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비수에는 독을 묻혀야 제맛이다 (2)
“……은 물론 반역으로 인한 내란 유발까지, 결코 용서되기 힘든 대죄를 저지른바.”
고구가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형장 주변에 모인 마인들의 얼굴에 오만 감정이 깃들었다. 분노, 동정, 통쾌, 서글픔 등등 가지각색이었다.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랄 것이나, 그간 본교에 헌신해 온 점과 교주님의 제자였던 신분을 감안하여 참수형(斬首刑)으로 죄를 마무리 짓는다.”
우아아아!
마인들이 여기저기서 고함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기쁨의 외침을, 누군가는 분노의 함성을, 누군가는 슬픔의 탄식을 뱉었다.
고구가 힐끔 관평을 바라보았다.
텅 빈 관평의 눈동자는 죽은 생선 눈알과 비슷했다. 마른 몸과 푹 숙인 고개를 보면 이미 생을 포기한 것 같았다.
고구가 당원 한 명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관평 뒤에 선 칼잡이가 그의 무릎을 꿇렸다.
스르르릉.
천천히 뽑혀 나오는 보도(寶刀)는 육신과 죄악까지 함께 베어 파순의 곁으로 보내 준다는 송천참악도(送天斬惡刀)였다. 이 칼로 참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죄인의 명예를 지켜 주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덜컹!
관평의 목이 떨어졌다.
* * *
“허어, 일이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그러게 말일세. 통상 죄인의 처형은 수감 후 사십구 일 뒤에 진행되는 게 정상인데.”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닐세. 다른 죄도 아니고 반역이야. 그 자리에서 참하지 않은 게 어딘가?”
“자네 말도 맞네.”
“관평이라…… 반역을 저지르긴 했다만, 나름 뛰어난 인물이었거늘.”
“뛰어나긴! 그리 말하지 말게. 침착하고 조용하여 흔치 않은 인재인 줄 알았거늘, 속으로 그런 무도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그건 뛰어난 게 아니라 음험한 걸세.”
“허어.”
관평의 처형으로 인해 신교의 분위기가 또다시 어수선해졌다.
각 조직의 수장들은 조직원 관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튀는 언행을 자제시켰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영외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관리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흐아아암!”
연무장에 백석을 깔던 서량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쩝. 이거야 원, 앞으로는 여기서 싸우지 말아야지.”
고루마존의 장력과 기공, 서량의 진각과 도법으로 인해 연무장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부서진 잔해들만 치우면 그럭저럭 다시 쓸 만했지만, 문제는 그가 삼공자라는 것이다.
삼공자 정도 되는 위치면 품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결국 서량은 환희원에 인부를 요청하여 그들과 함께 연무장과 담벼락을 보수 중이었다.
“공자님. 물 좀 드세요.”
“어? 아, 고맙다.”
앵화가 건넨 물은 시원하기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어찌나 차가운지 이빨이 다 시리다.
“크으, 어디서 이렇게 시원한 물을?”
그러자 앵화 뒤에 선 여상린이 웃으면서 손을 까딱였다. 그녀의 손 위로 반투명한 백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속이 다 뒤집어질 것 같구나.”
“내가중수법에 직격을 당해도 팔팔하실 분이 별소리를 다 하시네요.”
“내가중수법에 당했는데 어떻게 팔팔하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 거기 조금 삐뚤어졌어요.”
“엇! 고마워.”
잘 다듬어진 백석을 똑바로 끼워 맞춘 서량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진짜 귀찮은 작업이네.”
여상린이 고개를 저었다.
“본인 집 꾸미는 건데 왜 귀찮아요?”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이니까 귀찮은 거야. 수련하다 보면 깨지고 금 가는 게 연무장 바닥인데 뭣 하러 이리 깔끔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그럴 거면 왜 연무장에서 수련하세요? 사람 안 다니는 숲으로 가시지.”
“숲은 너무 멀어.”
“밥은 왜 드세요? 어차피 배고파질 텐데?”
“안 먹으면 죽잖아.”
“청소는 왜 하세요?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알았어. 알았다고.”
어째 잔소리꾼이 늘어 버린 것 같다. 하긴 앵화와 마동필은 잔소리 따위 늘어놓지 않았지만.
“후우, 그래도 인부가 많으니 속도가 나는구만.”
어제 처형이 벌어진 직후 인부들을 불렀다. 고작 하루뿐이지만 인부 수만 무려 오십 명이다. 진행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서량이 여상린에게 말했다.
“일각 뒤에 인부장한테 식사하라고 전해 줘.”
“알겠…… 아니, 근데 그걸 왜 제가 말해요? 저 손님이라니까요?”
“뭐라도 도움이 되겠다며?”
왠지 치사한 말이다. 도움이 되겠다곤 했지만 이런 식의 도움을 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문을 나선 서량이 손을 흔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온다.”
“어디 가세요?”
“일해라.”
“저 손님이라니까요!”
여상린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려들은 서량이 거처를 나섰다.
“후우, 배고프군.”
배를 쓸던 그가 문득 좌측 요대를 내려다보았다. 요대엔 칠야도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최소한 한 자루는 차고 다니자.
거처를 나선 서량이 향한 곳은 형법당이었다.
형법당으로 가는 길, 수많은 마인들이 서량을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인사는 똑같지만, 그 안에 담긴 공경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서량이 차기 교주가 될 것이란 걸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서량은 일일이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런 서량의 태도에 마인들은 깊이 감동했다.
그렇게 이각이 지나, 그가 형법당으로 들어섰다.
“오셨소?”
“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서량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젠장, 힘들어 죽겠네.”
“뭐가 그렇게 힘드시오? 무공도 고강한 분이.”
“그냥 힘들어.”
서량은 있는 대로 투덜거렸다.
“그 두 놈 제끼고 당분간 몸 좀 돌보면서 차근차근 목표한 바 대로 살자, 싶었는데 그 소중한 휴식 시간을 엄한 놈들 때문에 못 누리게 됐잖아.”
“삼공자의 꿈이 무엇이오?”
“전에 말 안 했나? 의천맹 작살내는 거야.”
고구가 움찔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쪽에 미련이 남았나?”
“그럴 리가 있겠소. 오히려 진짜 싸움이 벌어지면, 그 싸움의 선봉으로 내가 참여하고 싶은 심정이오.”
그럴 만도 하다. 이만한 인재를 몰라보고 천마신교에 세작으로 보낸 천산파도 천산파지만, 제대로 지원조차 안 해 준 의천맹도 보통 답답한 집단이 아니다.
게다가 천산파는 당대 의천맹주 손에 멸문까지 당했다. 애증을 풀 대상조차 사라지게 만든 현 의천맹주를, 고구는 절대로 좋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한데 삼공자는 왜 의천맹을 건드리겠다는 거요?”
“본교의 적이잖아.”
“…….”
“그냥 싫어.”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서량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뜬금없긴 하지만, 이런 면은 묘하게 교주님과 비슷하군.”
“무엇이 말이오?”
“굳이 이유를 따지지 않는 것 말이야.”
고구가 흠칫했다.
“교주님도 그러시더군. 내가 의천맹을 그리도 증오한다 했는데,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지.”
“……그러셨소?”
“응.”
고구가 찻잔을 들고 오며 말했다.
“교주님의 말씀이 옳소. 누군가에게 증오를 품든 호감을 품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스스로 자꾸 이유를 만들어 내다 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오. 중요한 건 그 증오를 어느 선까지 풀 것이냐, 호감의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요.”
“그런가?”
“그렇소. 증오할 이유가 없다고, 호감 가질 이유가 없다고 되뇌어 봤자 감정은 해소되지 않으니까.”
서량의 표정이 묘해졌다.
고구가 서량을 힐끔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오?”
“아냐.”
고구가 찝찝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어째 자신을 보는 서량의 눈빛이 착한 일을 한 학동을 보고 흡족해하는 훈장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이곳까지 오신 이유는 무엇이오?”
“알면서 뭘 물어? 이제 슬슬 잡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 온 거지.”
이미 고구에게도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다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도.
잠시 생각에 잠긴 고구가 툭 던지듯 물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소.”
“뭔데?”
“정체를 숨긴 모종의 무리가 삼공자를 노린다? 이것은 분명 큰일이오. 반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심각한 사태지.”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그냥 날 노리니까 먼저 박살을 내 주겠다는 마음이지.”
“삼공자의 생각이 어떠하든 이건 분명 큰일이오.”
“그래서?”
“문제는 바로 삼공자에게 있소.”
“나?”
“그렇소.”
“무슨 문제?”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박살 내겠다. 그게 전부요?”
“그럼 뭘 더 바라?”
“그들이 왜 그런 원한을 갖게 되었는지, 왜 지금까지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는 알아보지 않을 생각이오?”
서량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당신 말마따나 이유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뭐가 어찌 되었든, 날 박살 내겠다며 발광하는 놈들이잖아?”
“나 역시 삼공자의 의견에 동감이오.”
“그렇지?”
“만약 삼공자가 교주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말이오.”
“응?”
고구의 눈이 번뜩였다.
“내 감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는 신분은 아니지만 잠시 참견꾼 노릇을 해 보자면, 더 이상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해선 안 될 것이오.”
“왜 그렇지?”
“삼공자가 후계자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삼공자는 말했소. 교주가 되면 의천맹을 치겠다고.”
“그렇지.”
“의천맹을 치겠다는 것은 곧 본교의 마인들을 전쟁에 끌어들이겠다는 말과 같소.”
“…….”
“그때도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할 생각이오? 너희의 숭고한 죽음을 발판 삼아 숙적인 의천맹을 없애 버리겠다, 내가 교주니 내 말에 따르라.”
“음.”
“혹은,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의천맹을 없애 버릴 것이니 명에 따르라. 이런 식으로 교를 이끌 생각이냔 거요.”
서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고구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삼공자의 목적이 교주가 되는 것이 아닌 의천맹의 멸망에만 맞춰져 있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교주의 말이 곧 법이자 신이 원하는 바니까. 하나 삼공자가 본교의 영화(榮華)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 나름의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오.”
누구도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다. 심지어 서량 스스로도 이 부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고, 나 역시 그게 옳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적어도 한 단체의 수장이라면, 같은 판단이라도 그 판단에 깃든 생각의 깊이가 달라야 한다 생각하오.”
“…….”
“이유인즉, 수장의 판단에 따라 자신을 위해 사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오.”
색다른 시각이다.
신교의 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그것은 아마도, 고구가 정통 마인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그 말이 서량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 마인이 아님에도 누구보다 정통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는 서량이지만, 그 역시 고구처럼 근본이 마인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품격 있는 수장이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덕목은 갖춘 수장이 되어라?”
“제대로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고마워할 필요 있나. 오히려 내가 고맙지. 한 번도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념할게. 그 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내가 신경을 쓰지 못했어.”
“…….”
“말해 줘서 고마워.”
고구의 눈빛이 일렁였다.
반발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량은 그러지 않았다.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들어 주었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왠지 씁쓸하기도 했고, 감탄도 나왔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인정할 것은 확실하게 인정한다. 남다른 과격함에 가려진 신중함과 솔직함이 놀라웠다.
고구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일을 시작합시다.”
“그래.”
“마존들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소?”
“그렇지.”
“본당의 당원들은 필요 없겠군.”
“인력이 부족해도 형법당원들이 움직여선 안 돼.”
“그렇겠지. 놈들이 더더욱 숨어들 테니까.”
“결국 관건은, 놈들 스스로 움직이도록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마각을 드러낼 것 같소만.”
“맞아. 하지만 언제 드러낼지는 알 수가 없어. 손가락 빨고 기다리다 잡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싸움의 흐름 역시 놈들에게 넘어갈 거다.”
“인정하오. 그렇다면 어떤 미끼를 던지겠다는 거요?”
서량이 검지를 들었다.
그러고는 고구를 가리켰다.
“……?”
“…….”
“날 미끼로?”
“어.”
고구가 눈을 끔뻑였다. 퍽 순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왜 여기 왔겠어?”
“……날 어떤 식으로 쓰겠다는 거요?”
뒤이어 나온 폭탄 발언에 고구는 순간 정검을 뽑아 들 뻔했다.
“당신이 진짜 대공자였다는 사실을 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