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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10화 (210/774)

210화. 승부수를 띄우다 (5)

과거 어느 때인가.

고구는 이렇게 말했다.

- 한없이 어두워서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너무나도 밝아서 사람의 눈으로는 온전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분. 가슴 시린 분노와 한이 극에 이르러 오히려 싸늘하게 굳어진, 그러나 언제라도 활화산처럼 터트리길 주저하지 않는 분.

- 세상 모든 것이 유희이며,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하시는 분. 지옥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보다가, 어느새 구름에 올라서서 지옥 밑을 내려다보게 된 분.

- 교주님께선 바로 그런 분이라오.

흘려듣지는 않았다. 지금도 기억할 만큼 인상적인 평가였으니까.

하지만 이 평가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해 보니 다소 의아한 평가다.

다른 게 의아한 게 아니다. 그 당시 고구가 했던 말은, 이천상과 사적으로 가깝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평가였다.

물론 형법당주라고 교주와 사적 친분이 없으란 법은 없다.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제자인데도 스승과 친분이 깊지 않은 사이가 있듯이.

그러나 고구의 평가는 그 이상의,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울림을 연상케 하기 충분했다.

“제자였다고?”

“그렇소.”

“……농담하는 것 같진 않은데.”

“…….”

“대체 왜?”

여러 가지 의문이 담긴 말이었다. 고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방금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무재가 뛰어나고 안목도 출중하다고. 차기 천마 후보로 내정될 만큼 뛰어난 인재라고 했어.”

“그랬소.”

“한데 왜 교주님이 당신을 내친 거지? 왜 과거를 묻어 버린 거야?”

“내 출신 때문이오.”

“출신?”

“정확히는, 내가 마도 무림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고구의 손이 허리춤을 훑었다.

차아아앙!

요대에 돌돌 말려 있던 연검이 뽑혀 나왔다. 신병이기, 절세마병이란 이름이 붙을 만한 귀물은 아니었지만 보검(寶劍) 소리 듣기엔 충분한 검이었다.

“이 검의 이름은 정(正)이오. 정검이지.”

“…….”

“사부님께서 직접 내 손에 쥐여 준 검이라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이지만, 그 순간의 기억만큼은 뚜렷하오. 따뜻하게 웃어 주며 작은 손에 쥐여 준 이 검에는 사부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소.”

따뜻하게 웃으며 검을 쥐여 준 이천상이라.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천상 역시 사람이라는 걸까? 과거의 그는 어린 제자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 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서량의 생각은 틀렸다.

고구가 말하는 사부님은 이천상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말도 기억하오.”

“음?”

“필히 이 검을 천마(天魔)의 심장에 박아, 정도(正道)의 의기(義氣)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라고.”

“……!!”

서량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고구가 쓰게 웃었다.

“그렇소. 나는 첩자였소. 당대 의천맹주의 치세 속에 묻혀 버린, 지금은 있지도 않은 직책인 의천맹의 부맹주(副盟主)를 역임했던 천산백선(天山白仙) 기현(起賢)이 바로 나의 사부였소.”

‘기현? 천산파의 문주!’

저 멀리 신강 서쪽, 만년설로 뒤덮인 천산(天山)에 똬리를 튼 무파로 그 명성이 구대문파 못지않았던 거대 문파가 바로 천산파였다.

하지만 수백 년 영화를 꽃피우던 천산파는 이십여 년 전에 몰락하고야 말았다.

바로 당대 의천맹주 때문에.

전대 맹주를 몰아내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부맹주 기현을 모함해 죽인 그는 천산파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놔두면 훗날 문제를 일으킬 거라 생각한 의천맹주는, 천산파가 마도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씌워 멸문시켜 버렸다.

그렇다. 그것은 누명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누명이었을까?

“나중에야 깨달았소. 그 사람에게 난 도구에 불과했다는 걸. 진짜 제자를 생각해 주었다면 코 밑에 수염도 안 난 어린애를 복마전(伏魔殿)에 보내진 않았겠지.”

“…….”

“하지만 그런 사부라도 내가 천마의 제자가 될 줄은 몰랐을 거요. 사부가 내게 원한 것은, 그저 신교의 일꾼이 되거나 무사가 되어 소소한 정보를 가져와 주는 것이었으니까.”

“당신 배포도 보통이 아니었군.”

“그렇소. 그리고 자신도 있었소. 나는 스스로를 숨기는 데에 능하니까.”

“그렇…….”

순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축골공.”

“그렇소. 축골공은 사부가 내게 직접 전해 준 기공이오.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사부를 원망하나?”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에 대한 원망은 교주님의 제자가 된 시점에서 버렸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곤 하나, 나 역시 두 사람의 스승을 모신 셈이니까.”

물끄러미 고구를 보던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얼마나 험하게 살아왔는지는 알겠어. 어떻게 교주님의 제자가 됐는지, 어떻게 형법당주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다.”

“…….”

“진짜 궁금한 건…….”

“왜 삼공자에게 이런 말을 하느냐, 그것이오?”

“맞아.”

고구가 희미하게 웃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삼공자는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소. 이변이 없다면 삼공자는 차기 교주가 되어 신교를 통치하게 될 거요.”

타인에게, 그것도 고구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실감이 확 났다.

그렇다. 이제 속 편한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서량은 과거, 그토록 무서워하고 껄끄럽게 생각한 천마신교라는 괴물의 고삐를 쥘 사람이 된 것이다.

“어차피 후계자로 낙점되면 나에 대해서는 다 알게 될 거요.”

“그래서 미리 말해 준 건가?”

“그렇소.”

“어떻게든 알 사실이었다면, 굳이 지금 말해 줄 필요도 없었지 않나?”

서량이 검지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것도 사비로 운용하는 주점까지 데려와서 말이지.”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나와 삼공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굳이 내가 애용하는 주점까지 데려와서 뜬금없이 과거사를 주절거릴 필요는 없었소.”

“그런데?”

“그저 삼공자를 확인해 보고 싶었소.”

“확인?”

“그렇소.”

“어떤 확인이지?”

그 뒤에 이어진 고구의 말에 서량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삼공자가, 나처럼 의천맹 측에서 파견한 첩자라고 생각했소.”

“……!”

“물론 물증은 없었소. 심증이랄 것도 사실, 대단치 않지. 다만 난 삼공자에게서 나와 비슷한 냄새를 맡았소.”

서량의 눈이 빛났다.

“비슷한 냄새라…….”

감이 좋다.

그는 고구처럼 파견 나온 첩자가 아니었다. 그저 의천맹주의 수족 노릇을 하다가, 하늘의 장난으로 천마신교란 괴물의 아가리에 떨어져 버린 살수 나부랭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서 고구는 어떤 동질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 감이 틀렸던 모양이오.”

고구가 주방을 힐끔거렸다.

마침 음식이 다 된 듯, 강 노인이 투덜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젠장, 간만에 하려니까 오락가락하네. 간이 안 맞을 수도 있어. 짜도 그냥 처먹어.”

“강 노인.”

“왜 또 불러! 음식 더 시킬 거면 입도 열지 마!”

“어떻소?”

“뭐가 어때?”

고구가 턱으로 서량을 가리켰다.

강 노인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이놈은 아냐.”

“정말이오?”

“아니라니까. 이놈에게서는 정파 놈들 특유의 쾨쾨한 냄새가 나질 않아. 쓰디쓴 것이 딱 마인이구먼.”

“그렇군.”

“다만 쓴 내도 그리 강하지 않아. 마인은 마인인데 좀 독특하군. 관상을 보니 어지간히 사고 좀 치고 다니겠어.”

서량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이 상황은?”

고구가 설명하기 전에 강 노인이 말했다.

“뭐긴 이놈아! 이 무뚝뚝한 놈이 네가 의천맹에서 보낸 첩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데려온 게지!”

“영감이 그걸 알아?”

“어린놈이 말본새가?”

“아냐고.”

“아니까 데려왔지!”

“어떻게 알아?”

강 노인이 고구를 돌아보았다.

“말 안 해 줬냐?”

“그렇소.”

“거참, 넌 알다가도 모르겠다. 네 눈물 나는 인생 역경은 풀었냐?”

“풀었소.”

“그런데 왜 내 얘기는 안 해 줬어?”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영감이 누군데?”

강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놈이 말 안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야. 그러니 나도 말 않겠다.”

“지들 멋대로군.”

“이건 나이도 어린 게 주둥이에 걸레를 물었구먼. 세상 잘 돌아간다, 이놈아.”

“교주 제자한테 막말하는 영감도 만만치 않아.”

“이 새끼야! 난 신교 사람 아니니까 네가 교주 제자든, 교주 첩이든 상관없어!”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늙은 귀에 들리지 않을까 봐 두 번, 세 번 연달아 뀌어 줬다.

“신교 안에 들어왔으면 영감도 마인이야. 교주 제자를 귀하게 대접해 주지 않는데 나라고 어찌 영감을 귀하게 대해 줘?”

“나이가 있잖아, 이 자식아.”

“묏자리 알아볼 나이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얼씨구? 왜? 마음에 안 들면 한칼 쑤셔 보려고?”

“톡 건드려도 죽는 걸 뭐 하러 힘들게 칼까지 들어. 딱밤 한 대면 충분할 것 같은데?”

강 노인이 고구를 보며 투덜거렸다.

“어째 저놈 싸가지가 너 어렸을 때보다 더하다, 더해.”

진절머리 난다는 듯 손을 저은 강 노인이 졸고 있었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부족하면 직접 가져다 먹어. 나 잘라니까.”

강 노인은 보란 듯이 다리를 척 꼬더니, 팔짱까지 끼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셋을 세기도 전에 드르렁 소리가 났다.

“별 재미있는 영감이 다 있구만.”

피식 웃음을 흘린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뜰로 나가지.”

“음?”

“영감태기 자잖아. 날도 좋은데 밖에서 먹지.”

두 사람이 음식과 술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두 잔에 술을 따른 서량이 툭 던지듯 물었다.

“저 영감 존재, 교주님도 아시나?”

“그분이 모르시는 건 없소.”

“하긴.”

수상한 노인이다. 그리고 궁금한 노인이다.

평소라면 노인이 누구인지 귀찮을 정도로 캐물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

서량이 잔을 들었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게, 내가 당신처럼 의천맹의 첩자인지 알아보려고 온 거라고?”

“그렇소. 하지만 그런 이유만은 아니오.”

“그럼?”

고구도 뒤따라 잔을 들었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저 삼공자와 이런저런 얘기나 하고 싶었소.”

“황송하구만. 날 바짝 선 나랑 담소 조금 나눈다고 기분이 풀릴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서 후회 중이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고구도 미소를 지었다.

“한잔하지.”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

“말씀하시오.”

“뇌옥에 수감된 놈들 중 하나 골라서 관평 놈과 바꿔치기 좀 해 줘. 당신의 축골공을 사용해서 말이야. 당연히 나한테 가르쳐 줄 필요는 없어.”

고구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주님께서 허가해 주셨소?”

“안 해 주셨으면 내가 당신한테 이런 부탁 하겠나?”

“허가를 안 해 주셨어도 사고부터 칠 분 아니었소?”

“그리 말하면 할 말 없고. 어쨌든, 그게 내 부탁이야. 들어줄 텐가?”

서량은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고구는 허무할 정도로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알겠소.”

“……어?”

“왜 그러시오?”

“어, 아냐. 고마워서.”

“다만 나도 부탁이 있소.”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그렇지. 하기야 거래가 나도 마음 편하긴 해. 부탁이 뭔데?”

“앞으로 일 년간, 내가 원할 때마다 나와 비무를 해 주시오.”

이건 또 뜬금없는 부탁이다.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무를?”

“그렇소.”

“…….”

“어렵겠소?”

서량이 고구의 눈을 직시했다.

고구는 진심이었다. 두 눈에 어린 열망이 놀랍도록 강렬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고맙소.”

“고맙긴. 그저 거래일뿐인 것을.”

“따로 증서 같은 것은 적지 않아도 되겠소?”

“이 양반이 날 어떻게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비운 고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시오.”

“왜?”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나와 비무를 해 주시오.”

“음식 식어.”

“…….”

“참나, 알겠어. 한 판 붙어 보지.”

자리에서 일어난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맑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당신이랑 한 판 붙고 찐하게 마신 후에 늘어지게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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