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비수에는 독을 묻혀야 제맛이다 (3)
후계 싸움의 열기가 식었다.
후계자들 중 가장 강한 진관용이 목숨을 잃었고, 관평 역시 참형에 처해졌다. 홍위문은 여전히 빈사 상태였으며 주서윤과 종리영, 채여민은 아직 여물지 못한 씨앗이다.
결국은 서량이다. 삼공자 서량이야말로 후계 싸움의 승리자이며, 후계자로 낙점될 이다. 무력, 지략, 심성 등등 여러 면에서 신교의 차기 주인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이다.
그렇게 짧고 격렬했던 후계자들 간의 다툼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관평이 처형된 다음 날, 폭탄 같은 소문이 교내를 휩쓸었다.
“형법당주 고구야말로 교주님께서 처음 받은 제자였으며, 진짜 대공자다.”
충격적인 소문이었다.
형법당주 고구는 교내 마인들에게 공포로 각인된 이름이었다. 그런 그가, 사실은 이천상이 처음 받은 제자였단다.
믿기 힘든 소문에 마인들은 당황했다. 소문의 출처가 명확하진 않았지만, 내용이 품고 있는 파급력이 너무 컸다.
모두가 동요하고, 모두가 불신하고, 모두가 불안에 젖은 그때.
서량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신교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입교했을 때부터 함께하진 못했지만, 언제나 그를 든든한 대형으로 생각해 왔다.”
의미심장한 그 한마디는 소문의 진실성을 확 끌어올렸다.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서량의 말이었기에 소문 못지않은 파급력이 있었다. 삼공자가 고구를 대형으로 생각한다면, 고구는 진짜로 이천상의 첫 제자가 맞는 것이다.
지극한 혼란의 연속.
모두의 시선이 군사부로 향했다. 감히 마신궁에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도, 보낼 필요도 없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군사부에서의 사실 확인이었다.
소문이 터진 다음 날.
군사부의 수장, 총군사 호요성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가 어떤 과정으로 형법당주가 되었는지는 교주님께서만 아실 터. 과거가 어찌 되었든 그는 더 이상 후계를 논할 위치가 아니니, 교인들은 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자가 하는 말이다.
몇 마디 말로 쉬이 잠잠해질 소문이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들끓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호요성은 전면에 쉬이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교주인 이천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권력자가 직접 나서서 저리 말한다는 것은, 고구의 과거지사로 신교가 다시 들썩이지 않을 거란 의미였다. 누구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로 됐다. 형법당주가 가진 뜻밖의 과거는 알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마인들은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잊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사실이 결코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특히나 음지(陰地)에서 모략을 꾸미는 이들에겐 고구의 과거가 큰 매력이 될 수도 있다.
그 음험한 모략가들이 비로소 발을 떼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고구였다.
* * *
한밤중.
호롱불 하나를 켜 놓고 집무를 보던 고구는,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출렁임을 느꼈다.
고구의 눈에 스산한 기색이 어렸다.
“누구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문서에 고정시켜 놨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가 창가로 돌아갔다가, 반대편 문가의 책장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어두운 집무실만큼이나 어두운 빛깔의 의복을 차려입은 것과 달리, 남자의 얼굴은 새하얬다. 시커먼 어둠 속, 잘린 목만 둥둥 떠올라 있는 듯한 모습이 날카로운 섬뜩함을 안겨 주었다.
“굉장한 감각이군.”
남자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진관용도 알아챘지만 한 박자 느렸지. 관평은 말을 걸기 전까진 알지도 못했어. 당신은 다르군. 내 은신술을 이리 빨리 간파당한 건 처음이야.”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냐고? 글쎄다. 날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고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낮처럼은 아니어도, 내가고수인 그의 눈엔 남자의 얼굴이 확연히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장난은 사양한다.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라.”
“밝힐 정체랄 것도 없다. 당신 눈에 보이는 그대로니까.”
우우웅.
자리에서 일어난 고구에게서 강력한 마기가 치솟았다.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던 고구.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당신은……?!”
“이제야 알아보는가?”
그 피부처럼 하얀 미소를 짓는 남자의 모습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그래, 송경이다.”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전(前) 진마대주(眞魔隊主) 송경이었다. 과거 사공자 홍위문의 수족 노릇을 했으며, 위홍련과 지독한 악연으로 엮였던 그자였다.
고구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감돌았다.
“당신, 수감된 지 두 달째 되던 날, 외성으로 좌천되지 않았던가?”
그렇다.
서량과 얽힌 송경은 뇌옥에 갇혔다가 외성 세곡단(洗穀團)으로 좌천되었다. 세곡단은 내성으로 들어가는 식자재를 최종적으로 분류하는 곳으로, 환희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명색이 전투 부대의 대장이었던 자가 환희원 산하의 세곡단으로 좌천되었다. 차라리 교외 지부로 발령 나는 것보다 훨씬 더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런 자가 초절정고수인 고구의 거처를 제집 드나들 듯 침투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젊어졌다?’
송경은 고구와 같은 연배였다.
한데 지금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나 다를 바 없는 생김새가 아닌가.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하얗게 변해, 눈치 빠른 고구도 당장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내 정체 따위가 아니야.”
송경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여유 같기도 했고, 세상에 무관심한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송경과는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출세를 위해 홍위문과 손을 잡았던 그때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능성이지.”
“가능성?”
“대권을 잡고 싶지 않나?”
뜬금없이 나타나서 대뜸 위험한 말을 뱉는다.
고구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말 그대로다. 당신, 과거 교주님의 제자였다고 하더군. 왜 형법당주가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당신 가슴 속에 드리워진 야망까지 사라지진 않았겠지?”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는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털어 내지 못한 야망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그의 심장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 야망이 아직 남았다면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떠한가? 명색이 교주님의 첫 제자였는데, 이대로 대권을 포기하긴 너무 아쉽지 않나?”
고저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고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 버리지 못한 야망이 한 번씩 심장을 옥죄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무언가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마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진관용과 관평을 꾄 놈은 역시 너였나?”
송경의 눈이 번뜩였다.
“거기까지 알고 있나? 놀랍군.”
순순히 인정한다. 그 솔직한 인정에는 끝 모를 자신감이 기반으로 깔려 있었다.
“하긴 형법당주라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
“비수는 뭐지?”
이번만큼은 송경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관평, 이 머저리가 죽기 전에 다 불었던 모양이군. 역시 녀석과 손을 잡은 건 실수였나?”
“질문에 답하라.”
“그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정체나 비수 따위가 아니야. 중요한 건 당신의 마음이다.”
고구의 눈이 깊어졌다.
“괴이한 언사로군. 네놈의 말을 듣자 하니, 내가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대권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확하게 보았다. 우리가 도와준다면 지금의 후보들을 몽땅 처치할 수 있어. 후계자를 선정하겠다는 교주님의 말씀은 허언이 아닐 터, 교주님께선 자연 당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라…….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군. 교주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야.”
“설령 그러지 않는다 해도, 한번 도전해 봄 직하지 않나? 최고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숨어서 모략이나 꾸미는 놈의 주둥이에서 나올 말은 아니로구나.”
송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늘게 드러난 눈동자에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장담컨대, 고구는 그와 같은 마기를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농밀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마기였음에도 은밀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팽창이 아닌 수렴이다. 애초에 마공은 은신술에 어울리지 않는바, 신비로운 마공을 익혀 은신술의 역량을 극대화한 모양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고구가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어떤 마공을 익혔는진 모르겠지만, 이 정도 위협과 유혹에 굴복할 만큼 어설프게 살아온 인생이 아니다.
“후회는 네놈이 해야지. 세곡단의 부장 따위가 형법당주의 집무실로 침투한 것, 말할 것도 없는 중죄다.”
스르륵.
송경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오른손 역시 얼굴처럼 하얗기만 했다.
“사람을 잘못 찾아왔군. 셋 중 가장 가능성이 큰 놈이라 분석했거늘, 내가 틀렸어.”
손을 들어 마기를 집약시킨다. 명백한 공격 의사지만 고구는 마기를 끌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또 한 번 말을 던질 뿐이다.
“셋이라 함은, 삼공자를 제외한 후보들을 말함이냐?”
“물론이다.”
“넌 우리라고 하였다. 지금 그곳으로도 네 동료들이 찾아갔나?”
“글쎄다. 거기까지 말해 줄 의리는…….”
그때, 송경의 귀로 한 줄기 목소리가 화살처럼 꽂혀 들었다.
“굳이 들어 볼 필요도 없어.”
파아아앙!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이미 송경의 몸은 창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고구가 반응조차 못 할 만큼 빠른 속도요, 은신술이었다. 허깨비가 따로 없었다.
공격보다는 도주를 택한 송경의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이 아무리 옳아도, 감당키 힘든 재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그는 고구에게로 오면 안 되었다.
콰득!
송경의 눈이 흔들렸다. 창가를 쥔 그의 손목이 탈골된 것이다.
쑤욱!
창밖,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미청년의 눈빛은 악귀처럼 살벌했다.
송경이 벼락처럼 몸을 뺐다.
콰드드득!
후퇴는 용납되지 않는다. 몸을 빼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든 서량이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큭!”
콧대가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졌다. 아찔한 통증에 일순간 몸이 굳어졌다.
파악!
어깨의 옷깃을 틀어잡는 손은 완강하기만 했다. 송경이 재차 몸을 빼려 했지만, 천으로 만든 흑백장삼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마기로 의복을 엄청난 강도로 경화시킨 것이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만.”
퍼억!
“크윽!”
송경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주먹으로 허벅지를 가격당했는데, 오른 다리 전체가 마비될 것 같았다.
회피 자체를 무력화시킨 일격이었다. 더 이상의 도주는 불가능하다.
송경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량의 눈이 커졌다. 소용돌이치는 공기가 송경의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자후라도 내지를 모양이었다.
파아아악!
“우웁!”
서량의 왼손이 그의 얼굴을 통째로 감아쥐었다. 송경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꾸드드득.
서량의 악력은 대단했다. 송경의 머리통을 단번에 박살 낼 기세였다.
송경을 한 손에 틀어쥔 그가 크게 팔을 들었다. 그에 따라 송경의 몸도 같이 들려 올라갔다.
후우웅.
고구가 마기를 발산해 집무실 전체를 감쌌다. 외부로 새어 나갈 충격파와 소리를 막기 위함이었다.
콰아앙!
송경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부르르르.
사지를 떠는 송경을 내려다보며, 서량이 씨익 웃었다.
“잡았다, 요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