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바람 앞에 되살아난 불씨 (4)
“어?”
위홍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 어?”
바보처럼 괴상한 소리를 흘리는 그녀 앞에 노인 한 명이 있었다.
당당한 체구에 허리도 꼿꼿하여 도무지 노인의 체격이라 보기 힘들다. 품에 안은 검은 흔하디흔한 철검이지만, 노인의 존재감 때문인지 흔치 않은 보검처럼 느껴진다.
한 자루 잘 벼린 검과 같은 노인. 칠 척, 팔 척의 거구가 아님에도 거인 같은 인상을 주는 자.
“어르신?”
노인, 철검마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는 호칭이구나.”
“여긴 어쩐 일로 오셨대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을 뿐이다.”
위홍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마대의 거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은 인적이 드문 숲이었다. 평소 위홍련이 비밀리에 와서 수련하는 장소로, 지금껏 어떤 마인도 이곳에 들른 적이 없었다.
위홍련이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무엇을?”
“여기가 제 수련장이라는 거요.”
“지금 알았다.”
“헤에.”
위홍련이 씨익 웃었다.
“발길 닿는 대로 오셨다…… 그 발길이 저를 향한 거네요?”
“그런 셈이지.”
마도 무림에서 구대마존의 이름은 전설이다. 신교 소속의 마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강자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위홍련은 광마대의 대주였다. 같은 신교 소속이라면, 철검마존 앞에서 감히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하지만 옆 동네 아저씨 대하듯 하는 위홍련이나, 그걸 담담하게 받는 철검마존이나 그런 자질구레한 격식은 따지지 않는 듯했다. 위홍련이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으로 워낙 유명하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철검마존의 이런 모습은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신가요?”
“그렇다.”
위홍련이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혼날 일은 안 했는데.”
“널 혼내기 위해서 온 게 아니다.”
“그럼요?”
“여전히 목숨을 내놓고 살고 있더구나.”
위홍련의 눈이 반짝였다.
철검마존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투 부대의 대장이든, 마구간 지기든 네가 택한 길에 내가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그럴 권리도 없지.”
“그런데요?”
“흥미가 동하더구나.”
“흥미요?”
“삼공자의 사람이 되었더냐.”
위홍련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런데요?”
“…….”
“왜요?”
후계 후보의 사람이 되었다.
듣기에 따라 다소 멋쩍을 수도 있을 텐데 위홍련에게선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선택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철검마존의 눈에 묘한 빛이 일었다.
“기억나느냐? 나와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하죠?”
“난 그때, 네 무공의 단점을 지적해 주었다. 네 반응은 일품이었지.”
위홍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검마존과의 첫 만남은 기억하지만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넌 이렇게 말했다. 남의 무공 지적할 시간에 노친네 검이나 한 번 더 닦으라고.”
“어…… 그랬던가요?”
“뿐이랴? 사건 사고가 잦았던 수련조의 부당함에 넌 온갖 난동을 피웠지. 지나가던 내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요약하자면, 조직의 수뇌부라면 아랫사람 관리 똑바로 하라는 것이었지.”
위홍련이 입맛을 다셨다.
“네, 기억나는 것 같네요.”
“그때 내 얼마나 황당했는지 너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막무가내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자주 듣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막지 않았다면, 넌 항명죄로 교관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요?”
위홍련이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뵈어서 참 반갑긴 한데요. 저도 바빠요. 잘 시간까지 쪼개서 수련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본론이 뭔데요?”
물끄러미 위홍련을 보던 철검마존은 고개를 저었다.
“내 어쩌다 너 같은 아이와 연이 닿았는지 모르겠다. 마존이라 불리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하늘의 이치는 참으로 알 수가 없어.”
“그건 또 뭔 소리래요?”
“네 녀석, 나의 무리(武理)를 허락도 없이 얻어 가지 않았더냐.”
위홍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리를 얻어 가다니요? 제가 언제요?”
스르릉.
철검마존이 검을 뽑았다.
말없이 검부터 빼 든 철검마존. 전투 의지도, 살의도 없었지만,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사아아아아.
방금까지만 해도 선선했던 밤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느껴진다.
사방팔방에서 무자비한 검기 다발이 비산하는 듯했다. 숨도 못 쉴 만큼의 박력 앞에 위홍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익!’
절로 물러나야 옳음에도 위홍련은 끝까지 버텼다.
철검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파사사삭!
휘두르는 철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유려하기 짝이 없는 검선(劍線)이었다. 위홍련의 광포한 검결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검결을 본 위홍련의 눈은 놀라움으로 커져 있었다.
“어? 어?”
“알겠느냐?”
“그거 환수대검(幻獸大劍)하고 닮았네요?!”
“환수대검이라? 네 녀석이 지은 이름답다.”
철검마존이 검을 거두었다. 그러자 칼날 같은 바람도 잠잠해졌다.
“용검십식(龍劍十式)이라 한다. 마도의 검법은 물론 정파, 사파의 검법들을 총망라하여 나만의 깨달음으로 풀어 낸 검법이다.”
“용검……”
“장담컨대 본교 십대검공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자부한다. 특히 상대의 방어를 깨부수고 들어가는 파괴력과 집요함은 본교의 어떤 검법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제 검법도 힘 하나는 장산데요.”
“그럴 수밖에. 내 무리를 훔쳐 갔으니.”
위홍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훔쳐 간 거 아니에요. 제가 나름대로 창안한 무공이란 말이에요.”
“맞다. 네가 창안한 무공이지. 하지만 내가 네 무공의 단점을 짚어 주지 않았다면 만들 수 없었던 무공이기도 하지.”
“쩝.”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위홍련은 그럴 수 없었다.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직접 본인의 무공을 시연까지 한 사람 앞에서 뻔뻔스레 아니라 말할 수가 없었다.
“기실, 훔쳐 갔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너의 단점을 짚어 주며 저도 모르게 무리를 심어 준 사람은 나니까. 어지간한 눈치로는 내 깨달음을 알아채기도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요?”
위홍련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르신의 무리를 제가 가져갔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팔 하나라도 내드려야 하나요?”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지금껏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남의 도움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니 기분이 좋을 순 없다. 특히나 위홍련 같은 성격이라면 더더욱.
철검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팔을 가져가겠다 하면 얌전히 내주겠느냐?”
“얌전히는 못 내주죠. 물론 결과는 뻔하겠지만.”
“그런데도 저항하겠단 말이지?”
“그럼 생팔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어요? 안 되죠, 그건. 내 팔 하나 잘릴 거면 못 해도 상대방 눈알 한쪽은 뽑아야 성에 차죠.”
철검마존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역시나 이 녀석은 대단한 녀석이다. 여인의 몸으로는 익히기도 힘든 용검십식의 깨달음을 가져가 검법을 만든 것도, 저 체격에 검법을 맞춘 것도, 그리고 지금 보여 주는 배짱 모두.
“위홍련.”
느닷없이 이름 석 자를 부른다.
스륵.
위홍련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저도 모르게 낮아진 자세, 등 뒤로 돌아간 손이 호포검의 검병을 쥐었다.
“광마대주직이 낫느냐? 아니면 마존의 제자라는 자리가 더 낫느냐?”
“낫긴 뭐가 낫…… 엥?”
위홍련이 눈을 끔뻑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광마대주로 있을 테냐, 아니면 내 문하로 들어와 사사하겠느냐? 택하거라.”
위홍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이런 제의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구대마존 중 검법제일이라는 철검마존의 휘하로 들어오라니?
철검마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멀찍이서 너의 실력을 엿보았다. 아무리 팔 하나가 잘렸어도 상대는 초절정고수였어. 너와는 수준이 달랐단 말이다. 한데도 넌 그런 실력자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몰아붙였지.”
“아, 이공자요?”
“그렇다. 그 말인즉, 너는 싸울 줄 아는 녀석이란 것이다.”
마존씩이나 되는 사람이 싸움을 잘한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결국 무인이란 그런 존재다. 대놓고 말하자면 천하의 모든 무인은 더 잘 싸우기 위해 단련하고 연마하는 것이다. 그런 무인에게 있어 싸움을 잘한다는 것은 대단한 재능이다.
“나는 후사를 두지 않으려 했다. 널 보기 전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널 보며, 사제지간이란 인력의 영역이 아님을 깨달았다.”
“음.”
“앞서 말이 많았구나. 선택해라. 나의 제자가 되겠느냐? 아니면 계속 광마대주로서 살아가겠느냐.”
흔치 않은 기회였다.
놀란 눈으로 철검마존을 보던 위홍련은, 이내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더 놀랄 만한 말을 뱉어 냈다.
“두 개 다는 안 됩니까?”
“……뭐라?”
“두 개 다 하면 안 되냐고요.”
“…….”
“아니 뭐……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진짜예요. 에……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씀밖에 드릴 게 없네요.”
그녀답지 않게 허둥거리는 것을 보면 당황하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런데요, 제가 삼공자란 인간하고 약속한 게 있어서요.”
철검마존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삼공자란 인간이라니? 위홍련이 아니었다면 검집으로 머리통부터 두들겼을 언사였다.
“약속이라니?”
“저 삼공자의 사람이 되어 버렸거든요. 그 인간한테 이것저것 받은 것도 많고요. 아, 이거 호포검이라고 하는데요. 아시죠?”
“그 검이 사신병기(四神兵器) 중 하나인 백호검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나름 끗발 좋은 영약도 얻어먹었어요.”
위홍련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원체 염치없는 년이긴 한데요. 받아먹어도 보통 많이 받아먹은 게 아니라서요. 게다가…….”
“음?”
“그 인간하고 다니면 여러모로 재미있는 일이 많아서요.”
재미있는 일? 살벌한 일이 아니라?
그리 묻고 싶었지만 철검마존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 아이에게는 그 살벌한 일들이야말로 삶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즉, 광마대주로 있어야 삼공자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렷다?”
“그렇죠. 계약이 그랬으니까요.”
“광마대에 대한 애착 때문은 아니란 말이지?”
위홍련이 피식 웃었다.
“애착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애들도, 저도 서로에게 빚진 거 없습니다. 내 삶은 내가 살아야지 남 눈치 보면서 뭉그적대면 오히려 상대한테 실례에요.”
위홍련다운 말이었다. 철검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가자.”
“어딜요?”
“어디긴. 삼공자의 거처지.”
“……네?”
철검마존이 등을 돌렸다.
“생에 처음으로 제자로 받고 싶은 아이가 생겼다. 나는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아이가 이미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었다면, 그 주인 된 사람과도 얘기를 해 봐야겠지.”
“아…….”
“따라오너라.”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하지만 위홍련은 아무 말 없이 철검마존의 뒤를 따랐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일생일대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의리를 중요시하지만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치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참나, 갑자기 이게 뭔 일이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더니만 지금이 딱 그 짝이잖아?’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철검마존의 뒤를 따르는 위홍련.
그렇게 두 사람이 서량의 거처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쿠구구궁.
대지에 강한 충격파가 전달되었다.
“어?”
위홍련의 눈이 커졌다.
“이건?”
뭉클뭉클 사위를 뒤덮기 시작하는 강력한 기파.
철검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먼저 온 손님이 계셨군.”
“누구죠?”
“고루 선배다.”
“고루 선배? 고루마존이요?”
“그렇다. 한데 이 기파…….”
철검마존의 얼굴에 걱정이 기색이 떠올랐다.
“살의가 섞였는데? 진심으로 싸우는 것인가?”
그때였다.
콰앙!
서량의 거처, 담벼락 한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