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한 걸음 (1)
내성 중앙 광장.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기침을 한다면, 그 기침 소리가 사방을 울릴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때, 저 멀리 마신궁 쪽에서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한 마인의 우렁찬 마성(魔聲)이 중앙 광장까지 울려 퍼졌다.
“성신(聖神)께서 출발하셨습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마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두우웅! 두우우웅!
묵직한 북소리가 신의 행차를 알렸다.
북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졌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마인들은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언제 북소리가 이리 가까워졌는가 하는 의문도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엄청나게 거대한 가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치장으로 뒤덮인 가마, 교주만이 탈 수 있다는 마황거(魔皇車)가 그 위용을 자랑했다. 평상시와 달리 천마휘장도 굵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마황거 안, 이천상의 모습이 보였다.
특유의 나른한 자세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정좌한 모습으로 지상을 굽어보는 마신의 모습에서 모두가 등줄기를 훑는 위엄을 느꼈다.
쿵!
마침내 마황거가 중앙 광장, 악귀상 앞에서 멈추었다.
마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군림성교(君臨聖敎)! 천마불사(天魔不死)!”
무릎을 꿇었던 모두가 이내 오체투지 했다.
“미욱한 마(魔)의 자식들이 성신(聖神)을 알현하나이다!”
그 어느 때보다 격동에 찬 목소리.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스륵.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상이 천천히 마황거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가슴을 다 드러내고 있던 평소의 차림새가 아니었다. 푸른 내의에 붉은 교복(敎服), 그리고 그 위에 화려한 용포(龍袍)를 걸쳤다. 펄럭이는 소매를 따라 흔들리는 황금빛 수실이 신비로운 위엄을 더해 주었다.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 일국의 황제나 다름없는 자태였다.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황제 이상, 진실로 신(神)이 강림한 것 같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천상이 악귀상 옆에 마련된 태사의에 앉았다.
“모두 고개를 들라.”
스르륵.
마인들이 몸을 세웠다.
일어난 게 아니라 다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들은 감히 이천상 앞에서 서 있을 수 없었다.
“배첩들은 받았을 것이다.”
앞뒤 다 뗀 말이다. 이천상다운 묵직한 어조는 덤이었다.
“파순제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더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천상의 눈가에 흡족한 웃음이 어렸다.
“그래서 시간을 앞당겼다. 나 역시 너희의 새로운 지도자를 하루빨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치세(治世)가 어느덧 한 세대를 넘어 버렸다. 앞으로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치세를 이어 갈 생각이다만, 새로운 신의 강림 역시 너희가 바라 마지않는다는 것을 안다.”
알 것이다. 신의 대리자라면 마졸(魔卒)에 불과한 자신들의 마음을 진즉에 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직접 말해 주는 것 자체가 감동이다. 마인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내 옆에서 많은 것을 배울 테지만, 또한 크게 배울 것도 없다. 너희의 새로운 신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나에 필적하는, 날 넘어설 가능성이 엿보이는 재능의 소유자이니 너희도 실망치 아니할 것이다.”
짜릿한 찬사였다. 마인들은 또 다른 천마(天魔)가 될 이를 볼 생각에 몸을 떨었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대호법.”
“예, 교주님.”
그의 옆으로 다가온 무담이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세대의 주인이 될 자를 부르게.”
“성신의 명을 받듭니다.”
허리를 편 무담이 강렬한 내공을 담아 외쳤다.
“신교의 차기 후계자는 앞으로 나오십시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강한 떨림이 묻어 나왔다. 언제나 무뚝뚝함을 유지하는 무담도 이 순간만큼은 격동을 참지 못한 것이다.
잠시 후.
쿠우웅!
마신궁의 반대편, 중앙 광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무시무시한 진각이 일었다.
굉장한 파동이었다. 농밀하기 짝이 없는 마기가 내성 전체를 뒤흔들 것 같았다.
그 진각의 주인은, 놀랍게도 서량이 아니었다.
이전처럼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서량을 모실 한 호왕(護王)의 진각.
영광된 자리에 내상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닌바 마력을 힘껏 뽐내는 호위무사의 진각에 마인들의 심장이 배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입구를 막았던 마인들이 일제히 좌우로 갈라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량이 걸어 들어왔다.
후욱.
서량이 뿜어내는 위엄 어린 존재감은 모두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난 새로운 신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되는 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뿜어내는 기파만으로도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이천상만큼이나 화려한 옷을 입은 서량의 자태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새하얀 백색 내의에 하얀 교복(敎服)으로 정갈함을 드러냈다. 그 위에 걸친 용포는 이천상의 검은 용포와 달리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실은 달려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량과 더욱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천상의 복식에 신비로운 위엄이 넘쳐났다면, 서량의 복식에선 강렬한 패기와 도전 정신이 묻어 나왔다.
차기 교주, 신교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태다. 한층 커진 체격은 그러한 패기와 열정을 더욱 잘 살려 주고 있었다.
이윽고 서량이 광장 안으로 진입했다. 그의 뒤에 선 마동필의 기파도 놀라웠지만, 서량의 존재감이 워낙 압도적이라 가려지는 느낌이었다.
이내 서량이 이천상의 맞은편 십 장 거리에 섰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이천상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하다.”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이 출중하게 연마되었다. 작정하고 개방해야 열리던 이전의 지옥문과 달리, 세 번째 지옥문은 그의 몸과 완벽하게 일체화되었다.
그저 마공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지옥문이 열린다. 작정하고 기파를 발산하면 삼류 무사 정도는 그 자리에서 즉살할 수도 있다.
서량은 강해졌다. 그것도 무섭도록.
“신교의 차기 신으로 손색이 없다. 누가 있어 나의 뒤를 잇겠느냐. 너야말로 찾아 마지않던 진정한 나의 후예다.”
마인들의 귀로 쏙쏙 파고드는 찬사였다. 이 자리에서도 이천상은 서량을 칭찬하고 있었다.
의도한 발언이지만, 실제로 서량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마존급의 무력을 쌓았다면, 이는 당대가 아닌 고금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는 재능이다.
“묻겠다. 나의 뒤를 이어 본교의 영화를 위해 그 신생(神生)을 바치겠느냐?”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던 이천상 때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서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어린 감탄, 경악, 씁쓸함 등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중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앵화.’
모인 이들 중 가장 뒤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앵화가 보였다.
앵화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감격 어린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름대로 인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준 서량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위홍련.’
위홍련은 참으로 그녀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익 웃고 있는데 숨길 수 없는 격동이 엿보였다. 그녀 역시 서량의 후계자 즉위에 흥분한 것이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엄숙한 표정 속, 위험한 장난기로 물든 호요성의 얼굴. 부드러운 미소로 든든함을 느끼게 해 주는 소연심의 얼굴. 여전히 무뚝뚝하기만 한 고구의 얼굴.
주서윤, 종리영, 채여민은 물론 주화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연을 맺었던 고루마존 등도 환히 웃으며 서량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전 생에선 그림자 속에 숨어 살던 그가, 이제는 모두가 볼 수 있는 태양이 되어 우뚝 섰다.
서량의 입이 열렸다.
“바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아아!!”
함성 속에 별의별 말이 다 튀어나왔다. 무엄하게도 서량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책잡지 못했다. 엄숙함으로 시작되었지만, 기실 축제가 되어도 모자랄 자리다. 그 열화와 같은 반응이 연쇄적으로 작용하여 끊임없이 흥분을 키웠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삼공자 서량을 신교의 소교주(小敎主)로 임명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함성이 배나 더 커졌다. 그 짜릿한 열기는 서량을 고깝게 보던 이들마저 전염시키며 천마신교를 하나로 만들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마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서량이 걸어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헉!”
“뭐, 뭐야?!”
그곳에서 거대한 짐승 두 마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신비로운 황금빛 털로 덮인 대호 크기의 여우와 여우보다 두 배는 더 큰 규격 외의 호랑이였다. 크기는 다르지만 두 짐승 모두 뿜어내는 위엄은 초절정고수를 한참이나 상회하고도 남는다.
푸른 눈의 신수(神獸)와 붉은 눈의 마수(魔獸)가 고고한 자태로 걸어왔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금호를 향해 있었다.
‘커졌군.’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저 정도 영물이라면 몸을 키우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한 위용이야.’
그리고 그 옆의 호랑이는?
‘야수궁주가 키운 범이군. 상당해.’
전투력은 비슷하겠지만 품고 있는 힘의 깊이는 감히 금호를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일개 짐승이 저 정도 괴물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크르릉.
금호가 반가운 듯 서량의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서량이 호왕을 보았다.
특유의 흉포한 눈은 그대로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고요했다. 금호와 함께 십만대산을 뛰어다니며 나름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고맙다. 축하해 줘서.”
호왕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커허어엉!
진정한 사자후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음공(音功)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렁찬 포효였다.
마인들의 눈이 충혈되었다.
새로운 소교주의 출중한 무력은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한데 어디에도 없을 신비로운 영물을 두 마리나 데리고 다닌다.
마치 세상의 선택을 받은 이 같다. 진정 신(神)의 대리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마인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금호와 호왕이 귀를 접을 정도였다.
모두의 축복, 모두의 기대.
웃으며 마인들을 내려다보는 서량의 눈빛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이제 시작인가.’
의천맹, 철혈성.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의를 주체할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신교라는 거대한 힘을 쥐고 두 집단을 공략할 수 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어때, 노친네. 슬슬 목 뒤가 따끔거리진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