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바람 앞에 되살아난 불씨 (3)
거처로 돌아온 서량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오? 그랬단 말인가?”
“네.”
“거참 대단하군. 내 칠십을 넘게 살아왔지만, 세상을 그리 많이 둘러보진 못했네. 소저는 다르군. 그 어린 나이에 천하를 횡단했으니 정말 대단해.”
“과찬이세요. 어르신께서야 워낙 바쁘셔서 그런 거고요. 저는 하릴없이 여기저기 쏘다닌 천방지축에 불과하죠.”
“허허, 겸손하군. 소저 같은 사람을 보면 지난날이 참으로 아쉽네. 일찍이 혼인을 했다면 소저처럼 어여쁜 손녀를 봤을지 누가 아나?”
“헤헤, 지금도 늦지 않으셨어요.”
“예끼! 칠십 넘은 할아범을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누. 할망구들도 질색팔색을 할 판에.”
“저를 믿어 보세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요. 찾으려 들려면 못 찾을 것도 없을 거예요.”
“크하하! 참으로 달콤한 말이다만, 이 나이쯤 되면 화향(花香)에도 싱숭생숭해지기 마련이지. 그저 투정 아닌 투정일 뿐, 나는 본교에서 놀고먹는 게 좋네.”
“헤에, 신선놀음이네요?”
“마(魔)의 성지에서 신선놀음이라니, 못 하는 말이 없도다.”
“그럼 어르신께선 마선(魔仙)이실까요?”
“뭐? 허허허!”
뭐지, 이 온화하면서도 낯간지러운 대화는?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두 노소가 서량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서량은 알 수 있었다. 저 빼빼 마른 노인은 자신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는 걸.
신교에서 교주의 제자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교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노인이 제아무리 강자라도 냉큼 일어나 인사부터 해야 함이 옳다.
그런데도 노인은 심유한 눈으로 서량을 보고만 있었다.
무시? 아니다.
여상린과 대화하고 있었지만, 노인의 모든 감각은 줄곧 서량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쉽게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거, 직접 뵈니 상상 이상이외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귀하의 무공도 무시무시하군요.”
“귀하? 하하! 역시 마군이라 불릴 만하오. 배포와 호탕함은 타고났소이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빼빼 마른 몸이지만 골격은 상당했다. 칠십이 넘었다는데 허리도 꼿꼿한 것이, 자세만큼은 홍안의 젊은이 못지않았다.
노인이 서량을 향해 포권했다.
“뒷방 늙은이가 삼공자를 뵙소.”
“누구십니까?”
“한적한 곳에서 장기나 두며 사는 늙은이외다. 이름도 잊었고, 본교의 마인들은 날 고루라 부르니 삼공자도 그리 불러 주면 될 것이오.”
순간 서량의 안광이 번쩍였다.
“고루마존.”
“그렇소.”
노인, 고루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마존이란 칭호는 좀 낯간지럽지만, 그리 불리고 있소이다.”
언젠가 구대마존과도 대면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심지어 마존 중 하나가 자신의 처소로 찾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렇게 보는가.’
뜬금없지만 시큰둥하게 넘길 수 없는 만남이었다.
서량이 격식 있게 고개를 숙였다.
“서량입니다. 명성 자자한 고루마존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상린의 얼굴에 은근한 놀라움이 일었다. 그녀가 아는 서량은 상대가 누구든 쉬이 고개를 숙이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놀란 것은 고루마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웃고 있지만 그는 내심 당황했다.
“과한 인사외다. 존중해 준다면 감사하지만 그만한 인사를 받을 위치는 아니오.”
“전대 신교의 역사를 만들어 주신 열사(烈士) 중 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오히려 제가 민망하지요. 위치가 위치다 보니 허리를 더 유연히 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허허허.”
고루마존은 웃음으로 당황을 숨겼다.
당황스러웠지만 내심 흐뭇했다. 전대 신교의 역사를 만들어 준 열사라? 이 또한 과한 예의라 생각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우는 해 주는군.’
그간의 행보도, 직접 대면한 첫인상도 좋다. 한없이 과격한 줄만 알았는데,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특히나 스스로를 삼공자가 아니라 서량이라고 소개한 것이 좋았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제 위치를 내세워 거만을 떠는 사람은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미안하오. 온다면 온다고 미리 기별이라도 해야 했는데, 이 늙은이가 주책없이 슥 들러 버렸소.”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마존 분들의 입가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미소 짓는 서량, 그의 맑은 표정 속에 은근한 격동이 깃들었다.
드디어 이 영역이다.
비슷한 연배, 후계자들과 치고받았던 호시절은 갔다. 호요성? 소연심? 두 사람과의 인연도 이에 못지 않았지만 그 둘은 자신에게 흥미가 있었을 뿐, 조직을 운영하는 자들이니 제외다.
신교의 진짜 힘. 이천상이란 괴물이 달고 다니는 아홉 개의 뿔.
천하 어떤 신병이기보다도 날카롭고 흉포한 마병(魔兵) 중 하나가 움직였다. 고루마존이 움직였다는 것은, 곧 다른 마존들이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른 의미로, 이제부터는 진짜 긴장해야 한다는 거야.’
서량이 웃었다.
“술, 좋아하십니까?”
“삼공자가 이 늙은이의 취향을 제대로 봤소이다. 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어쩐 일인지 무공의 경지가 상승한 이후 술에 잘 취하질 않더군요. 그때부터 딱히 술을 즐기진 않았습니다만 오늘은 왠지 한 잔 마셔 보고 싶은 기분입니다.”
당신을 만나서 기쁘다는 뜻이다. 고루마존이 껄껄껄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 어디, 삼공자의 주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해 봐도 되겠소?”
“심사 위원이 고루마존이시라면 간만에 목구멍 좀 열어 봐야겠습니다.”
서량은 고루마존의 성격과 취향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 말을 들은 고루마존의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크하핫! 좋소! 오늘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좋습니다.”
서량이 힐끔 주방을 바라보았다.
앵화가 당찬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앵화, 부탁해.”
“네! 금방 차려 올리겠습니다!”
* * *
달 좋은 밤도 아니고, 주변 경관이 아리따운 정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서량과 고루마존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시종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참으로 대단하군. 납치에 납치로 대응했다? 그것도 야수궁주의 모든 제자를! 정말이지 배포 하나는 타고났소이다!”
“그냥 성격이 지랄 맞을 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해요. 만일 그쪽에서 저와 똑같은 수법을 썼으면 이쪽 인질도 위험해졌을 겁니다.”
“내 이리 삼공자를 보니, 그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소. 필시 묘수가 있었겠지?”
“그런 것 없었습니다. 다만 협박의 강도를 더 높였겠지요. 어차피 싸움은 기세라 하지 않습니까.”
“허? 하하! 삼공자 말이 맞소!”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고루마존.
하지만 그는 내심 깜짝 놀랐다.
‘기가 막히는군.’
그간 서량의 행보를 들은 그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죽림에서의 생존 투쟁, 사공자 홍위문을 몰아친 일화, 칠가를 상대로 한 감찰 업무는 물론 이번 운남행까지.
서량이 지금껏 저지른 일들, 해결한 일들을 듣자면 세상 이런 막무가내가 없다. 한데 이리 속사정을 듣고 나니 파격적이긴 하되 몹시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구나 싶었다.
흥미진진한 사건 사고의 연속.
이 얘기가 더욱더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량의 언변에 있었다. 빈말로도 입담꾼이라 말할 순 없지만 원체 표정이 다채롭고 표현력이 풍부해서, 고루마존은 당시 그 장소에 자신도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내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적을 만들었고, 싸웠으며 이내 죽이고 살아남았소. 그야말로 별의별 놈이 다 있었지. 하지만 소싯적 삼공자 같은 사람과 원한을 맺었다면, 결코 지금 이때까지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쓰는 방법은 병법이라 부르기도 힘든 고육지계입니다. 언젠가 당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래서 삼공자가 대단한 것이오. 재미를 본 방법의 단점을 꿰뚫어 보고 있다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 개선이 될 것이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카핫! 내가 해야 할 말이외다. 이리 대단한 분과 대작이라니, 극도(極刀)가 알았다면 날 잡아먹으려 할 거요.”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극도라 하심은, 극도마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아니겠소? 나이를 그리 먹었어도 성정이 불같고 싸움을 좋아한다오. 그만큼 술도 좋아하지. 아마 삼공자와 대작했다는 소릴 들으면 당장 내 허리를 끊어 놓으려 할 것이외다.”
극도마존.
철검마존과 함께 구대마존 중 가장 연배가 어리다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리다 하여 가벼이 봤다가는 목숨이 성치 못한다. 마존 중 가장 호전적인 극도마존의 칼날은 아직도 마도 무림의 공포로 기억되고 있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꼭 한잔해야겠습니다.”
“허허. 아마 극도와 한잔하기 전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칼날부터 다스려야 할 것이오.”
“좋지요.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서량의 주력 무공은 도법이다. 하지만 가장 위력이 강한 것이 도법일 뿐,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무공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칼을 네 자루씩이나 들고 다니는 인간을 권법가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한 도객이었으며, 극도마존과의 비무라면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고루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잘 왔군.’
그가 서량의 거처로 온 것은, 반쯤은 즉흥이었다.
그는 후계자 중 서량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서량은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순식간에 후계 싸움의 고지에 올라섰다.
당연히 만나고 싶을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야 보는 눈이 있어 참았지만, 후계 싸움이 끝나 가는 시국에야 더 이상 눈치 볼 필요는 없을 듯하여 노구를 이끌고 예까지 왔다.
그러고 나서 드는 생각은?
‘평범함과는 한참이나 떨어졌다. 예의를 알지만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이야.’
일성의 패주보다는 거대 조직의 선봉장에 더 어울리는 자다. 굳이 따지자면 교주보다 마존이나 마장에 더 어울리는 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면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것은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어. 타고난 배포에, 인간적인 매력과 출중한 무력이 함께 한다.’
고루마존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사서에 적힌 칠대 선조님과 비슷하군.’
신교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칠대천마는 신교 역사상 최고의 교주로 불린다. 특히나 마도 무림을 치세하는 데에 있어 불세출의 역량을 과시했다는 지도자가 그였다.
‘게다가 이 재능…… 이립도 되지 않아 극마에 오른 이는 신교 역사에 없었어. 느껴지는 무력은 나보다 아래지만 은연중 흘러나오는 투기가 무시무시하게 제련되어 있다. 싸움이 벌어지면 필시 능력 이상의 실력을 뽐내겠지.’
세상에 이런 자는 없다.
나이만 보면 조부와 손자라 해도 믿겠지만, 고루마존은 도무지 서량을 아래로 볼 수 없었다. 마치 온갖 세파를 이겨 낸 또 하나의 백전노장을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고루마존이 히죽 웃었다.
“술이 달구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삼공자와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소. 어느새 달이 떴소이다.”
“그렇군요.”
“달밤의 대작이라……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흥취인지.”
창가 너머 달빛을 보는 고루마존의 얼굴에 은근한 호승심이 떠올랐다.
“내, 이리 삼공자를 찾아온 데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소. 그저 흥미가 동했을 따름이지.”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담소 몇 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욕심이 끝이 없소. 술잔을 주고받으니, 또 다른 것도 주고받고 싶어지는군.”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루마존 역시 마주 웃었다.
“날 상대로 경로사상을 발휘할 필요는 없소.”
“경로사상? 그거 먹는 겁니까?”
“크하하핫!”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강렬한 호승심이 타오른다. 신분도, 나이도 다르지만 무(武)를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
연무장으로 나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우우웅.
서량의 손에 칠야도가 들렸다.
“갑니다.”
“언제든지.”
파아아앙!
서량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