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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24화 (224/774)

224화. 버릴 수 없는 과거, 쥘 수 없는 미래 (4)

“한 잔 받겠느냐?”

“몸에서 독기가 아직 널을 뛰고 있는데요.”

“안 마시겠다?”

“……뭐, 그래도 한 잔 받겠습니다.”

이천상이 서량의 잔을 채워 주었다.

향긋한 주향이 인상적이다. 서량이 좋아하는 육천심주였다.

서량이 이천상을 힐끔거렸다.

“이거 이렇게 막 마셔도 되는 겁니까?”

“내가 담근 술이다. 마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요. 저 만날 때마다 따면 금방 동나겠는데요.”

“이백삼십 동이.”

“예?”

잔을 비운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이백삼십 동이나 남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 또 담글 생각이다.”

“…….”

“부족할 리가 없지.”

“저 몇 동이 주세요.”

“갈 때 가져가거라.”

너무 쉽게 허가해 주는 거 아닌가.

한숨을 푹 쉰 서량이 술을 들이켰다. 심란해서 그런지 향긋하기만 하던 육천심주가 오늘따라 유독 쓴 것 같았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술을 한 잔 들이켠 후에도 두 사람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잔을 채워 주고 마시길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이각의 시간이 지났다.

“교주님. 총군사입니다.”

“들어오시게.”

쿠궁!

문이 열리고 호요성이 들어왔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아무리 교주전의 후원이라도 문짝 한번 크게 만들었구나 싶다. 문이 열릴 때마다 저런 굉음이 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정자 앞까지 다가온 호요성이 무릎을 꿇었다.

“신교불패, 천마불사. 총군사 호요성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전에 명하셨던 일, 전부 처리하였습니다.”

“그런가.”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네. 일간 부를 터이니, 돌아가 쉬시게.”

“예.”

일어난 호요성이 힐끔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은 호요성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

호요성이 히죽 웃었다.

“한마디만 하고 가도 되겠습니까, 교주님?”

“그러시게.”

“삼공자 병신.”

서량이 호요성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호요성은 헐레벌떡 문으로 뛰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그 모습에서 다급함까지 묻어 나왔다.

쿠궁!

문이 닫히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서량이 황당하다는 듯 잉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뭐야, 저 양반.”

농담인 것 같은데, 왜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지?

“받아라.”

“예? 아, 예.”

술을 받는 서량에게 이천상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다 잡아들였다.”

“예?”

“네가 골머리를 앓게 한 놈들 말이다.”

“……?!”

“천마군을 동원했다. 이전 반역 사태 때와는 달리 조용하게 움직였지. 총 열두 명이라더군. 순순히 포박당했다고 한다.”

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뒤처리를 해 주신 겁니까?”

“정확히는 본교를 위해서다. 반역 사태가 터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불순분자들이 날뛰어서는 곤란하지.”

“불순분자라…….”

맞는 말이다. 적어도 이천상에겐.

하지만 자신에게는 마냥 불순분자라 할 순 없다.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다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

“왜…….”

서량은 뒷말을 삼켰다.

잔을 비운 이천상이 말했다.

“왜 미리 해결해 주지 않았냐고?”

“……됐습니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네 일이고, 네가 처신을 잘했어야 할 일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이지 옳은 말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천상의 대답은 서량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래. 그게 내 실수였다.”

실수.

이천상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복잡한 심경이 싹 날아가 버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제자를 보며,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되었다. 본교를 위해서라도 그랬으면 안 되었다.”

“…….”

“나는 그간 네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던 모습들을 무척이나 인상 깊게 지켜봐 왔다. 이번에도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줄 알았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 그리고 그것이 내 실수였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이유를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넌 충분히 날카로운 칼이다. 날이 잘 선 칼은 칼집에 넣어 둬야지, 혹시 몰라서 또다시 숫돌로 가는 행위는 어리석은 것이다. 시간 낭비는 물론 자칫 칼을 마모시킬 수도 있지.”

“…….”

“그래서 내가 실수했다는 것이다.”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교주님께서는 전혀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건 제가 처리했어야 할 일이 맞으니까요. 아니, 애초에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지.”

“…….”

“나는 교주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네가 너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잘못이 있으면 되돌아보고, 고찰해야 하며, 앞으로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을, 이천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왜일까?

“이유인즉,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가 너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내가 숱하게 봐 온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너는 과거를 돌아보고 잘못을 되짚는 데엔 별 재주가 없어.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데에 특화가 된 녀석이다.”

“…….”

“이미 그들에게 충분히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거기에 빠져 네 인생을 망쳐 버리는 것 또한 옳다고 볼 수 없어. 애초에 넌 그런 놈도 아니다. 한데 왜 그리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

서량의 눈이 충혈되었다.

“저는 과거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때의 난, 내가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저지른 일이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생각이냐? 네 죽음으로 그 책임을 질 생각이냐?”

“…….”

“넌 결코 그들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다. 자살 같은 걸 할 놈이 아니니까. 더불어 평생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넌 그런 놈이 아니니까.”

“…….”

“죽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을 네가 지금은 이리 고심하고 있구나. 혹, 이승에 없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괴로운 척이라도 하고 싶었더냐?”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다.

이천상의 말은, 결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의 말은 지독하게 현실적이었고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날카로웠다.

“너는 그들을 애도하고 동정하지만, 스스로 가해자라 생각하진 않고 있다. 네 기억에 없는 일이니까. 내 말이 틀렸느냐?”

“…….”

“진정 그들에게 한 줄기 위안이라도 주고 싶으냐?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라. 너의 장렬한 죽음을 본교에 알려, 너를 욕한 마인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어 주마.”

서량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서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천상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같잖은 동정심, 진심이 담기지도 않은 허상의 혼란 따위 집어치워라. 오히려 그것이 진정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그걸 교주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진정 신(神)이라도 되시는 겁니까?”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이천상은 담담하게 답해 주었고, 그의 대답을 들은 서량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경험해 봤으니까.”

그렇다.

과거, 마검가의 장남을 잡기 위해 날뛰었을 때.

억울하게 죽은 마인을 위해 왜 나서 주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이천상은 이렇게 답했다.

- 억울하게 죽은 그 마인은 죽는 순간까지 나를 위해 기도했다. 그가 과연 무언가를 바라고 내게 기도했을 것 같으냐?

- 그는 그저 나를 위했을 뿐이다. 인생을 바쳐 믿고 따랐던 한 신(神)의 안녕을 바란 게 전부지. 거기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

- 대가를 기대하는 충성과 신심(信心)은 부정하다.

그때의 이천상과 지금의 서량은 다르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다.

억울하게 죽은 마인은 이천상을 위해 기도했다. 진정 그 마인이 자신을 위해 나서 주지 않은 이천상을 증오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천상은 나서지 않았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웠고,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과 신심을 안고 죽는 것이 진정 그 마인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서량은?

“너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직접 말을 들었다? 아니지. 그것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만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이미 죽어 버린 그들을 위해 죽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너의 기준에 있어서 자살하는 것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한 일인가?”

“…….”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 사죄했다. 그러나 넌 행위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수도, 죄책감을 느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기준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기준에 맞춰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부정하다.

그것은 곧 스스로 주체가 없는 인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많은 이들이 저의 선택이 옳지 못하다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네게 너만의 기준이 없다면, 그로 인해 더 괴로워지겠지.”

“저는 교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질러도 법으로 처벌받지 아니합니다.”

“너의 위치가 그러하다.”

“그럼 저는 제 입맛대로 신교를 망가트려도 상관없는 것입니까?”

“그 또한 너의 선택이지. 물론 교주가 되기 전이라면, 너의 그러한 행동을 내가 막겠지만 말이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저 자신이로군요.”

“당연하다. 모든 것은 너의 기준에서 네가 선택한 이후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닌가다.”

“감당…….”

“과거지사로 인해 넌 목숨을 잃을 뻔했다. 무림을 살아감에 있어 은원은 일상다반사로 생긴다. 결국 복수를 하는 사람도, 복수를 감당하는 사람도 각자의 선택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천상이 서량의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묻겠다. 너는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괴로워해 줄 자신이 있느냐?”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였지만, 눈빛은 상당히 또렷해져 있었다.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목숨을 버릴 자신은?”

“그것도 없습니다.”

“하면 넌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이냐?”

물끄러미 이천상을 보던 서량이 잔을 비우고 말했다.

“차차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준이 없다면 다시 세우면 그만이지. 그거면 되었다.”

잔을 들어 마시기 전, 이천상이 중얼거렸다.

“이미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을 줄 알았거늘, 묘한 부분에서 어리구나.”

서량은 결코 어리지 않다. 실제 그의 나이는 육십을 헤아리니까.

하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누구라도 처음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지만, 서량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크나큰 문제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므로.

“오늘은 어쩐지, 말씀이 무척 많으십니다.”

“바보 같은 제자 놈의 꼴같잖은 낯짝이 무척 보기가 싫었다. 쫓아내긴 뭐하니, 머리통을 두들겨서라도 깨닫게 해 주는 수밖에.”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한 잔 따르라.”

“예이.”

이전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이천상이 다시 잔을 비워 내고, 서량이 다시 술병을 들었을 때.

“오늘 술은 이쯤 해서 그만하도록 하겠다.”

“웬일로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상이 정자를 내려갔다.

“따라와라.”

“어디 가시게요?”

“널 후계자로 정할지 말지, 마지막 시험을 해 봐야겠다.”

“……시험이요?”

“비무.”

“……!!”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앞으로 비무는 없다. 시험에 통과하면, 그땐 교주 대 후계자로서 직접 가르침을 내리겠다.”

정자에서 내려온 이천상이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썩어빠진 정신력에서 감점이 들어갔다. 네놈의 칼이 얼마나 날카로워졌는지 증명하지 못한다면, 넌 결코 후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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