 이는 반역에 준하진 못하나, 충분히 죽을죄라고 사료됩니다.”
“계속해 보도록.”
“나아가 반역을 저지르지 않은 두 사람을 진짜 반역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누명을 씌운 것이지요. 아무리 후계 싸움이 중요하다 한들, 이것은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입니다. 후보 자격을 박탈해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입니다.”
서량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진짜로 만들었으면 됐지, 뭘.”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삼공자는 이 반역을 진짜로 만들어 교주님의 권위를 훼손시켰습니다. 이후 본교의 사서(史書)엔 교주님 대(代)에 반역이 터졌다는 내용이 기재될 것입니다. 하물며 정파에서 보낸 첩자도 아니고, 교주님께서 직접 키우신 제자가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
“교주님께서는 다음 세대 마인들의 머릿속에 완벽한 신(神)으로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들으니 확실히 잘못은 잘못이다.
서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일을 저지르긴 했는데, 막상 수습하려고 보니 확실히 대형 사고이긴 했다.
물끄러미 서량을 주시하던 호요성이 일순 히죽 웃었다.
“뭐, 교주님께서는 그런 평가 따위 신경도 쓰지 않으시겠지만요.”
그럼 왜 말한 거야, 이 양반아.
이천상이 말했다.
“후대의 평가에 신경 쓰다간 아무것도 못 하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든 자네는 이번 셋째의 행동을 그리 생각하는군.”
“무지하게 아찔했거든요. 심장이 다 벌렁거리더라고요.”
서량이 투덜거렸다.
“그런 것치곤 너무 여유롭던데? 비각도 운용 안 했으면서.”
“커허허험! 이왕이면 눈치가 빠르다고 말해 주십시오.”
우우우웅.
술병이 저절로 떠올라 서량이 내려놓은 잔 앞까지 날아왔다.
쪼르르르.
서서히 따라지는 술. 향긋한 주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적어도 첫 잔이 마지막 잔은 아니었다. 서량은 이천상이 이미 자신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천상이 말했다.
“너의 약속 때문에 반역자를 살려 줄 순 없다.”
“……음, 역시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 둘째가 죽는 것은 네가 둘째를 반역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둘째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이 일이 진짜 반역이 아니었다고 공표해야 한다.”
“쩝.”
“그것을 원하느냐?”
“절대 아니지요.”
“하면 둘째를 죽일 수밖에.”
그래도 자신의 제자인데 너무 쉽게 죽이겠다고 한다.
과거의 서량이었다면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녀석 역시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의 원한이, 그의 목표가, 그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진관용이나 관평, 그리고 홍위문은 전쟁에 휘말린 사상자일 뿐이다.
나아가 이천상의 무정함을 탓할 이유도 없다. 이천상이 저런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 사태를 만든 것은 자신이다.
즉, 모든 것은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량은 이렇게 말했다.
“형법당주를 공략해야겠군요.”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형법당주?”
“예.”
“당주에게 압력을 넣어 녀석을 죽이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교주님께서 죽이겠다 말씀하셨는데요.”
“하면?”
“형법당주를 처음 봤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
“신체의 골격을 바꾸는 괴공(怪功)이 실재한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호요성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를 세워 또 한 번 본교를 속이겠단 말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
“저는 교주님을 속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교주님이 곧 천마신교요, 천마신교가 곧 교주님 아닙니까? 교주님께서만 알고 계신다면 전 본교를 속이는 게 아니게 되는데요?”
“말장난에 불과하다.”
“말장난이지만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분은 교주님입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짓궂거나 멋쩍은 미소가 아닌,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이번 반역 사태,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십니까?”
“…….”
“교주님의 마음을 제가 감히 들여다볼 수는 없지요. 하지만 진정 아무렇지도 않으시다면, 바위에 조약돌 하나 더 얹어 보시지요.”
“내가 왜 네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느냐?”
“한 번만 싸가지 없이 말해도 됩니까?”
“말해라.”
서량이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쳐 댔다.
“시파, 거 답답하구만.”
‘커헙!’
호요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욕설 섞인 투덜거림에 이천상의 표정도 묘해졌다.
“이미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셨으면서 왜 자꾸 이유를 찾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저의 반응이 궁금하신 겁니까? 아니면 이미 흔들려 버린 스스로의 기준에 대한 애도입니까?”
“…….”
“교주님,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원하는 게 있으면, 마음 가는 게 있으면 그냥 그대로 밀고 가시는 분 아니셨습니까?”
“…….”
“저의 반응이 궁금하시다면, 저는 이미 다 보여 드렸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한계예요. 이 대화가 계속 이어져 봤자 교주님께선 제가 답답해하거나 짜증을 내는 꼴밖에 못 보십니다.”
“그러니 해 줄 거면 시원하게 해 주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라?”
“지금까지 줄곧 그래 오셨잖습니까.”
“그랬지.”
잠시 멈칫했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우우웅.
서량의 동공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대 마도 무림의 신으로 군림하는 남자를 올려다보는 눈빛이라곤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호요성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오늘 정말 진귀한 광경을 보게 되는군.’
세상에 이천상의 면전에서 저리 과격한 말을 뱉어 내는 마인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만약 지금의 내가 과거와 달라졌다면, 그것은 어쩌면 너 때문일지도 모른다.”
“엥?”
“넌 다르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온화한 미소였다.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던 인간 이천상의 따뜻한 미소였다.
“너는 달랐다. 적어도 내가 봐 온 본교의 마인들과는 말이다.”
“…….”
“제자는 스승의 언행에 큰 자극을 받는다. 때로는 스승의 말 몇 마디가 제자의 삶을 결정할 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기도 하지.”
“……그런가요.”
“그렇다.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걸 지금에야 알았다.”
미소 짓던 이천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너에게 자극받았다. 너의 행동이, 말투가, 그간 네가 벌여 왔던 온갖 황당한 일들이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
“너는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새로운 무언가를 토해 냈다. 지금도 그렇다. 어쩌면 난 그런 너의 독특함에서, 지루하고도 평이한 세상사 속 또 다른 낙을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천상은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말로 대화를 흐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어느새 그런 짓을 하고 있구나.”
“음…….”
서량이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또 아니지 않나 싶은…….”
“명을 내리겠다.”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던 이천상의 허리가 다시 꼿꼿해졌다.
“대공자 진관용과 이공자 관평은 반역자로서 처형될 것이다. 이 명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다만…….”
“다만요?”
“나머지는 너와 형법당주에게 맡기겠다.”
“……!”
“형법당주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면, 그에 관여하지 않겠다. 언제나처럼. 그러나 형법당주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반역자 관평을 참형에 처할 것이다.”
소매 속에 가려진 서량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천상이 손을 저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날 찾아오도록 하라. 두 사람 모두.”
서량이 격동 어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셋째.”
“예?”
“설득당해 주는 것은 이번뿐이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왠지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 나온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서량이 히죽 웃었다.
“앞으로도 수틀리면 설득할 테니까 너무 확신하진 마십시오.”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이천상이 손을 저었다.
“오늘 대담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