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버릴 수 없는 과거, 쥘 수 없는 미래 (5)
쿠궁!
고구의 눈이 번뜩였다.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강력한 진동. 고구 정도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마기의 충돌이 무시무시한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왜 그러십니까?”
“…….”
“혹, 교주님께서 삼공자와 대판 싸우기라도 하시는 겁니까?”
이 사람은 보지 않고도 다 아는군.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오.”
“대단합니다. 마신궁 주변에 둘러쳐진 진법이 충격파를 상당 부분 해소해 준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교주님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분이시오. 그분을 상대하는 삼공자 역시 극마에 오른 고수이니, 이 정도 충격파는 당연하겠지.”
“역시 잘 아시는군요.”
“…….”
“아, 죄송합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알고 있소.”
가만히 다탁을 내려다보던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음, 역시 오늘은 안 되겠군요.”
“무슨 말이오?”
“오늘은 일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마시렵니다.”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겠단다. 업무 태만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지만, 그 대상이 호요성이라면 누구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요새도 많이 바쁘시오?”
진저리가 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떠는 모습이 압권이다.
“말도 마십시오. 원래 총군사란 자리가 바쁠 수밖에 없다지만, 특히 요 근래엔 오만 일이 다 터지지 않았습니까. 이거 수습하랴, 저거 수습하랴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그렇군.”
최근 교내에서 터진 일의 대부분이 서량 때문이다. 정확히는 후계 싸움 때문이지만, 그 불꽃 같은 싸움에 기름을 부어 가며 싸운 건 서량이었다.
호요성으로선 그야말로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은 사람이 서량인 것이다.
“당주님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좋소.”
“어?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이오?”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거든요. ‘업무 중에 술을 마시는 취미는 없소. 마시려거든 총군사나 드시오.’ 이렇게요.”
과장되게 고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모습이 익살맞다.
웃음이 절로 나올 장난이지만 고구는 웃지 않았다. 호요성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좀 방정맞긴 합니다.”
“알고 있소.”
“…….”
“…….”
“오량액? 검남춘? 무엇으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주시오.”
“좋습니다!”
희희낙락한 얼굴로 큼직한 술병을 들고 온 호요성이 병을 흔들었다.
“어, 좀 줄었네? 다시 구해야겠구만.”
꼬락서니를 보니 평소에도 업무 중에 한 잔씩 마시는 모양이었다. 업무 태만이라고 쏘아붙일까 고민하던 고구는, 잔에서 피어오르는 주향에 고민을 접었다.
“자, 한잔하십시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두 사람.
호요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반면 고구의 얼굴은 멀쩡했다.
“크, 역시 피곤할 때 마시면 훅 올라오는군요. 아주 좋아요. 후딱 취하고 하루 온종일 잠이나 자야겠습니다.”
“잘 묵힌 술이군.”
“아무렴요. 교주님께 졸라서 얻어 온 술이거든요. 저 이거, 아무한테나 안 줍니다.”
“고맙소.”
“캬핫! 감사 인사받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이 돌았다.
“어땠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그들, 정확히는 송경이 접근했을 때 그의 말에 혹하셨습니까?”
대뜸 위험한 질문이 날아온다.
하지만 분위기가 부드러워서일까? 그 질문이 그리 위험하게 들리지도, 공격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고구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했소.”
호요성의 눈이 빛났다.
“굉장하군요. 그걸 인정하시는 겁니까?”
“질문에 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이건 또 의외의 대답이다. 그동안 봐 왔던 고구라면 아예 대답을 안 했거나, 알 바 아니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삼공자와 많이 부딪쳐서 그런 걸까? 이 사람도 많이 바뀌었군.’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솔직하게 답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러는 총군사는 어떻소?”
“예? 저요?”
“이런 술자리까지 만들면서, 혹시 모를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나를 평가하고 있잖소?”
“…….”
“괜찮아 보이시오?”
고구를 보는 호요성의 눈빛이 조금 진지해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소.”
“하하, 이거 민망하군요. 당주께서도 솔직히 대답해 주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말해야겠지요?”
“그러시오.”
“당주와 술 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당주의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서 마시자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호요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보입니다. 여전히 마음에 야망을 품고 있지만, 그 야망은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겠고요.”
“…….”
“삼공자에게 감복한 모양입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이 낱낱이 밝혀지는 상황이 기꺼울 리는 없다.
고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말없이 잔을 비운 고구가 입을 열었다.
“삼공자는 대단한 사람이오.”
“말해 뭐 하겠습니까.”
“교주 자리에 큰 미련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대단하오. 나라면, 제아무리 큰 꿈이 있다 해도 그리 미련 없이 털어 내진 못할 거요.”
“……오호? 교주 자리에 미련이 없다?”
“모르고 있었소?”
“당연하지요. 앉아서 천 리를 보네, 살아 움직이는 계책을 내는 천재 군사네 말들이 많지만, 저 역시 사람입니다. 직접 대화를 나눠 보지 않고는 몰라요.”
은근슬쩍 자기 자랑도 겸하는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호요성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삼공자가 그랬습니까? 교주 자리에 큰 관심이 없다고?”
“모르고 있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얘기하지 않겠소.”
“에이, 보지 않는 곳에선 황제 욕을 해도 무죄라는데요, 뭐. 술안주 삼아 얘기나 해 봅시다. 정말 그랬습니까?”
“한 잔 따라 주시오.”
“얘기 안 해 주면 안 따라 드립니다.”
탁.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거 잔은 왜 내려놓으십니까, 무섭게.”
“…….”
“쳇, 재미없으시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잔을 채워 주던 호요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관평은 어디로?”
“형법당 지하 특실에 있소.”
처형식 날 죽은 사람은 관평이 아니라, 관평의 모습으로 꾸민 진관용의 수하였다. 관평의 수하이기도 했으며, 목비와 일을 함께한 일행이기도 했다.
“형법당 지하 특실이라…… 소문은 들었습니다. 굉장히 넓다고.”
“개인 연공실, 식당, 수면실까지 있소. 폐관 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지. 역대 당주들의 수련처이기도 했소.”
“그곳에서 무공을 연마 중입니까?”
“연마라…… 어떻게 보면 연마라고 볼 수 있겠지. 그는 지금 자신의 무공을 버리고 있소.”
“엥?”
“삼공자가 그러더군. 그 무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을 좀먹을 것이라고. 지금이라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빠를 거라고.”
“그렇군요.”
호요성이 입맛을 다셨다.
“극마에 오르게 해 준다더니, 일단은 무공부터 쫙 빼 버리는군.”
“음?”
“아, 모르셨습니까? 삼공자가 관평과 거래를 했는데, 관평의 요구 사항이 극마에 오를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것이었답니다.”
고구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우스워서 그러오.”
“무엇이요?”
“나 역시 삼공자에게 극마에 오를 때까지 대련을 해 달라 요청했소.”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삼공자한테 극마에 오를 수 있는 쉬운 비법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그리 쉽게 남발할 약속이 아닌데.”
“남발한 건 아니겠지. 나는 될 때까지 도전해 보겠다는 것이니까.”
“뭐, 그게 그거죠.”
호요성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으니 세상 나른해 보였다.
“어찌 되었든 이로써 삼공자의 앞길을 막을 자들은 몽땅 사라져 버렸군요.”
“그럴 거요.”
“마인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겠지만, 그거야 뭐 알아서 잘 해결해 갈 것이고.”
천장을 올려다본 호요성의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었다.
“차기 교주 서량이라…… 언제 교주직을 이양받을지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거요. 능력은 충분하니까.”
“언제고 정권 교체의 순간을 반드시 맞이하게 될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시간이 이리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그렇소.”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미소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 역시.”
찡!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칠 때였다.
쿠구궁!!
이전보다 더 강한 울림이 군사부까지 전달되었다.
어찌나 강렬한지 이번엔 호요성까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충격의 강도로 보아, 군사부만이 아니라 환희원, 신장부까지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더 강해졌군요.”
잠시 생각에 잠긴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이 아니오.”
“음? 그럼 어딥니까?”
“판마정이오.”
“……!”
“교주님의 무공은 극강(極强)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소. 그분께서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오르셨는지 나로선 추측조차 할 수 없지만, 그분의 성향은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오.”
“성향?”
“어설프게 할 거면 아예 무공을 꺼내지도 않으실 분 아니오?”
“그건 그렇습니다.”
“충격의 기질을 보면 작정하고 부딪치는 것 같소. 살기가 담기지 않았으니 일종의 비무 형식인 듯한데, 그렇다 해도 교주님의 무공이라면 삼수(三手) 만에 마신궁이 증발할 수도 있소.”
“……엄청나시군요.”
“판마정밖에 없소. 판마정이 아니라면 교주님의 무공을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없소. 그리고…….”
고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교주님의 무공에 삼공자가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모양이오.”
* * *
콰앙!
“컥!”
답답한 신음과 함께 서량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장타(掌打)를 상쇄시킨 주먹이 부러질 듯 아파 왔다.
이건 무공의 수준을 논할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내공의 차이니, 무학의 강약이니 정도가 아니라 그냥 힘으로 밀려 버린 것에 가까웠다.
‘엄청난 외공(外功)!’
신체의 단련도가 차원을 달리한다. 칠 척에 가까운 키와 태산 같은 골격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호수를 담으려면 호수만 한 그릇이 있어야 하고, 바다를 담으려면 바다만 한 그릇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릇의 내구도 역시 크기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게 바로 이천상의 몸이었다. 고금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는 최강의 무공을 담아 낼 수 있는, 그러한 무공을 구사해도 몸에 이상이 없을 정도로 단련된 육체는 그 자체로 신병이기나 다름이 없었다.
파아아악!
한참이나 물러난 서량이 몸을 휘돌려 충격을 흘려 내고는, 다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천상의 마안이 번뜩였다.
예상을 넘어서는 속도였다. 상당한 내외상을 입었음에도 본래 역량 이상의 무공을 구현해 낸다. 그만큼 필사적이란 뜻이었다.
‘목숨을 걸었군.’
이천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빤히 보고 있음에도 서량은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스르륵.
이천상의 몸이 옆으로 이동했다.
터어어엉!
서량이 곧바로 이천상이 이동한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두 발로는 방향을 전환할 수 없다. 자세를 낮춰 양팔까지 동원해 땅을 박차 방향을 전환했다. 동물적인 움직임, 극에 이른 탄력이었다.
서량의 양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파팡!
천마벽력권의 모든 초식을 일수유에 일곱 번이나 내질렀다. 극마의 고수라도 목숨이 위험할 폭발적인 연환기(連環技)였다.
터터터텅!
그 살인적인 권법을, 이천상은 한 손으로 모조리 쳐 냈다. 권법보다도 느린 속도로 어떻게 그 많은 타격을 무마시켰는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퍼어억!
서량의 몸이 땅을 구르며 튕겨 나갔다. 어깨를 부드럽게 민 게 전부인데 극심한 충격이 뼛속까지 깃들었다.
“큭!”
바위 하나를 깨부수고서야 멈춘 서량의 몸.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제법…….”
파아아아앙!
말을 다 듣지도 않는다.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달려드는 서량의 모습에 이천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군.’
시작은 좋다. 예상 이상의 강함도, 공격을 위해 품위까지 벗어던진 그 집중력도 좋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어디 놀아 볼까.”
쿠구구궁!!
이천상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