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버릴 수 없는 과거, 쥘 수 없는 미래 (7)
쿠구구궁!
마신궁이 또 한 차례 뒤흔들렸다.
“으음.”
무담의 얼굴에 한 줄기 걱정의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얼마나 격정적인 비무이기에.’
그는 마신궁에 입궁하려 했지만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허가를 내지 않은 이는 천마대군장(天魔大軍長)이었다. 열 개의 부대로 나뉜 천마군 중 일 군(一軍)을 맡고 있으며, 모든 군장들의 대장인 자가 그였다.
아무리 대군장이라도 대호법의 입궁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는 마신궁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지키는 대상은 오로지 천마(天魔)였다.
그래서 그는 무담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천상에게서 직접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천마대군장은 무담보다도 더 이천상에 가까운 유일무이한 호위 대장이었다.
“굉장하군.”
무담이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또 한 명의 절대고수가 나타났다. 평범한 체격의 노인이지만 숨기고 있는 힘은 무시무시하다. 원로원의 혈수마존(血手魔尊)이었다.
“고루의 말을 들어 보면 그 경지가 마존급은 아니라 하였거늘, 교주님의 마력을 정면으로 상대한단 말인가.”
혈수마존의 얼굴에 은근한 감탄이 어렸다.
“타고났군.”
마공은 먹이 사슬 관계가 철저하다. 상위의 마기를 뿜어내는 자 앞에서, 하위의 마기를 지닌 자는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그 마기의 압박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신력과 자신감, 그리고 자신의 마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구대마존들 역시 이천상과 비무를 해 본 적이 있지만, 이천상의 무시무시한 마기 앞에서 칼 한 번 제대로 뽑아 보지 못했다.
한데 보아하니 삼공자는 다른 모양이었다. 이천상이 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존보다 약한 경지로 이천상과 정면 승부가 가능할 정도면 그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고루만이 아니라 철검 역시 극찬을 마다하지 않더니 이유가 있었어.”
“오셨소?”
혈수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그간 격조했소이다.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니오.”
“근래 호법원의 성장세가 무척이나 돋보인다고 하더이다. 축하드리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허허, 여전하시구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미묘하게 딱딱했다. 아주 불편하진 않지만, 그렇게까지 친분이 깊어 보이지도 않는다. 사무적으로 얽힌 관계란 묘사가 딱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대호법께서는 삼공자와 독대한 적이 있으시오?”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 몇 번을 빼곤 없소.”
“나는 그조차도 없소. 흥미가 없었거든.”
혈수마존의 눈이 깊어졌다.
“그 없던 흥미가, 이제는 좀 생겨나는 것 같소이다.”
“교주님의 제자분들은 차기 신이 될 가능성을 지닌 존귀한 분들이오. 흥미가 동한다고 가벼이 만날 신분이 아니오.”
혈수마존이 손을 저었다.
“딱히 삼공자를 깔보던 것은 아니었소. 불편하게 들렸다면 내 사과하리다.”
무담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여전하군.’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저 딱딱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신교 법도의 화신(化神)이라는 대호법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 깐깐함은 보여 줘야 한다는 걸. 대호법이란 직책이 그만큼 까다롭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엇을 말이오?”
“삼공자는 현재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오. 내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아마 삼공자가 차기 교주직에 내정될 확률이 높소.”
“…….”
“마음이 다소 싱숭생숭하지 않으시오?”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은 교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새로운 주인을 모셔야 하는데, 생각보다 담담해 보이는구려.”
“달라지는 것은 없소. 교주님께서 인정하신 후계라면, 내게 두 분은 똑같이 존귀한 분이오.”
“음.”
혈수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쉬고 싶지 않으시오?”
무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본교에 헌신해 왔으니, 이제는 내려놓고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냔 말이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씀인지 모르겠소.”
“다른 의미는 없소. 그저 우리 나이쯤 되면, 권력이라는 것도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소.”
“나는…….”
“아, 오해하지 마시오. 대호법이 권력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혈수마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책임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오. 하나 살다 보니, 채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비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소.”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후인은 구해 놓았소만, 아직 준비가 되진 않은 것 같소.”
“그렇소?”
“그렇소.”
혈수마존은 더 이상 무담을 자극하지 않았다. 이 딱딱한 사람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리가 더 멀어진 것 같아서 머쓱했다.
그때였다.
퍼엉!
마신궁 안에서 거센 폭음과 함께 시커먼 번갯불이 튀어 올랐다.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것은…….”
“만압금마장(卍壓禁魔掌)이오.”
금마.
마(魔)를 금(禁)하는 장법이다. 군림마황기를 대성한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정의 무학으로, 그 파괴력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지배자의 권능을 형상화한 무공이다.
이천상이 만압금마장까지 꺼내 들었다는 것은, 삼공자의 무학이 그만큼이나 위협적이라는 뜻.
혈수마존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감돌았다.
“대체…… 삼공자는 얼마나 강하다는 것인가.”
* * *
상황은 혈수마존의 짐작과는 달랐다.
이천상이 금마신장까지 꺼내 든 것은 서량의 무학이 그에게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쿨럭!”
서량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도 창백했다.
치이이이익!
그의 몸에서 희미한 녹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해소되지 못하고 남아 있던 독기가 체외로 방출되고 있는 것이다.
나름 고무적인 일이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대로 독기를 배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내상을 유발하는 이천상의 마기가 제멋대로 혈맥을 헤집고 다니며 독기까지 날려 버린 것이다.
사람을 한순간에 융해시키는 독기가 인간이 뿜어내는 마기를 버티지 못하고 방출되고 있다는 것. 이천상의 군림마황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서량의 몸 주변으로 번갯불이 튀었다.
번개는 곧 빛이다. 빛은 검은색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서량을 잠식한 번갯불은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순리가 아닌 역천(逆天)이다. 역천을 상징하는 진짜 무공이 서량을 옭아매고 있었다.
“난 너에게 무(武)의 증명을 바랐다.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성장한 실력으로 내게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지를 기대했다.”
“끄으윽.”
“솔직하게 말하마.”
부르르르.
이천상이 뻗은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량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허무와 권태로 가득했던 내 인생에, 너처럼 놀라움을 안겨 주었던 승부사는 달리 없었다.”
절대마신의 입에서 나온 찬사였다. 이 정도면 극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넌 충분히 너 자신을 증명했다. 마존급에 도달치 못한 무공으로도 내게 이 정도의 피해를 주었어. 무공보다도 그 독존(獨尊)의 오만함이 기껍다.”
파지직! 파지지지직!
서량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군림마황기가 전신을 장악했다. 상중하, 세 단전에 갇혀 버린 구유마공이 끊임없이 뻗어 나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저지를 당했다.
저항은 할 수 있어도 상황을 역전시킬 순 없다. 작정하고 힘을 발산한 이천상의 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해일과 같았다.
“넌 새로운 세대의 신(神)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지이잉! 지이이이잉!
일그러지는 경관의 범위가 점점 늘어났다. 이천상이 판마정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마기를 쏟아붓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은 널 시험하지도, 네게 시련을 안겨 주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면 선물을 안겨 주어야 마땅할 터.”
이천상의 마안이 번뜩였다.
“나이 어린 후계자라고 마존보다 약해선 안 되지.”
그가 마공의 출력을 올렸다.
펑! 퍼퍼펑! 콰르릉!
판마정이 무너져 내린다.
진법의 축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판마정을 이루고 있는 환상들 대부분이 터지고 찢겨 나가고 있었다.
서량의 눈동자가 위로 돌아갔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눈이 새하얗게 변했다. 명멸하는 번개처럼 정신이 날아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피부가 하얗게 질렸다가 시커멓게 물들길 반복했다.
치이이이익!
뜨겁게 달아오르는 쇠사슬.
연기를 뿜어내며 투명한 붉은빛으로 물든 쇠사슬이 이내 하나씩, 하나씩 끊어졌다.
철컹! 철컹!
떨어져 나가는 것은 철문을 옥죄었던 쇠사슬이요, 부서져 나가는 것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지옥의 문이다.
열리고 있다. 지옥문이.
구유마공의 세 번째 지옥문이 이천상의 군림마황기로 해체되고 있었다.
쾅! 콰르르릉!
‘아아아!’
지독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서량은, 일순 빛처럼 스며드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두 개의 지옥문을 넘은 세 번째 지옥문.
열세마왕공포식(裂世魔王恐咆式)의 발현이었다.
‘그렇구나.’
극심한 고통과 환희를 넘나들며, 서량은 깨달았다.
‘내가 세 번째 지옥문을 열지 못했던 이유가…….’
번뇌(煩惱)가 없었다.
중단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감정에 훨씬 솔직해졌다. 화도 냈고 짜증도 냈으며, 씁쓸해하기도 했고 슬픔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나(我)의 진체(眞體)를 찾아가는 번뇌의 여정이 없었다. 위험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번뇌라고 볼 수 없었다.
진짜 번뇌란, 바로 비무 전까지 자신이 겪었던 지독한 고뇌 같은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란 존재는 세상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마(魔)로서 난 어찌 존재할 것인가.
“크아아아!!”
번쩍!
무시무시한 포효와 함께 판마정의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포효는 멈추지 않았다. 무형의 음파에 구유마기가 실리고, 구유마기 위로 군림마황기가 씌워졌다.
“크아아! 으아아아!”
조금씩, 조금씩.
본래 음성보다 둔탁하고 거칠어지는 포효.
그것은 세상을 찢고(裂世) 나온 마왕의 소름 끼치는 포효(恐咆)라, 비로소 진정한 화경, 진정한 극마로 올라선다.
고함으로 태풍을 일으키고, 손짓 한 번에 땅을 갈아엎으며, 존재감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
생전, 살왕의 경지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진짜 극마지경이 서량을 맞이했다.
콰앙!
서량의 두 발이 대지를 밟았다.
이내 그가 이천상의 만압금마장을 찢고 나왔다. 무형의 알을 깨고 나온 또 다른 마왕이 활짝 기지개를 폈다.
화아아아악!
무너진 판마정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이천상이라는 진축(陣軸) 위로 서량의 마기가 흘러들며 판마정을 회생시킨다. 지옥과도 같았던 풍경은 사라지고 별빛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만월의 빛이 쏟아졌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죽음에 통달한 사신(死神)의 본능은 깨끗이 날아가고, 홀로 고고한 마신(魔神)으로서의 본능이 싹을 틔웠다. 지금 판마정이 보여 주는 광경은 서량의 본성이 달라졌다는 걸 증명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스승 이천상이 제자에게 가장 바라 왔던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후욱!
팔방으로 치닫던 거대한 마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우두두둑.
전신 근육이 꿈틀거리고, 뼈가 부서졌다가 다시 붙길 반복했다. 골격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천상의 육신처럼, 한층 깊어지고 거대해진 마기를 담아내기 위해 육체가 또다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진정한 마(魔)가 된 것을 축하한다, 제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