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바람 앞에 되살아난 불씨 (5)
‘굉장해.’
속도감 넘치는 도법으로 고루마존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서량의 얼굴에 황홀한 빛이 떠올랐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본래라면 네 자루 칼을 몽땅 뽑아야 옳다. 상대를 진심으로 인정했다면 이쪽 역시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서량은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가 고루마존이라면 네 자루보다는 한 자루가 낫다. 생각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칠야도였다. 넘치는 힘을 이용한 패력의 도법이 아닌 속도와 날카로움을 앞세운 일격필살의 쾌공(快攻)을 구현하기엔 용린도보다 칠야도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막힌다.
파파파팡!
날카로운 흑색의 장도는 상대의 옷깃조차 건드리질 못했다.
기실 서량 정도의 경지가 되면 어떤 무공을 펼치든 상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데 문제가 없다. 인화도법이든 지금 펼치는 단천삼도(斷天三刀)든 위험하긴 매한가지란 뜻이었다. 하물며 단천삼도는 능히 일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공이었다.
그런 단천삼도의 위험천만한 칼날을 고루마존은 여유만만하게 피해 내고 있었다.
‘무공의 맥을 짚는 안목이 극에 이르렀다. 내 도법의 흐름을 읽고 있는 거야.’
서량보다 특별히 빨리 움직이지도, 수준 높은 무공을 보여 주지 않는데도 그의 마도(魔刀)를 피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고루마존의 안목 덕분이었다. 적어도 무공을 파헤치는 안목만큼은 천하십대고수보다도 뛰어난 것 같았다.
말은 쉽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것이다. 고루마존이 마도의 마인이기에 더더욱 놀랍다.
들어오면 물러나고, 물러나면 들어가는 합(合)의 이치.
정파 무공, 남존(南尊)이라 불리는 무당(武當)의 무공을 체득하기라도 한 것 같다. 들어오면 마주 찔러 부딪치고, 물러나면 두 배로 더 집요해지는 마도의 무공답지가 않았다.
‘마공만 파고든 게 아니야.’
정파, 그리고 사파의 무공까지 모조리 답습했던 것이 분명하다. 만류귀종이라 하나, 마도의 무공만 파고들었다면 이런 식의 대응은 절대 불가능하다.
서량이기에, 정파의 신공과 마도의 마공까지 섭렵한 그였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파아아악!
고루마존의 눈빛이 돌변했다.
피냄새 물씬 풍기는 악귀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서량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삼방(三方)을 틀어막고 전진하는데, 물러날 곳은 있어도 반격의 여지는 차단해 버린다.
‘마황군림보법?!’
고루마존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놀랍구나.’
저 보법을 언제부터 익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익혔다 해도 놀랍긴 매한가지였다.
서량의 군림보는 이미 칠 성(七成)을 넘어서고 있었다. 구대마존의 수장, 원로원주의 경지가 칠 성임을 감안하면 서량의 성장세는 그야말로 폭발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물며 이 활용력이란.
‘몰아치고 또 몰아친다. 상대의 움직임을 기세로 압박하는 군림보 특유의 보행이 아니야. 치고 들어갈 여지 자체를 주지 않는 전투적인 움직임이다.’
지금껏 마황군림보를 이런 식으로 해석한 자도, 구사한 자도 없었다. 약간의 어색함이 묻어 나오는 걸 보니 즉석에서 생각해 낸 방법 같았다.
‘순간의 대응 능력만큼은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이다. 이런 사람이 있나!’
상대의 힘을 빼려고 했는데, 이러다가 자신이 먼저 당하게 생겼다.
고루마존의 눈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쿠우웅!
연무장을 강하게 밟은 그의 몸에서 은은한 흑갈색 기운이 뿜어졌다.
비로소 공격다운 공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은 고루마존, 고목(枯木) 같은 그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앙!
충격의 여파는 그리 넓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사방으로 튕겨 나갈 거대한 힘을 온전히 서량에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서량의 몸이 뒤로 확 밀려났다.
칠야도를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공(手功)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힘의 여파는 손을 넘어 상체 전체에 남아 있어서, 즉시 반격할 시기조차 놓치게 했다.
강력한 무공이었다. 저 빼빼 마른 몸으로 어찌 이런 힘을 뿜어낼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파아악!
반격이 안 되면 한 번 더 후퇴할 수밖에 없다. 서량의 신형이 연무장 반대편 끝으로 훅 물러났다.
재차 이격을 날리려던 고루마존의 눈이 번뜩였다. 그 자리에서 마주 상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과격하지만 불리하면 언제든 싸움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고루마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무섭구나.’
저만한 무공, 저만한 재능을 가졌다면 충분히 오만해질 만도 하다. 게다가 혈기 넘치는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불리할 땐 물러나 재정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어설프게 부딪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능, 무공, 경험, 마음가짐 등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출중한 무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찌 이런 괴물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투지 넘치는 싸움꾼이 아니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 위해 날뛰는 전략가라…… 무인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마음가짐이군.’
그렇다면?
화아아악!
서량의 눈이 커졌다.
‘뭐, 뭐야?’
측면으로 이동해 한 칼을 날리려던 그의 몸이 덜컥 멎었다.
허공섭물? 아니다.
위이이이잉!!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서량의 몸을 고루마존에게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기로 공기를 장악, 압박하여 무서운 흡인력으로 빨아들인다. 고루마존의 절기, 결목신수(潔木神手)에 이은 고목인(枯木引)이 펼쳐진 것이다.
구유마공의 절대마력으로 버티는데도 두 발이 자꾸만 땅에서 떨어지려 했다.
빨려 들어간다. 엄청난 인력(引力)이었다.
‘이런 무공이…….’
생사결이든 비무든, 상대와 무를 주고받으며 이토록 당황했던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허공섭물이 아닌, 단순한 기의 조화만으로 이런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싶었다.
파아아악!
고목인을 유지하며 무서운 속도로 접근해 온다. 단숨에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듯 결목신수로 쳐 오는 마기가 태산처럼 거대했다.
그때, 서량의 발이 휘어져 올라갔다.
퍽!
고루마존의 눈이 흔들렸다.
콰앙!
연무장 모서리가 움푹 파여 날아갔다. 결목신수의 장력이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쳐 내?’
순간적으로 손목을 후려쳐 장력의 방향을 비틀었다.
하단에서 올려 친 각법, 유일무이한 허점을 비집고 들어와 기어이 공격선을 바꿔 버린 한 수는 지금껏 받아 온 도법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줄곧 고목인의 인력에 저항하던 서량이 한순간 힘을 풀고 고루마존에게 달려들었다. 빨려 들어가는 힘에 보법을 더하니 그야말로 빛살과도 같은 속도가 나왔다.
고루마존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일었다.
퍼퍼퍼펑!
두 사람의 손발이 미친 듯이 얽혀 들었다.
거리를 벌린 기공전에서 근접 박투전으로 싸움의 흐름을 바꾼다. 순간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서량의 기지가 돋보였다.
사악!
고루마존의 소매가 잘려 나갔다.
자칫 손을 빼지 않았으면 손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무섭도록 예리한 일격이었다.
‘엄청나구나.’
주먹을 다 뻗기도 애매한 거리에서 삼척장도를 위로 휘둘러 벴다. 병장기술의 달인 소리를 듣기 충분하다. 주먹이든 칼이든,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외가무공(外家武功)에 통달했다는 뜻이었다.
쾅! 퍼펑! 파아악!
벽력권으로 충격파를 발생시키고 단타의 각법 두 방으로 수공의 흐름을 끊어 냈으며,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기세로 칼을 내리찍는다.
쾌속한 연환기(連環技)였다. 한번 기회를 잡으면 반격의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고루마존의 몸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서량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퍼어억!
고루마존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번 일격은 실로 무거웠다. 양팔을 교차시켜 막지 않았다면 갈빗대가 모조리 날아갔을 것이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적당히 떨어진 거리, 반격할 수 없는 상대.
‘여기다.’
쿠르르릉!
무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유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악귀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지옥의 칼바람, 인화도법의 육연지옥풍이 펼쳐진 것이다.
고루마존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어렸다.
부아아아앙!
거대한 도풍(刀風)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어지간한 무공으론 상쇄는커녕 방어도 힘들다.
쿵!
뒷발로 땅을 차 몸을 고정한 고루마존이 쌍장을 내질렀다. 한 박자 늦은 결목신수의 장력이 지옥풍을 향해 쏘아졌다.
콰앙!
폭음과 함께 고루마존이 삼 장이나 뒤로 밀려났다.
제대로 된 승기를 잡았다. 서량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파아아악!
전신의 마기를 폭발시켜 번개처럼 접근한 서량이 칠야도를 휘둘렀다.
충격을 해소하던 고루마존은 대경했다. 목덜미를 노리는 살기는 진짜였다. 진지하게 상대해 준 건 고맙지만, 이러다 진짜로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우우우우웅!!
하단에서 일어난 인력이 칠야도의 투로를 방해했다. 찰나지간 고목인이 펼쳐진 것이다.
회피와 함께 반격에 들어가려던 고루마존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도(飛刀)!!’
서량은 칠야도를 단순히 휘두른 게 아니었다. 칠야도를 던진 것이다.
단천삼도의 마지막 초식인 선풍열산(旋風裂散)이었다.
‘던지다니!’
제멋대로 회전하며 쏘아진 칠야도가 고루마존의 허벅지를 베었다.
피슉!
핏물이 튀었다.
손을 떠났으니만큼, 칠야도에 실린 마기도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구유마기가 진득하게 담겨 있었다면 허벅지가 그대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공격은?’
허를 찌른 일격. 단숨에 승부수를 던진 게 아니라, 승부수라고 착각하게 한 일격 뒤에 진짜 공격이 날아온다.
고루마존이 고개를 들었다.
코앞까지 접근한 서량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강력한 권풍에 담벼락이 허물어졌다.
“흡!”
“이익!”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루마존이 양손으로 서량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벽력권의 권풍에 닿은 그의 오른쪽 소매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손목을 쥔 양손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벽력권의 발경(發勁)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부르르르.
주먹에 힘을 싣는 서량, 그의 팔목을 잡은 고루마존의 양손에도 강한 힘이 들어갔다. 서로 모든 힘을 퍼붓고 있어서 다른 동작으로 전환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힘이 넘치시는구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떨떠름한 얼굴의 철검마존과, 입을 헤 벌린 위홍련이 있었다.
“형법당원이 이 광경을 봤다면 본교에 다시 한번 비상이 걸렸을 것이오.”
살기를 불태우며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교주의 제자와 마존의 싸움이라면 신교 전체가 주목할 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흥이 깨졌군요.”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스르륵.
두 사람의 마기가 동시에 갈무리되었다.
후두두둑.
부서진 담벼락에서 돌멩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현실감이 확 돌아오는 듯했다.
서량이 팔목을 주물렀다.
“힘이 엄청나십니다. 팔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고루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삼공자의 팔목을 부러트리기 전에 내 상체가 날아갈 뻔했소.”
“엄살이 심하시군요.”
“엄살이라니? 앞으로는 경로사상이니 뭐니, 입에도 담지 말아야겠소. 이거야 원, 그 짧은 사이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모르겠소.”
“그럴 수밖에요. 저는 진심으로 죽이려 했고, 마존께선 살기를 담지 않으셨습니다.”
고루마존이 멋쩍은 듯 웃었다.
“난 반역자가 되기 싫소이다.”
서량은 피식 웃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자신이지만, 고루마존은 모든 힘을 쓰지 않았다. 생사결이었다면 모르되 비무로 해석하면 자신의 패배였다.
한결 여유가 생기자 서량이 철검마존을 돌아보았다.
철검마존이 포권했다.
“철검이 삼공자를 뵙소.”
철검마존. 신교제일의 검법가.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앞서 고루마존을 봐서 그런지, 또 다른 마존의 등장에도 크게 놀랍진 않았다.
“서량이 철검마존을 뵙습니다. 한데…….”
그가 위홍련을 힐끔거렸다.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는지요? 그것도 저 사고뭉치를 데리고 말이지요.”
위홍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철검마존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 사고뭉치 때문에 왔소. 삼공자에게 긴히 할 말도 있고.”
“엥?”
그때, 고루마존이 말했다.
“일단 술상으로 가십시다. 쓰린 속이나 달래야겠소.”
서량이 자신의 거처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담벼락, 여기저기 부서진 연무장.
그리고 저 멀리,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상린과 앵화까지.
“자미루는 좀 그렇고, 내성 구석에 조촐한 주점이 하나 있습니다. 음식이 꽤 맛나던데 거기로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