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한 걸음 (2)
“흠.”
담사영(潭思永)이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기분이 묘하도다.”
십색지화(十色祉花)가 또다시 폈다.
이제 열 송이를 심으면 다섯 송이는 핀다. 이것은 정말 큰 수확이었다. 그간 한두 송이로 찔끔찔끔 시험해 왔는데, 이제는 제대로 연구해 봐도 될 듯싶었다.
박장대소를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 무인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매, 맹주님!”
“음?”
“화산파 장문인이 맹주전에 들었습니다! 워낙 막무가내였던지라 차마 막을 수가…….”
“그런가?”
담사영이 혀를 찼다.
“검문(劍門)이기 전에 도문(道門)임이 분명하거늘, 저 자신도 다스리지 못한 자가 장문인이 되어 버렸구나. 드높았던 화산의 정기도 이제 쇠퇴하려는가.”
허리를 곧게 편 그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안내하게.”
“예!”
“그리고.”
“아, 예!”
“앞으로 다시 한번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자네들 모두 무사치 못할 걸세.”
무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다 보니 담사영에 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놀라운 통치력으로 정파 무림을 휘어잡았지만, 그만큼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가세.”
담사영이 맹주전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한 중년 도사가 탁자를 후려치며 일어났다.
“이게 뭐 하자는 것이오!”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문위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상대가 화산파 장문인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산 장문인이 저래선 안 된다. 아랫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네들은 이만 나가게.”
“명을 받듭니다!”
화산 장문인, 홍산자(鴻山子)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한 자신과 달리 맹주는 무척이나 차분한 기색이다. 그것이 그의 분노에 더욱 불을 지폈다.
담사영이 의자에 앉았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진정하고 앉으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여기는 맹주전이오. 소리를 높이지 맙시다.”
“맹주!”
“장문인의 스승도 맹주전에서는 감히 언성을 높이지 못했소. 스승의 얼굴에 먹칠 그만하고, 앉으시오.”
홍산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담사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세 번의 기회는 주지 않소. 다시 한번 내 앞에서 품위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본맹의 장로 자격을 박탈할 것이외다.”
“이익!”
“앉으시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모두가 의천맹의 장로 신분으로 무림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 화산파가 빠진다면 두고두고 치욕이 될 것이다.
물론 맹주의 독단으로 장로 직위를 해제할 순 없다. 하지만 당대 맹주 담사영은 정치에 능한 자라, 작정하면 충분히 그리 만들 수 있다.
씩씩대던 홍산자가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화만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쩐 일로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맹주전에 난입한 것이오?”
난입이란다. 상당히 자극적인 단어였지만 홍산자는 한 번 더 참았다.
“정녕 이유를 모른단 말이오?”
“나는 맹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사람이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까지 눈을 돌릴 시간은 없소이다.”
담사영의 어조는 고풍스러웠고 품위가 넘쳤다.
그래서일까? 자극적인 말을 해도 결코 자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화술에 특화된 어조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특유의 부드러운 화술도 홍산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한번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는 그였다.
“맹을 운영한다? 맹을 운영하는 사람이 일을 그따위로 처리했단 말이오?”
“화가 많이 나셨구려.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니, 무례함은 한 번 더 용서하겠소. 해서,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게요?”
너무나도 차분한 대응이다. 홍산자는 속이 뒤집히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서정표국(西停鏢局)은 대대로 화산의 권속이었소! 게다가 그 표국을 세운 사람 역시 본산의 제자였소!”
“계속하시오.”
“한데 서정표국을 종남파(終南派)에 넘기겠다니? 섬서에서 서정표국이 어떤 위치인지 몰라서 그러는 게요?!”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구파가 낸 제자들이 표국, 상회 등을 운영하고, 그들의 수입 중 일부가 구파로 돌아간다는 걸 모르지 않소.
구파는 그들이 횡액에 당하지 않도록 이름을 빌려주고, 때에 따라선 본산 제자들을 파견해 호위도 붙여 준다고 들었소.”
“다 알면서도 그런……!”
“하지만 그러한 유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될 수 있음을 모르셨소?”
“변질이라니?”
“화산파와 서정표국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들었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재계약을 해야겠지.”
“그렇소!”
“하지만 그 계약이라는 것도 결국 허울뿐인 족쇄 아니오?”
“뭐라?!”
“표국주가 그러더이다. 근래 표국을 찾는 이들의 숫자가 줄고 있다고.”
쾅!
탁자를 후려친 홍산자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그렇소! 그것도 다 종남에서 만든 벽산표국(碧山鏢局) 때문이오! 그런 와중에 서정표국을……!”
“종남파는 표국을 만들어선 안 되는 거요?”
“그런 말이 아니잖소?”
“장문인은 말했소. 서정표국은 화산의 권속이라고.
그랬다면 상황을 봐 가며 상납을 받았어야지 않소? 수입은 줄고 있는데 상납금을 그리 많이 챙겨 가고 있었으니, 서정표국이 앓는 소리를 뱉을 만도 하오.”
홍산자가 이를 갈았다.
“본산과 서정표국 간의 일에 왜 간섭하는 거요?”
“한쪽에서 도움을 요청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계약은 삼 할 상납으로 했으면서, 전체 수익이 줄었음에도 이전과 같은 금액을 상납받은 건 귀 문파의 잘못이외다.”
“이익!”
“난 의천맹주요. 화산파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약자의 외침을 모른 체할 수도 없다는 거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미리 내게 언질이라도 줄 수 있었잖소! 하물며 서정표국을 종남과 연결시켜 주다니, 어찌 이럴 수 있소?!”
“나는 그저 서정표국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을 뿐이외다.”
홍산자의 눈이 이글거렸다. 도사의 눈빛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안광이었다.
“표국주가 그랬소? 종남과 손을 잡겠다고?”
“정확히는, 화산파와의 거래를 이만 중지하고 싶다고 하였지.”
“이…… 이!”
담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화를 내는 것이오?”
“화를 안 내게 생겼소?!”
“궁금하군. 보란 듯이 계약이란 관계까지 만들었으면서, 왜 서정표국이 화산의 권속이라고 오만을 떨었는지.”
“……!”
“문파와 표국이 계약을 맺었다는 것부터가 서로 남남임을 뜻하오. 서정표국은 화산의 수입원이 아니라, 독립된 표국이란 말이오.”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였다. 상대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홍산자는 이제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상대가 의천맹주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검을 뽑았을 것이다.
“힘이 약한 거래 상대라고 강도처럼 과한 상납을 요구한 것은 화산파요.”
“맹주!!”
“내 말이 틀렸소?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해 보시오.”
홍산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담사영이 미소를 거두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면, 귀 문파 쪽에서 서정표국을 존중했어야 했소. 한데 일말의 존중도 없이 과한 상납만 요구한 화산파의 행동에 무슨 대의(大義)가 있는 거요?”
“…….”
“시기가 문제였을 뿐, 귀 문파와 서정표국은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소. 그리고 그중 대부분의 잘못은 화산이 먼저 저질렀소.”
“…….”
“이제 됐소?”
“안 됐소!”
“음?”
홍산자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소, 화산파의 잘못이라 칩시다! 아무리 그래도 종남파와 맺어 주다니, 맹주가 본파를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화산과 종남은 같은 섬서 지역에 똬리를 튼 문파들이었다.
두 문파 모두 도문(道門)으로 시작했고, 검을 가르치는 검문(劍門)이었으며 영향력도 비슷했다. 당연히 경쟁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경쟁심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고, 자연 두 문파 사이의 관계는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화산파로선 아끼는 표국이 떨어져 나간 것만으로도 속이 쓰릴 판에, 하물며 그 표국이 경쟁 문파와 거래를 트게 되었다. 속에서 천불이 날 만한 일이었다.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화산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고 말했소?”
“그렇소!”
“맞소.”
“……뭐?”
“나는 화산을 우습게 보고 있소.”
우우우우웅!
홍산자의 몸에서 신비로운 자색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화산 최강의 무공이라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이 저절로 운용된 것이다.
“뚫린 입이라고 감히……!”
“감히?”
담사영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이리도 무모한 자가 어찌 일문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꼬. 전대 장문인의 안목이 참으로 실망스럽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담사영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
홍산자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잠잠하다가 일순간 맹렬하게 뿜어져 나온 기운이 자하신공을 단숨에 해체시켜 버렸다.
항거할 수 없는 기파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다른 구파 장문인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무위를 자랑한다던 홍산자가 기파만으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이보시오, 장문인.”
담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삼 년밖에 못 누린 그 알량한 장문인 자리, 지금 당장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켜 드리리까?”
오싹!
뿜어내는 기파보다, 협박 가득한 말에 실린 진심이 더 무서웠다.
“사람이 개보다 나은 이유는 생각할 줄 아는 머리가 있기 때문이오.
하물며 개도 덩치 큰 상대한테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바쁘거늘, 당신은 무엇을 믿고 그리 짖어 대는 거요?”
“…….”
“맹주라는 자리가 그리 우습게 보였소?”
홍산자는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담사영의 품위 넘치는 목소리가 유부에서 들려오는 악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기세에서 밀려 버린 그는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담사영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수문위사가 들어왔다.
“형규부장(刑規部長)에게 전하거라. 가장 깊은 뇌옥 하나를 비워 두라고. 조만간 화산파 장문인을 수감시킬 것인즉, 어떠한 편의도 봐주지 말라고 전하라.”
“명!”
홍산자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담사영이 차를 홀짝였다.
“정해 둔 후사는 없어도 눈여겨 본 사람은 있을 터, 반 시진을 드릴 터이니 본산으로 서신을 보내시오. 새 장문인을 뽑으라고.”
“……맹주.”
“혹시나 해서 말하겠는데, 도주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요. 나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으로 본맹의 정예병들을 상대하긴 힘들 것이외다.”
홍산자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요?”
“반 시진이 필요치 않소? 좋소. 그럼 바로 진행하십시다.”
“맹주! 구파의 장문인을 이런 식으로 압박해도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담사영이 피식 웃었다.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직접 손을 쓰긴 싫소. 스스로 내공을 봉하시오.”
“맹주!!”
“정히 그렇다면, 내 선택권을 드리리다.”
담사영이 깍지 낀 두 손을 다탁 위에 올려놓았다.
“화산파와 서정표국 간의 계약 내용과 지금까지 상납받았던 금액, 수입 등을 강호에 공표하시오.”
“뭐, 뭐라고?!”
“그러지 않으면 지금 당장 장문인을 뇌옥에 가두겠소. 그간 지은 죄가 많아, 아무 죄목이나 가져다 붙여도 남들은 이상하다 생각지 않을 거요.”
담사영이 짓궂게 물었다.
“뇌옥행이오? 아니면 망신이오?”
힘없이 맹주전을 나가는 홍산자를 보던 담사영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크게 하품했다.
“벌써 가을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