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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09화 (209/774)

209화. 승부수를 띄우다 (4)

마신궁을 나온 서량은 크게 한숨을 토해 냈다.

“시벌, 겨우 살았네.”

어떻게든 생존할 자신은 있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처리될 줄은 몰랐지만, 적어도 이번 일로 신상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 기회를 망칠 뻔했다.

순간 욱해서 교주 면전에다 쌍욕을 내뱉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어지간히 막나가는구만.’

그래도 이천상이 좋게 생각해 줘서 다행이었다. 한낱 체면 때문에 상대를 작살낼 인간도 아니었지만, 상대의 불쾌한 언행으로 치미는 화를 웃음으로 포장할 사람도 아니다.

우웅.

심장과 명치 부근, 중단전이 은은하게 진동했다.

과거 이천상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 네가 진정 신의 영역을 추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욕칠정에 제대로 녹아 보지도 못한 자가 인간의 껍질을 탈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 화내고, 웃고, 슬퍼해야 한다. 그 모든 감정에 충실해 본 자만이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법.

서량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천상은 제자인 자신의 언행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지만, 서량 역시 이천상의 언행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그의 중단전이 제대로 활성화된 것은 바로 이천상의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였다. 내상을 치료한 시점부터, 그는 모든 것을 마학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가끔가다 한 번씩, 이전의 그였다면 상상 못 할 감정들이 치솟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문제 될 거 전혀 없어. 그렇게 생각해야 해. 실제로 문제 될 게 없기도 없잖아?”

마학의 대부분을 통달했지만 마공의 기본인 중단전엔 다소 소홀했다. 이제라도 중단전에 신경을 썼으니, 잠깐 덜컥거릴 순 있어도 비로소 완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공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이제야 마학의 순리(順理)를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중단전을 중시하란 말은 감정에 휩쓸리란 말이 아니다. 감정에 솔직해지란 말이지. 그걸 혼동하면 안 돼.’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대낮의 하늘이지만, 왠지 모르게 우중충해 보였다.

“허무하구만.”

진관용도 죽었고, 관평 건도 잘 처리되었다. 이제 고구를 만나서 뒤처리만 잘 끝내면 이번 사태도 얼추 마무리될 것이다.

그렇다. 잘 터트렸고, 잘 수습했다.

근데 왜 이리 마음이 복잡하냐.

‘경쟁자를 물리치고 비로소 후계 싸움의 고지를 점령했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이보다는 더 기쁠 줄 알았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돌이켜 보면 지나치게 과격한 짓이긴 했다.

“젠장, 술이 확 땡기는군.”

취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그때, 저 멀리서 중년 사내 한 명이 걸어왔다.

일정한 보폭, 상반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고수의 보행임과 동시에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걸음걸이였다.

“…….”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중년 사내, 고구가 허리를 숙였다.

“삼공자를 뵙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는데, 우연찮게 또 이리 보는구먼.”

“사적 친분이 깊진 않으니, 삼공자가 날 찾아올 일이라면 아무래도 공무에 관한 일인 것 같소.”

“공무를 해결키 위한 사적 부탁이랄까.”

“그렇구려.”

“바쁘면 나중에 보지.”

물끄러미 서량을 주시하던 고구가 몸을 틀었다.

“갑시다. 술은 삼공자가 사시오.”

* * *

두 사람이 찾은 곳은 내성 동쪽 끝에 자리한 작은 주점이었다.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데가 있었어?”

“찾는 사람은 거의 없소. 여기 주인도 마인이 아니오. 주점이지만 환희원 산하도 아니고.”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 거야?”

“내 사비로 운용되고 있소.”

“잉?”

“점주와 약간의 인연이 있소. 그래서 개인적으로 지원하고 있소.”

서량이 다시 한번 주점을 둘러보았다.

쓰러지기 직전이라 할 건 아니지만, 낡아도 너무 낡은 주점이었다. 막말로 절정고수의 장법 일격이면 반파될 정도였다.

“돈 좀 팍팍 쓰지 그랬나? 톡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데.”

고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단 들어가지.”

“그럽시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주점이군. 왠지 모르게 주변 풍경에 잘 녹아들고 있어. 신경 안 쓰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겠는데?”

두 사람이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외견은 볼품없었지만, 내부는 제법 깔끔했다. 하기야 주점이라면 음식도 해야 하는 곳인데 더러워선 안 될 일이다.

서량이 주점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침까지 질질 흘리는 걸 보니 제법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고구가 입을 열었다.

“강 노인.”

노인은 여전히 깨지 않았다. 쿨쿨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고구는 개의치 않았다.

“나 왔소.”

우우웅.

깊은 목소리에 은근한 내공이 담겼다. 화들짝 놀란 노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커헉! 뭐, 뭐야? 어떤 씹쌔…… 엥? 자넨가?”

“…….”

“왔으면 흔들어 깨우지 왜 소리를 질러?!”

“소리는 지르지 않았소.”

“딱딱한 새끼. 내가 인마, 십 년만 더 젊었어도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 줬을 거다. 알밤으로 대갈통을 딱딱, 응? 알지?”

서량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울 수는 있지만, 그래도 내성 형법당주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저런 험한 말이라니?

고구가 한쪽 탁자를 가리켰다.

“저기 앉겠소. 항상 먹던 걸로 부탁하오.”

“염병, 항상 먹던 거 내가 다 처먹었다, 이놈아. 다른 거 시켜.”

“그럼 알아서 내주시오.”

“돈은 있지?”

고구가 서량을 가리켰다.

“이분께서 치를 거요. 걱정하지 마시오.”

강 노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쓱 훑는 눈매가 나이답지 않게 상당히 불량해 보였다.

“뭐냐, 이놈은?”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고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본교의 삼공자요.”

“삼공자? 어디 삼공잔데? 공자가 뭐 한둘인감?”

“교주님의 제자시오.”

강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천상, 그 양반 제자라고? 셋째?”

“그렇소.”

“간만에 때깔 좋은 놈 물고 왔군.”

기가 막힌다.

형법당주야 그럴 수 있다손 쳐도, 교주의 제자에게까지 저리 거리낌 없이 말한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이상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강 노인이 허리를 두들기며 일어났다.

“시간 좀 걸리니까 주점 구경을 하든 쌈박질을 하든 맘대로 해. 아, 기물은 부수지 마라.”

주방으로 들어가며, 강 노인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하여튼 젊은 놈의 새끼들이 볕 좋은 날 할 일도 없다. 처자들 꾀서 꽃놀이나 갈 일이지, 뭣 하러 여기까지 와서 술을 처마신대? 아랫도리가 부실한가? 하긴 워낙 긴장 빨면서 살고 있으니 그게 제구실을 할 리가…….”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온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언뜻 화려하다는 인상까지 풍기는 입담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의자에 앉은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저 노인은?”

“여기 주인이오.”

“그걸 누가 모른대? 보아하니 무공을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배포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인 씹어 먹는군.”

“원래 그런 사람이오.”

“당신 성격에 용케 저 화려한 입담을 받아 주네.”

“못 받아 줄 이유도 없잖소.”

뭐, 그건 그래.

“사비로 지원하고 있다고? 이곳을?”

“그렇소.”

“뭐 하러 그렇게 하나? 그냥 환희원더러 관리하라 하면 안 되나?”

“환희원 소속으로 들어가면 강 노인은 주점을 포기할 거요.”

그러면 여기서 장사 안 하면 되잖아?

이런저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서량은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했다. 질문해 봤자 이해할 만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량을 바라보던 고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놀라지 않는군.”

“왜 안 놀라, 겁나 놀랐지. 본교에서 저런 노친네 만나는 게 어디 쉽나.”

“그런 말이 아니오.”

“그럼 뭔데?”

“한 번 본 적도 없는, 허름한 기색의 노인이 막말을 퍼부어도 크게 개의치 않아 한다는 거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삼공자란 자리가 벼슬이라도 되냐? 뭐,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있나 싶어.”

고구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소?”

“그래.”

“그렇군.”

창가로 고개 돌린 고구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나지만, 댁도 제법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왜 아니겠소? 근래 어떤 분께서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쳐서 머리에 쥐가 나는 기분이오.”

“커험! 역시 알고 있었나?”

“당연하오. 모르기가 더 어려웠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이긴 했다. 시기도 너무 공교로웠고.”

고구가 서량을 가만히 응시했다.

알 수 없는 눈빛에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보지?”

“나는 말이오.”

“음?”

“나는 삼공자가 부럽소.”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럽다…… 막나가는 성격이 부럽다는 건 아닐 텐데? 설마하니 내 위치가 부러운 것도 아닐 테고.”

“아니, 그것도 부럽소.”

“……생각보다 세속적인데?”

“그럼 안 되는 거요?”

“뭐어…… 그런 건 아니지만. 왠지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거든.”

고구가 피식 웃었다. 그의 쓴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먹먹함을 느끼게 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오. 교주님의 제자들을 볼 때마다 나도 그 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소. 본당의 실적이 떨어지면 노심초사했고, 분기별 평가에 높은 점수를 받으면 기뻐했지.”

“그렇군.”

“그렇소. 나 역시 그저 그런, 흔해 빠진 속물이외다. 특별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지.”

“교주님이 당신을 형법당주로 앉힌 것은 당신에게서 그만한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도 잘하고 있잖아?”

“그렇소. 하지만 그것은 내 능력이 남들보다 특출나서가 아니오. 그저 내가 나 자신을 잘 숨길 줄 알기 때문이지.”

“그건 또 재미있는 말이로군.”

“거짓말 같소? 진짜요. 실제로 당신은 나를 속물로 보지 않았잖소?”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 되었든 오늘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구만. 이건 또 이 나름의 재미가…….”

“내가 당신에게 제일 부러운 점이 무엇인 줄 아시오?”

고구는 서량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서량은 그런 고구의 격동을 받아들였다.

“뭐지?”

“내가 아무리 날고 기었어도, 목적을 위해 몸부림을 쳤어도 당신만큼 뛰어난 인재로는 보이지 않을 거란 거요.”

당신만큼 뛰어난 인재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묘한 말이다. 고구가 스스로를 얼마나 잘 숨기는 사내인지는 알지만,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한데도 저런 말을 하다니.

“그렇기 때문에, 교주님도 날 포기해 버린 것이겠지.”

“무슨 말이야?”

“형법당주가 되기 전, 나의 직책이 무엇이었는지 아시오?”

“나야 모르지.”

“당대 천마 이천상이 처음으로 받은 제자.”

“……어?”

“구대천마의 첫 제자이자, 장차 신교를 이끌어 갈 재목이라 평가받았던 희대의 천재. 타고난 무재(武才)와 뛰어난 안목으로 약관이 되기도 전에 군림마황기를 전수받았던 차기 천마 후보.”

고구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천마신교의 전(前) 대공자. 그게 바로 나요.”

서량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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