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바람 앞에 되살아난 불씨 (2)
“안녕하슈.”
“커헉!”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이라도 된 양 소연심이 밭은기침을 뱉었다.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서량이 멋쩍게 웃었다.
“미리 서신이라도 보낼까 싶었는데 왠지 소 원주가 안 만나 줄 것 같아서 몰래 양상군자(梁上君子) 짓이나 해 봤습니다.”
“안 만나 주긴 왜 안 만나 줘요? 공자님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죠.”
“고마운 말씀입니다그려.”
소연심이 투덜거리며 서류들을 치웠다.
“가끔 보면 공자님 진짜 이상한 거 아세요?”
“이상하단 말을 자주 듣네요, 요즘.”
“잘됐네요. 스스로를 돌아볼 계기가 되겠어요.”
“말발은 여전하시네.”
“공자님에 비할까 싶네요. 차는 어떤 걸로 드실래요?”
“아무거나 주십시오. 알잖아요, 혓바닥 저급한 거.”
“굴송차?”
“벽라춘.”
대충 주변 정리를 마친 소연심이 그를 다탁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얼마 안 됐는데, 엄청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네. 아마 그사이에 말도 안 되는 큰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겠죠?”
“그럴 수도 있고요.”
소연심의 눈이 깊어졌다.
“아니죠?”
앞뒤 다 잘라 먹은 물음이었지만 서량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예.”
“…….”
“소 원주가 생각한 대로입니다.”
“세상에…….”
소연심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진짜라니, 공자님은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시나요?”
“있었으면 좋겠군요. 여벌의 목숨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건지 상상도 안 가네요. 겁도 안 나셨어요?”
“겁먹을 시간에 내 선택을 이롭게 만드는 데에 신경 쓰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겠습니까?”
“말은 좋네요.”
결국 소연심은 피식 웃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 양반이 그간 저질러 온 일 중 상식적인 건 하나도 없었다. 느닷없는 반역 사태에 놀라긴 했지만, 서량이 그랬다니 수긍이 간다.
다만 불만은 있었다.
“공자님 덕분에 환희원이 얼마나 바빠졌는지 아세요?”
“환희원 뿐이겠습니까. 군사부는 죽어 나가고 있을 겁니다.”
“…….”
“제가 좀 뻔뻔하긴 했죠?”
“엄청요. 세상에, 어떻게 낯빛 하나 안 바꾸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쩌겠습니까? 그 고생을 보답받을 수 있도록 제가 더 잘할 수밖에요.”
“참나, 공자님답지 않게 별 기특한 말씀을…….”
순간 소연심의 눈이 흔들렸다.
차를 홀짝이던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도 조절이 잘못됐나? 향이 좀…….”
“공자님.”
“예?”
“방금 그 말씀, 정식으로 대권을 노려 보겠다는 발언인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가요?”
그러지 않았다.
분명 서량은 그러지 않았다. 은연중 속을 떠봤을 때도 칠색 팔색을 해 댔지, 야망에 불타 대권을 거머쥐리라 외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서량은 바뀌었다. 감찰사 일을 끝내고 귀환했을 때, 서량은 분명 뭔가가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여전히 대권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건만.
“이거 초짜처럼 왜 이러십니까? 제가 그 둘에게 반역이란 죄를 뒤집어씌운 것 자체가 후계자가 되기 위한 공격적인 정쟁이었습니다. 대권에 관심이 없었다면 아예 싸우지도 않고 피했겠지요.”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거나.
몇 번이나 입을 뻐끔대던 소연심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의외로군요. 하지만 뭐, 그걸 알든 모르든 상관없잖습니까? 소 원주 입장에선 말입니다.”
“상관없었지요. 지금까지는요.”
“달라졌단 말입니까?”
“네.”
소연심의 눈빛이 격동과 걱정, 기대감 등으로 물들었다.
“달라졌어요. 이 사건 이후로, 그리고 공자님이 그런 마음을 먹은 이후로.”
“왜지요?”
“현재 공자님이 후계자 자리에 가장 가까워졌기 때문이지요.”
대공자 진관용이 죽고, 이공자 관평이 반역으로 뇌옥에 갇혔다. 사공자 홍위문은 아직도 정신을 놓은 채 혈혼각 중실에 누워 있었다.
남은 사람이라곤 오공녀 주서윤과 육공자 종리영(鍾里榮), 그리고 칠공녀 채여민뿐이었다.
주서윤은 신교 최고의 천재라 불리고 있지만, 아직 그 무공이 서량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했다. 종리영이나 채여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중 채여민은 서량에게 우호적이고 나이도 어리니만큼, 경쟁자라 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경쟁자는 둘밖에 남지 않는데, 그 둘은 심계와 무공 양면에서 서량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결국은 서량이다. 서량이 차기 대권을 거머쥘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세상일이라는 게 결코 만만치 않지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소 원주도 잘 아시잖습니까?”
“알죠. 하지만 그 만만치 않은 온갖 세파를 뚫고 이 자리에 오른 분이 공자님이잖아요.”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살아오진 않았습니다. 그냥 막 나간 것에 가깝죠.”
소연심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이 터진 당시에는 이렇게 막 나가도 되나, 싶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면 서량의 일 처리는 과격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특히나 상대를 짓누르려 할 때 보여 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타고난 마인 그 자체였다.
“어찌 되었든, 공자님이 후계자란 자리에 한 발짝 가까워진 만큼 저희 환희원도 몸을 사려야겠지요.”
“하던 대로 하십시오. 사리긴 뭘.”
“사려야지요. 이 시기야말로 가장 위험한 시기니까요.”
조직에도, 그리고 후계 후보들에게도.
서량이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여전하시군요.”
“사람은 쉽게 안 변해요.”
“동감입니다. 저도 그렇거든요.”
소연심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 부탁하실 일이 있어서 오셨나요?”
“정답.”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무리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환희원에서 처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간의 인연도 있고 말이지요.”
소연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원에서 처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대체 무슨 일이기에?
“우선 첫째.”
심지어 부탁이 하나도 아니란다. 소연심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차올랐다.
“내성 동쪽 끝, 목재 모아 놓은 창고 인근에 주점 하나 있는 거 아시지요?”
“……?”
“모르셨구나.”
“글쎄요. 그런 데에 주점이 있을……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네요. 형법당주가 개인적으로 운용하는 주점이라고 했던가요? 하도 오래전에 들어서 기억이 잘…….”
“맞습니다. 사비로 운용한다고 하더군요.”
“한데 그곳이 왜요?”
“그 주점 주인이 있습니다. 강 노인이라고.”
“네.”
“강 노인의 주점으로 들어가는 식자재 관리는 이곳에서 맡고 있지 않겠지요?”
“그럴 거예요. 환희원 산하가 아니니까요.”
“대신 식자재 외의 물품은 전부 환희원을 거칠 겁니다.”
“그건 그렇죠.”
“앞으로 그 검사 목록 좀 추려서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연심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원내 업무를 외부로 빼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알고 계시죠?”
“그래서 부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상하셨겠지만, 안 돼요.”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 그런가.”
“네. 안 돼요. 공자님이 정식 후계자로 공표 받은 이후라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불가(不可)합니다.”
“쩝.”
가만히 서량의 얼굴을 살피던 소연심이 물었다.
“근데 그건 왜요? 수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수상하죠. 저한테는요. 그러니까 부탁하지.”
“그렇긴 하지만요.”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두 번째 부탁으로 넘어가 볼까요?”
“벌써부터 긴장되는군요.”
“안 되면 안 된다 말씀하시는 분이 웬 긴장을 그리 하십니까.”
“일단 들어 보죠. 두 번째가 뭐죠?”
서량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소연심은 생각했다.
‘이번 게 진짜구나.’
과연 그녀의 생각은 옳았다.
“밑밥 좀 깔자면 첫 번째 부탁과 맥락은 비슷합니다.”
“어떤?”
“진관용과 관평 처소로 들어간 각종 물품 검사 목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관용 쪽은 놈이 폐관을 나온 직후부터 지금까지, 관평 쪽은 근 삼 년 치까지로.”
서량의 말대로였다. 두 번째 부탁 역시 첫 번째 부탁과 맥락이 같다.
하지만 그 무게감은 전혀 달랐다.
소연심의 얼굴도 절로 진지해졌다.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서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서늘한 그 미소에 소연심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안 될 건 없지만 감당하는 것은 소 원주님 몫입니다.”
“무슨 말씀이죠?”
“제가 그 이유를 꺼내 들게 되면, 그때부터 전 소 원주님을 지금처럼 편하게 대할 자신이 없어요. 적아(敵我), 둘 중 하나로만 여기게 될 겁니다.”
“…….”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오만함이 묻어 나오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서량은 오만해질 자격이 있었다. 소연심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군이 된다면 이보다 더 친해질 테니, 앞으로 공자님과 한배를 타야 한다는 뜻일 테고.”
“맞습니다.”
“적이 된다면……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글쎄요? 그에 관해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상황이 나빠질 경우, 원주직에서 내려오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환희원주로 죽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환희원주직에서 사퇴한 후에 죽어선 안 된다. 그것은 환희원이란 조직 역사에 치욕이 될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의 말이면 어디 해 보라며 코웃음을 쳤겠지만, 상대가 서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사람은 진짜로 그렇게 만들 힘이 있으니까.
“아시겠지만 환희원은 신교에서 제일 중립적인 조직이에요.”
“압니다.”
“내부 자료 유출을 공자님께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그렇겠지요.”
“그런 저에게 이리 무리하고도 무례한 요구를 하시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당연하지요.”
“공자님은 가끔 말도 안 되는 막무가내식 언행을 보여 주시지만, 연이 있는 사람에겐 나름 친절하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도 이리 나오시는 걸 보면…….”
소연심의 눈이 반짝였다.
“그 부탁에, 당대 환희원의 명운이 달렸다고 봐도 되겠군요.”
서량은 생각했다. 과연 소연심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런 사소한 대화에서는 오히려 호요성보다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판단이 올바른지는 모르겠으나 눈치가 빨라서 상대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줄 알았다.
“혹시 공자님께서 제게 하실 또 다른 부탁도 있을까요?”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고심하던 소연심이 입을 달싹였다. 전음을 보내는 것이다.
잠시 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주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화가 서량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환희원 총관 주화가 삼공자님을 뵈어요.”
“오랜만이오.”
서량이 소연심을 힐끔거렸다.
“무슨 의밉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의미에요.”
소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차기 환희원주는 저 아이예요. 이견은 없지요. 누군가가 제동을 걸어도, 제가 직접 막을 겁니다.”
“그런데요?”
“차기 환희원주가 보는 앞에서 말씀해 주세요.”
“그 말은?”
“저는 듣지 않겠어요. 아예 이 자리에서 나갈 생각입니다. 눈도, 귀도 막을 거예요.”
소연심이 일어났다.
“주 총관.”
“네, 원주님.”
“나는 너에게 허가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네?”
“그래도 삼공자님의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소연심이 문을 나서며 말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만…… 너를 위한 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 다오.”
쿵.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두 남녀만 남았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따로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