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211화 (211/774)

211화. 바람 앞에 되살아난 불씨 (1)

사흘 후.

“으다다다!”

기지개를 켜고 나온 서량의 얼굴은 그런대로 개운해 보였다.

계단에 앉아 정성스레 도자기를 닦던 여상린이 한마디를 던졌다.

“괴물.”

“엉?”

“괴물이라고요.”

“내가 왜 괴물이야?”

“완전 괴물이죠.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심한 내외상에 다리까지 절뚝거리고 다니셨잖아요.”

“그랬지.”

“교주전에 다녀오시고 사흘 동안 내리 주무시더니, 지금은 어째 멀쩡해 뵈네요?”

“그런가?”

서량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확실히 몸이 괜찮아지긴 했다. 자고 있는 와중에도 마기가 끊임없이 육체를 순환하며 내상을 치료했으니까.

내상이 낫는 속도가 빠르니 오장육부도 금세 제 기능을 한다.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하자 마기의 운행이 더욱 원활해졌다. 그리고 원활해진 마기가 외상(外傷)까지 빠르게 아물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아직 좀 쓰리군.’

이전처럼 내상을 다스리지 못했다면 모르되, 중단전을 활용하는 지금의 그는 어떤 내외상이든 빠르게 치료할 수 있다. 다만 내상은 내상인지라 거동을 조심하는 게 좋다.

“이런 몸으로 잘도 칼부림을 했어.”

“네?”

“아냐.”

고구한테 한 방 맞은 어깨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낭창낭창한 연검을 쓰던 인간이 냅다 장력을 터트리는데, 내상이 심해서 막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서량이 여상린을 힐끔거렸다.

“넌 뭐 하냐?”

“도자기 닦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뭐 하러 닦냐고.”

“광내려고 닦지 왜 닦아요?”

……그렇지?

왠지 바보가 된 것 같다. 당연히 광내려고 닦았겠지.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경황이 없어서 말 못 했는데…….”

“사과는 안 하셔도 돼요.”

“엉?”

“사과 안 하셔도 된다고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합니다.”

“한두 번이잖아?”

“어쨌든요.”

서량이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나 목소리를 보면 딱히 삐지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미안함이 남아 있어서 그럴까? 괜스레 그녀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여상린이 피식 웃었다.

“진짜 이상한 분인 거 알아요?”

“누구? 나?”

“네.”

“내가 왜?”

“아니에요. 그나저나 배고파도 밥은 이따가 드세요. 화아가 지금 약식 만들고 있으니까.”

“어어, 그래야…… 응?”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화아?”

“왜요.”

“앵화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냥 언니 동생 하기로 했어요.”

“그렇구만.”

서량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했다. 사실 동필이나 미친, 아니 위 대주는 앵화가 가까이하긴 좀 뭣하거든. 나야 말할 것도 없고. 앵화한테도 좋은 친구가 생겼으면 했는데 네가 그걸 해 주는군.”

여상린이 묘한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신기한 분이기까지 하네요.”

“음?”

빙궁의 알력 속에서 자라 온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제법 험한 인생을 살았다.

어릴 적 그녀를 살려 준 사람은 유모였고, 가장 친한 사람은 시녀였으며 든든한 호위무사는 하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신분이 사람의 고결함을 결정짓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세상의 상식이 어떠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일개 시녀와 의자매를 맺은 자신의 행동이 어찌 보일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도 이 괴상한 삼공자는 잘됐다며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진짜 희한하단 말이야.’

어쩌면 이런 삼공자야말로 천마신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일는지도 모르겠다. 신분보다는 능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누구라도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겠지.

그때, 주방에서 앵화가 나왔다.

“휴, 덥다. 이 정도 양이면 얼추…… 어?”

앵화가 고개를 팍 숙였다.

“공자님! 일어나셨어요?”

“어? 어어.”

“배고프시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금방 식사 차려 드릴게요!”

“아냐, 오늘은 그냥 내가 알아서 먹지.”

서량이 턱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내 식사는 됐으니까 약식 만들었으면 같이 혈혼각이나 들르자. 동필이 얼굴이나 봐야겠다.”

* * *

“고, 공자님!”

마동필이 상체를 벌떡 세웠다.

한옆에 선 의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리해서 움직이지 말라 그렇게 말했거늘, 이 남자는 배움이라는 게 없나 보다.

서량이 손을 저었다.

“누워 있어, 인마.”

“아, 아닙니다!”

“이게 확! 죽을래?”

“…….”

“누워, 새꺄. 너 때문에 여기 의원이 고생한 게 물거품이 되면 어쩌려고 그러냐?”

마동필이 어색한 얼굴로 다시 누웠다.

서량이 의원에게 물었다.

“이놈 상태는 좀 어떻소?”

의원이 황공하다는 듯 허리를 접었다.

“워낙 체력이 좋아서 회복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처음에는 두 달을 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마기가 왕성해지는 상황입니다. 이 상태면 얼추 보름 뒤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소.”

“아닙니다. 저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니지.”

서량이 품에서 작은 전낭을 꺼내 의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남에게 감사를 전한 적이 별로 없어서 뭘 가져와야 할지 모르겠더군. 그냥 이것으로 대체하리다.”

“예?”

“바쁜 건 알지만 쉴 때 동료들과 술 한잔하시오. 이놈 잘 관리해 줘서 고맙소.”

의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설마 삼공자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마동필이란 사람이 삼공자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뜻이리라.

“가, 감사합니다.”

“우리 애가 약식 좀 만들어 왔는데 먹여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시녀가 만든 약식은 본각에서 만든 약식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더군요. 정성은 더 많이 담겼을 테니, 필시 환자의 몸에도 좋을 것입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마인 입에서 정성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쉽지 않다. 중원에서 악명이 자자한 천마신교지만 괜찮은 의원은 어느 동네나 비슷한 모양이었다.

“자리 좀 비워 주시오.”

“예, 그럼.”

의원이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서량이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살 만하냐?”

마동필이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는 있어도 검을 휘두를 수는 없겠지.”

“…….”

“고생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 부족함 때문에 공자님께 누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지금 네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자가 중원 천하에 몇이나 될 것 같으냐? 이번엔 그냥 운이 나빴던 거야.”

“…….”

“그리고 뭐…….”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사과를 하려면 내가 해야지.”

“고, 공자님!”

“맞잖아. 괜히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건데. 너와 앵화에게 내가 면목이 없다.”

놀란 앵화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찌나 빠르게 젓는지 휙휙 소리가 날 정도였다.

“아니에요, 공자님!”

“아냐. 너희까지 끌어들일 싸움은 아니었어. 결과적으로 내가 무능했던 거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마.”

“…….”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앵화는 안절부절못했다. 공자님께서 저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반면 마동필의 얼굴은 차분했다.

“공자님. 혹시 예전에 공자님께서 하셨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음?”

“형산 소향곡으로 가기 전, 공자님께선 제게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선택이란 것을 하라고.”

“…….”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상부의 명령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저는 이미 선택을 했다고, 이 선택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 말했습니다.”

“그랬지.”

“또 공자님께선 이렇게도 말씀하셨지요. 언젠가 저를 장기의 말로 쓸 때가 올 거라고. 그리고 전 이렇게 답했습니다. 일개 졸(卒)로 쓰겠다 하신들, 기쁘게 명을 받겠노라고.”

서량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별걸 다 기억하고 있군.”

“저는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동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공자님께서는 제게 사과하실 필요도 없고, 그러셔도 안 됩니다. 공자님께서는 꿈이 있지 않으십니까?”

“…….”

“저는 그 꿈을 이뤄 드리기 위해 공자님의 검이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검을 마음껏 휘두르는 것도 공자님의 의무입니다.”

“그렇군.”

“부러지지 않는 검이 되겠습니다. 그저 한 번씩 기름칠만 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안 본 사이에 말솜씨가 늘었군.”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다.”

“…….”

“농담이야, 인마.”

마동필이 볼을 긁적였다.

서량이 앵화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식욕을 자극하는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살짝 맛을 봤는데 아주 괜찮더라. 간이 좀 약하긴 했지만 환자에게는 이만한 식사가 또 없을 테지.”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앵화가 동필이 수발 좀 들어 줘.”

“네!”

앵화의 부축을 받고 조심스레 상체를 세운 마동필이 물었다.

“어디 가실 곳이 있으십니까?”

“그래. 한 번씩 들를 테니까 회복이나 확실하게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왜?”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의원들의 대화를 들었는데, 혹 이공자를 살려 주셨습니까?”

“그런데?”

“조심하십시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는 마동필이 조심하란 말은 한다. 그만큼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때 저희를 습격한 이들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삼공자님의 사람인 저희를 습격할 수 없었겠지요.”

“그렇겠지.”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것은 단순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응?”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하오나, 공자님께 원한을 가진 이들이 있는 듯합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원한이라?”

“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들의 눈에서 살기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살기는, 엄밀히 말해 저희를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향한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초절정고수의 감각은 절정고수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나 서량과 함께 단련된 마동필의 감각은, 동등한 수준의 고수 이상의 예민함을 자랑한다.

살기(殺氣)에 섞인 의지, 그 의지가 향하는 방향까지도 미약하나마 읽어 낼 수 있다.

그런 마동필이 이리 말한다면, 필시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

“대공자와 이공자가 그들을 부린 게 아니라, 그들이 두 사람을 부추겼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그들을 전부 잡아들이지 못했다면, 그들은 필시 이공자에게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습격자들은 모조리 뇌옥에 가뒀는데?”

“몇 명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일곱.”

“저희를 습격한 자들은 총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검에 죽은 놈들은 열다섯입니다.”

“……셋이 남는군.”

“그렇습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가 따로 조사해 보마.”

“부디 조심하십시오.”

“오냐. 너도 몸조리 잘해라.”

혈혼각을 나온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즘은 자꾸 하늘을 보게 되는군. 저 퍼런 거 본다고 고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서량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내게 원한이 있는 자들이라?”

이거 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군.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