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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231화 (231/774)

231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한 걸음 (3)

“덥다, 더워.”

거처로 돌아온 서량은 용포부터 벗어 던졌다.

연무장에 드러누워 손부채를 부치는 모습에서 경박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새하얀 신교 정복이 먼지가 깔린 연무장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위홍련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 누우려면 침상에 누우시지.”

“내 맘이야.”

“옷 더러워지잖아요.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데.”

“비싸든 말든 사람이 입으라고 만든 거야. 무복이랑 차별하면 안 되지.”

위홍련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다. 저건 서량의 천성이다. 삼공자였을 때도, 감찰사였을 때도, 그리고 지금처럼 소교주가 되었어도 서량은 서량이었다.

기뻐서 술판이라도 벌일 만한데 귀찮다고 그냥 드러누워 버린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달리 없을 것이다.

“공자님. 아니, 소교주님.”

마동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신교의 후계자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앵화 역시 무릎을 꿇었다.

상체를 세운 서량이 손을 저었다.

“야, 새삼스럽게 그러지 마라. 내 집에서까지 딱딱하게 굴지 말자니깐. 제기랄, 그런 괴상한 대관식 같은 건 왜 자꾸 하는 거야? 쪽팔리게끔.”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모양이었다.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삼공…… 아니, 소교주님. 이제 그런 거에 익숙해지셔야 할걸요?”

“알아. 그런 모습들을 보여 줘야 할 때가 있다는 것 정도는.”

“그래요. 군중을 이끄는 위정자에게는 어느 정도 꾸며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한 모습은 때로 요술 같은 힘을 발휘하기도 하거든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여상린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알겠어요. 하여튼, 후계자가 되셨는데도 참.”

“말이 후계자지 그동안 해 왔던 거랑 크게 다를 것도 없어.”

서량이 손뼉을 쳤다.

“자, 괜스레 난리 치지 말고 우리끼리 조촐하게 술이나 한잔하자. 너희한테 고마운 일들도 많은데 그냥 지나칠 순 없지.”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이지 오늘 같은 날은 시원하게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앵화가 벌떡 일어났다.

“공자님!”

“푸헐! 나 이제 삼공자 아닌데?”

“헉! 죄송합니다!”

서량이 낄낄거렸다.

“됐다, 이놈아. 농담이야.”

“헤헤. 제가 후딱 가서 얼른 요리해 올게요!”

“아니, 오늘은 앵화도 쉬어.”

서량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내가 실력 발휘 좀 해 보겠어. 내가 너희들한테 대접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불편해할 것 없어.

안 그래도 교주님한테 육천심주를 몇 동이 받았는데 어울리는 요리 몇 개 해 보지.”

앵화의 얼굴이 묘해졌다. 엄청나게 황송하면서도 기쁘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위홍련이 앵화의 어깨를 짚었다.

“너무 불편해하지 마라. 우리가 언제 소교주님한테 대접받아 보겠냐?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즐기자고.”

“네, 네!”

“소교주님, 후딱후딱 움직여 주세요.”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넌 가라.”

“아, 또 왜요! 섭섭하게 자꾸 나만…….”

“위 검노가 가만히 놔두겠어? 금주해야 하잖아?”

위홍련이 주춤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셔 보겠는가? 위찬도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됐거든요? 저 오늘 위장이 뚫리도록 마실 거예요. 게다가 육천심주잖아요! 육천심주 한 번도 못 마셔 봤다고요!”

“참나, 알았다. 나중에 위 검노한테 몽둥이찜질 당해도 난 모른다.”

“걱정 붙들어 매십쇼!”

서량이 소매를 걷어 올리곤 대문을 바라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력은 제법이다만 기(氣)의 운용이 어설퍼. 그렇게 몸 숨겨 봤자 의미 없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마동필은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대문 밖에서 누군가가 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위홍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그게 뭔 말이래요?”

서량이 턱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부끄럼쟁이 하나가 숨어 있거든.”

“엥?”

그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대문 밖에서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절정고수급은 아니지만 능히 일류라 불릴 만한 기세였다.

위홍련의 눈이 커졌다. 여상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굉장한데.’

수준 차이가 명확함에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서량은 기의 운용이 어설프다고 했지만, 수준 차이를 무시할 정도의 은신술이라면 기공의 조율에 도가 튼 사람이 분명했다.

서량이 손을 뻗었다.

드르륵.

대문의 빗장이 알아서 열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이라 했지만, 마냥 소년이라 부르기에는 애매했다. 그리 어려 보이진 않지만, 성인도 아닌 애매한 모습이었다.

이제 열여섯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은 제법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선 굵은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사내다웠다. 등 뒤에는 세 자루나 되는 단창(短槍)을 맸는데, 창대가 반질반질한 것이 수련을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소년, 종리영이 허리를 숙였다.

“신교의 소교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종리영입니다.”

예와 격식을 갖춘 인사였다.

언뜻 봐도 보여 주기식 인사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서량을 축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교의 작은 주인에 대한 공경의 예는 넘치도록 느껴졌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여섯째구나.”

종리영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저 나이에 저런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과연 거경가주의 자식답군.’

무뚝뚝해 보이진 않지만 기질이 닮았다. 한 마디 나눠 보진 못했지만,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제가 실례를 한 것은 아닌지요?”

“실례는 무슨. 그런데 무슨 일이지?”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감히 소교주님께 독대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딱딱한 녀석.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위 대주.”

“네?”

“잠시 산보 좀 갔다 올 테니까 주방 좀 정리해 줘.”

“아, 왜요!”

“맛난 음식 처먹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인마. 너 혹시라도 앵화 부려 먹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릴 거야.”

위홍련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남이 본다고 웅얼웅얼 잘 들리지도 않는 혼잣말이었다.

서량이 옷을 털곤 연무장 아래로 내려왔다.

“갈까?”

두 사람이 걷는 곳은 서량의 거처 주변, 자그마한 대숲 인근이었다.

“이렇게 둘이 대화하는 건 처음인가?”

종리영이 의아한 얼굴로 서량을 바라보았다.

“예전, 제가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억 안 나십니까?”

있긴 있었던 모양이구만.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입마에 들고 나서 과거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었어.”

“아,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아냐.”

대숲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종리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교주가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서량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은 맞지?”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이놈 자식, 할 말 없게 만드네.

“축하는 드릴 수 있지만 아쉬움이 없을 순 없습니다. 저도 후보였으니까요.”

“솔직하군.”

“소교주님의 경지가 극마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 거짓말해 봤자 다 들킬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극마에 이르렀다고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어. 그냥 유추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예.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아니다.

종리영은 애초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아비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나 할까. 누군가를 속이려 해도 얼굴에 다 드러나는 녀석임이 분명하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아쉬움이 남는 축하라…… 참으로 사내다워서 좋다만, 아직 날 찾아온 이유를 말해 주진 않았구나.”

종리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를 고심하는 듯 그의 눈썹이 살짝 조여졌다. 심각한 것 같진 않지만 가벼워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께서는 저희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경가?”

“예.”

“좋은 가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주의 성향도, 성격도 인상적이었지.”

진심이었다. 마도칠가의 모든 가문을 들러 봤지만, 거경가주만큼 괜찮은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은 없었다.

종리영의 얼굴에 은근히 그늘이 드리워졌다.

“저는 저희 가문이 저지른 죄를 압니다.”

서량이 종리영을 내려다보았다.

“죄?”

“예.”

“무슨 죄를 말함이지?”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소교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혹시라도 제 방정맞은 주둥이 때문에 저희 가문에 피해가 갈까 무섭습니다.”

서량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가문을 사랑하는군.”

“몹시 사랑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종리영도 천마신교에서 이탈하려 했던 가주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종리산의 성격을 봤을 때, 그에 관한 얘기를 종리영에게 해 주었을 것 같진 않다. 눈치가 좋은 녀석이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말입니다.”

종리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저희 가문이 신교에 큰 죄를 지었을 때, 한 번만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용서라…….

“아니, 용서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의 강도가 정해지는 법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종리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깊은 고뇌가 묻어 나온다.

“제가 신교에 충성하겠습니다.”

“무슨 의미냐.”

“만일 가문이 큰 잘못을 저지른다면, 제게 그 벌을 주십시오. 어떻게든 감당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본교의 인질이 되겠다는 뜻이냐?”

“필요하다면 뭐든 되겠습니다. 어차피 넌 신교의 사람이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종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서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종리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

어린 나이에 이만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쉽지 않다.

물론 종리영은 모르고 있다. 가문의 죄를 혈육 하나가 짊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집단의 죄를 온전히 뒤집어쓰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그 집단의 수장이지, 수장의 혈육이 될 수는 없다.

어리고, 어설프다. 경험이 없으니 그런 부분에 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특했다. 종리영은 서량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

보아하니 강단도 넘치는 듯하여, 실제로 그런 일이 닥친다 한들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서량은 종리영이 마음에 들었다.

내 사람은커녕 스스로도 책임 못 지는 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이 어린 나이에도 가문의 짐을 떠안겠다는 용기를 냈다. 어른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배 안 고프냐?”

“……예?”

“난 배고프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서량이 종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표정이 퍽 귀여웠다.

“같이 먹자. 내 솜씨가 그렇게 나쁘진 않아.”

“소, 소교주님.”

“사석에서는 그냥 형이라고 불러, 인마.”

서량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은은한 죽향을 머금은 바람이 오늘따라 유독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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