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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23화 (223/774)

223화. 버릴 수 없는 과거, 쥘 수 없는 미래 (3)

“교주님! 큰일……!”

“알고 있네.”

정자에 서서 뒷짐을 진 채 고요한 연못을 바라보는 이천상은 여전히 나른해 보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호요성은 이천상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남들 앞에선 누구보다도 침착하지만 이천상 앞에선 그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호요성이 고개를 숙였다.

“보고 받으셨습니까?”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요성의 눈이 흔들렸다.

보고를 받았다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천상답다고 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사태의 무게가 달랐다.

뜬금없이 터진 이번 자폭 공격으로 이천상의 제자들이 모조리 죽을 뻔했다.

이것은 단순한 후계 싸움과는 결이 다른 문제였다. 제자들끼리 후계 다툼을 벌이는 거야 왕(王)이 되기 위한 범들의 싸움으로 볼 수 있지만, 이번 사태는 독니를 품은 늑대들의 공격을 받은 격이다.

절대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

“남은 잔당, 즉시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교주님?”

이천상이 손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옆으로.”

호요성이 조심스레 그리로 이동했다.

그제야 이천상이 고개를 돌렸다.

“고민 중일세.”

“이유를 여쭈어도…….”

“고민 중이야. 셋째를 즉시 후계자로 삼아야 할지, 아니면 파순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호요성이 깜짝 놀랐다.

“교주님?”

이천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연못 안을 이리저리 헤엄치는 잉어들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활기차다.

“후계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네.”

“…….”

“앞으로 시간을 더 끌어 봐야 셋째보다 괜찮은 놈이 나오진 않을 걸세. 그간 스스로를 확실히 증명해 왔으니, 셋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후계자감이지.”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되, 굳이 지금 꺼낼 필요가 없는 말이다. 적어도 호요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해 봤네. 애들을 방치했던 나의 방식에 대해서.”

“……?”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네. 설령 틀렸을지언정, 그에 후회하지도 않네. 애초에 내 멋대로 방목했으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지만 말일세.”

호요성의 눈이 흔들렸다.

이천상의 이런 모습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것이 옳았는가를 고민해 보는 것은 이천상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싶네.”

“교주님.”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간단하네.”

이천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이었다.

“더 이상 셋째를 이대로 놔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

“말했듯, 셋째는 나에게 스스로가 자격이 된다는 걸 이미 충분히 증명해 왔네. 발전 속도, 성취는 물론이거니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다소 파격적이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

“그러한 재목은 두 번 만나기 힘들지.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인 순간들을 몇 번이나 봐 왔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청출어람까진 바라지 않았어. 그 어떤 제자들도 나만큼은 할 수 없네. 하지만 셋째는 달라.”

“……교주님.”

“부족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잘 다듬어만 주면 능히 청출어람의 고사를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아이일세.”

호요성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께서 삼공자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높이 평가받을 만한 아이야. 언행에 다소 가벼운 면이 있어, 자신의 장점이 그만큼 크게 부각되지 않을 뿐이네.”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호요성도, 서량도,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보고 느끼는 것 같다.

“그간 녀석의 성장과 녀석의 일 처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네. 그 순간순간들은 삭막하기 짝이 없는 내 마음에 크나큰 울림을 주었지. 그래서 녀석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알았어도, 제동을 걸진 못했네.”

“……!”

“하지만 더는 안 되겠네. 이대로 녀석을 방치하는 것은 쓸데없는 괴롭힘 밖에 되지 않아.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좋겠지.”

드디어 이천상이 서량을 완전하게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총군사.”

“예, 교주님.”

번쩍!

다시 눈을 뜬 이천상의 마안(魔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글거리고 있었다.

“천마십군(天魔十軍)의 모든 지휘권을 자네에게 주겠네. 향후 셋째의 과거로 분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구족을 멸하겠다 공표하게.”

호요성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존명!”

* * *

“그랬군.”

“…….”

“사상자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무사하오. 하지만 오공녀, 육공자, 칠공녀의 거처에 머물던 하인들 몇몇과 호위무사들 대부분은 즉사를 면치 못했다 하오.”

“…….”

“놈이 말하던 폭음독비란 술수가 바로 그것이었던 모양이오.”

“…….”

“……그리고.”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고구.

이내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론이…… 좋지 않소.”

“…….”

“삼공자에 대한 악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퍼지고 있소. 삼공자의 과거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사정이 내성을 넘어 외성까지 번져 나갔소.”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다 죽진 않은 것이로군.”

“그런 것 같소. 소문이 퍼지는 속도로 보아, 분명 남은 이들이 술수를 쓴 것 같소.”

목비가 죽고 자미루가 무너졌다. 주서윤, 종리영, 채여민의 거처가 박살 나고 하인과 호위무사들이 죽었다.

서량에 대한 악소문이 퍼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서량을 파멸시키기 위해 모인 무리의 수장은 목비였으되, 그가 죽었다고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이 격발추가 되어 버렸다. 목비는 서량을 기다리면서 여기까지 계획을 짜 놓은 것이다.

“진관용의 수하들, 말하자면 목비와 뜻을 함께한 동지들이겠지. 그중 동필이의 검에도 죽지 않고, 형법당에 잡히지도 않은 놈들의 숫자가 셋이라고 했어.”

서량이 품에서 문서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과거가 담긴 정보 문서, 호요성이 준 복사본이었다.

화르륵.

문서가 상마진화의 불길로 재가 되었다.

“과거, 내가 괴롭힌 이들의 숫자만 오십이 넘어. 셋만 남았을 리가 없지. 송경처럼 뒤늦게 가담한 놈들도 있을 테니 최소한 열은 넘게 남았을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서량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구유마공의 절대방벽으로 일행 전체를 보호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눈 깜짝할 새에 사람을 융해시킬 만큼의 극독에 당했다.

극마에 이르지 않았다면, 구유마공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제아무리 그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피곤하군.’

큰 상처도 아니다. 혈혼각에서 치료도 잘 받았기에 나흘만 지나면 대부분의 내외상도 아물 것이다. 이보다 더 심하게 다쳤을 때도 이렇게 피곤하진 않았다.

정신이 지친 것이다.

외면하려면 충분히 외면할 수 있지만, 서량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에 없는, 없을 수밖에 없는 행위였기에 정신적 피로감이 극심했다.

눈을 감고 있는 서량을 보며 고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교주가 되고 싶소?”

“…….”

“만약 그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마음 강하게 먹길 바라오. 마인들의 시선이 이전과 달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것이오.”

“상관없어.”

“…….”

“그 부분에 큰 신경을 쓰진 않아. 게다가 애초에 목비가 바랐던 것은 여론으로 날 몰아붙이는 게 아니야.”

마인도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동의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천마신교 역시 무림 방파가 아닌가, 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전 세대보다 훨씬 물러졌다곤 해도 천마신교는 천마신교다. 마인도 타인의 악덕에 분노할 줄 알지만, 그 사람이 신교의 수장이 될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신교의 수장은 곧 파순의 점지를 받은 사람.

그렇다면, 수장이 된 순간 그 사람의 과거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를 봤다 하더라도, 운명이 그러하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천마신교고, 마도 무림 총본산에 속한 마인들의 시선이다. 관평이나 홍위문이 그리 거칠게 날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위기다.

과거에 피 냄새 물씬 풍기는 악행을 저질렀다 한들, 미래를 밝게 개척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악업은 상쇄된다.

천마신교는, 마도 무림은 바로 그러한 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인 것이다.

“여론으로 몰아붙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

“하면 왜 이런 짓을 꾸미는 것이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상, 여론의 힘으론 날 흔들지 못해. 하지만 나와 함께 신교라는 괴물을 움직여 나갈 수뇌부들은 달라.”

“……!”

“그들은 마인임과 동시에 맹수다. 평교도들보다 훨씬 깨어 있다고 봐도 되겠지.”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그 조금의 다름이 나중에 큰 파탄을 만들어 낸다. 내가 교주가 된다 해도, 언제고 과거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이 한 명은 나올 수 있다는 거다. 그런 불안감을 품고 살아가라 저주한 거야, 그놈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그건 모른다. 다만 결과가 그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뿐이야. 내가 확신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진짜 이유라니? 그건 또 무엇이오?”

“존재의 증명.”

고구가 탄성을 질렀다.

“녀석들은 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인이었다. 그래서 싫었던 거야. 기억되지 못한다는 게. 그들 자신의, 가족의 죽음이 사서(史書)에도 실리지 못하는 개죽음이 되는 것이 싫었던 거다.”

“…….”

“나를 죽이려 했던 이유, 그 행위의 당위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거야.”

“그런…….”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고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서량은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는 괴수가 되었다. 실력과 위치는 물론, 교주의 총애까지 받는 차기 마신이 바로 그였다.

그런 서량을 끌어내린다?

불가능하다. 그런 방법은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차라리 직접 죽일 수 있다면 모를까, 남의 손을 빌려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 복수하고 싶지만, 복수를 해 봤자 별다른 타격도 안 갈 대상.

그렇다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다.

바로 기억되는 것이다.

“사실 자잘한 이유를 제치고서라도,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왜냐면…….”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가족을 죽인 원수가 살아 있으니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다.

그들은 복수 이외에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부나방이 될 수밖에. 자신들 역시 죽을 걸 알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고구의 눈이 깊어졌다.

“새삼 느끼는데, 삼공자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소.”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소?”

서량이 고구를 바라보았다.

고구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난 삼공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오. 사실 아직도 껄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없소. 형법당주인 나로서 삼공자는 가만히 놔두기도 뭣하고 건드리기도 뭣한, 아주 골치 아픈 사람이외다.”

“그렇겠지.”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소.”

“뭘.”

“당신이 앞으로, 과거의 잘못을 다시 저지르진 않는다는 것을.”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고구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고구의 말을 듣자, 복잡했던 마음 한편이 무척이나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 그런 썩은 얼굴은 그만하고 탕약이나 드시오.”

“……삼공자한테 말버릇도 없지.”

“한두 번이 아니었잖소?”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창가 저편에서 마차 굴러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엥? 저거 마신궁 마차 아냐?”

“그렇구려.”

서량이 다시 눈을 감았다.

“제길, 이럴 때 교주님 보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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