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한 걸음 (4)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연무장에 나온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편안하군.’
예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막상 소교주가 되고 나니 정말 내 집 같다.
거처 곳곳에 앵화의 손때가 묻어 있다. 자신의 족적이 남아 있고, 모두의 웃음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제는 이곳 아닌 곳에서 잠도 잘 안 올 것 같았다.
크릉.
그때, 한옆에 웅크리고 있던 금호가 서량에게 다가왔다. 대문 옆에 엎드린 호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귀만 쫑긋거릴 뿐이었다.
서량이 금호를 쓰다듬었다.
“호왕이랑 많이 친해졌냐?”
크르릉.
“알았다, 인마.”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괜찮아 뵌다. 아까 환희원에서 가져온 소고기 백이십 근도 둘이서 똑같이 나눠 먹었다.
산중에서도 나름대로 서로를 존중했던 모양이었다.
“너 때문에 앵화가 많이 놀랐어.”
중앙 광장에서도 그랬지만, 술자리 중에 들어온 금호를 보며 앵화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옛날의 그 귀여운 모습은 어디로 갔느냐며 저보다 커다란 금호를 안고 오열했다.
물론 금호는 앵화의 서글픔을 받아 주지 않았다. 애초에 금호는 앵화에게 별 흥미가 없었다.
“한 번씩 놀아 줘라. 너 요만할 때를 기억해 봐. 앵화가 너 주려고 음식을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들었는데.”
금호가 크게 하품했다. 서량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놈 진짜 정 없다니까.”
연무장 끄트머리에 앉은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수많은 별이 반짝거렸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자, 이제 뭘 해야 하나?”
서량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곧바로 나갈 순 없겠지? 아니야, 냉큼 나가겠다 해도 교주님이라면 허가해 주실 거야. 문제는 나간 뒤에 어떻게 움직이는가다.”
삼공자였을 때는 공식적으로 권력을 쥘 수 없었다. 애초에 직책이 없었다.
하지만 소교주는 다르다. 소교주라는 자리 자체가 직책이며, 책임이다.
이제 그는 신교의 병력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교주만큼 마음대로 할 순 없지만, 그가 명하면 중원 전체에 퍼져 있는 신교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다.
‘마음 같아선 곧바로 치고 싶지만.’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고구 그 양반, 가끔 재수 없기는 해도 참 고마운 사람이야.”
그는 고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의천맹을 치겠다는 것은 곧 본교의 마인들을 전쟁에 끌어들이겠다는 말과 같소.
- 그때도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할 생각이오? 너희의 숭고한 죽음을 발판 삼아 숙적인 의천맹을 없애 버리겠다, 내가 교주니 내 말에 따르라.
- 삼공자가 본교의 영화(榮華)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 나름의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오.
맞는 말이다.
그는 천마신교를 악귀의 소굴이라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자신의 목숨만 생각했으며, 이놈들이 여기서 죽든 저기서 뒈지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마신교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의천맹보다도 더 정이 갔다.
그리고 서량은 그 괜찮은 사람들의 주인이 될 위치에 섰다. 함부로 이들의 목숨을 쥐고 흔들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소교주가 되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량의 얼굴에 씁쓸함이 맺혔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어.”
사실 답은 간단했다.
앞뒤 안 가리고 그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그만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다.
서량은 평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것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왔다. 그가 스스로의 목표를 그리 잡았다면, 누구도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문제는 서량이 마음에 큰 짐이 될 만한 사건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준 파급력은 작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나가던 서량에게, 당신의 좌우에는 이러한 사람들도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한 번 알게 된 이상 그것은 떨칠 수 없는 올가미가 되어 그의 발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제길, 복잡하구만.”
벌떡 일어난 서량이 팔다리를 풀었다.
“이럴 때는 역시 한바탕 뛰는 게 제일이지.”
기수식도 없다. 연무장 중앙에 선 서량이 곧바로 무공을 전개했다.
시작은 마황군림보였지만, 연달아 내치는 무공은 중구난방이었다.
천마벽력권을 펼치는가 하면 폭산경을 구사하기도 했고, 무명(無名)의 각법을 올려 치는가 싶더니, 수도(手刀)로 인화도법을 펼치기도 했다.
내력을 담지 않은 수련이지만 투로에 담긴 깨달음은 궁극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한 차례 변화한 그의 육신은 이미 흉기나 다를 바 없었다.
한참 수련하던 서량이 어느새 자세를 풀었다.
“후우.”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다.
극마에 오르자마자 육체와 무공 경지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의 육신은 이미 완벽의 영역에 근접하여, 제아무리 복잡한 무리(武理)라도 생각 그대로를 펼쳐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단련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어떤 무공이든 큰 무리 없이 몸에 붙일 수 있다. 한없이 강하고 탄력적이기만 했던 이전의 몸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서량이 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창가를 통해 날아온 네 자루의 칼이 실로 오랜만에 그 자태를 드러냈다.
“음…… 각자의 쓰임새가 다르기는 하다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네 자루씩이나 필요하진 않은데.”
애초에 네 자루를 다 썼던 전투는 별로 없었다. 이제는 진기로 칼을 형성, 유형(有形)의 마기로 만든 칼로 어도술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칼들을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이미 극마를 뚫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긴, 애초에 극마에 이르지 않고서는 유혼비천도 제 위력을 내긴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칼들이다. 이 칼들 덕에 목숨을 구한 게 몇 번이던가.
“일단 몸이나 한번 풀어 볼까?”
그때였다.
서량이 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
네 자루 칼을 몸에 찬 서량이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바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소음이 무척이나 적었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총군사?”
이윽고 마차가 그의 앞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호요성이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예. 어쩐 일이십니까?”
“글쎄요. 어쩐 일일까요?”
“…….”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참 농담 안 통하십니다, 소. 교. 주. 님.”
서량이 피식 웃었다.
“한데 칼을 네 자루씩이나 차고 뭐 하고 계셨습니까? 천하십대고수라도 암살하러 가시는 겁니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지금의 서량이라면 진짜로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
세 번째 지옥문, 열세마왕공포식을 열어 버린 지금의 서량은 과거 살왕 때보다도 한 수 위의 무력을 갖추었다고 봐도 좋았다.
“됐고, 여기까지 오신 이유나 후딱 말해 주십쇼. 서신만 보내도 될 걸 어인 일로 직접 오셨습니까?”
“어헛? 큰일 날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교의 소교주가 되셨는데 아무리 총군사라도 감히 서신으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나요? 걸리면 저 형법당 끌려갑니다.”
“…….”
“아, 이유를 아직 말 안 했지요?”
“예.”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제 일터 같이 가 보실래요?”
* * *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데가 있었습니까?”
“제 집무실만 오셨지, 군사부 작전실에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으셨지요?”
“그럴 수밖에요. 안 보이는 곳에서 호위하는 마인들이 무척 많습니다.”
“역시 꿰뚫어 보시는군요. 몇이나 되는지 맞춰 보실래요?”
“일흔둘.”
“정확하십니다.”
호요성이 문서들을 뒤적거렸다.
“제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이라서가 아니라, 군사부는 신교에서 제일 중요한 조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 물론 마신궁을 제외하고요.”
그럴 만도 했다. 신교의 내치(內治)와 외치(外治) 모든 것을 담당하는 조직은 군사부가 유일하니까.
“일흔두 명의 호위무사들도 전부 교주님께서 뽑아 주신 인력입니다. 호위 실력 하나는 본교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래 보이는군.”
“흐흐.”
서량이 작전실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색색의 말들이 꽂힌 거대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신교의 병력은 붉은 용으로, 철혈성은 흑색 호랑이, 의천맹은 푸른 매로 나타낸 것 같았다.
“지도가 무척 세밀하군요.”
“물론이지요. 아마 삼세(三勢) 중 본교의 지도가 가장 세밀하고 정확할 겁니다.”
“음.”
그리 자신할 만도 하다. 살수 일을 하며 수만 장의 지도를 봐 왔지만 이런 지도를 본 적은 없었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예.”
“굴송차?”
“벽라춘.”
호요성이 따끈한 차를 타 왔다.
찻잔을 받아 들며 서량이 말했다.
“근데 작전실을 제게 보여 주셔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정식으로 본교의 소교주가 되셨는걸요. 누군가는 그럽니다. 총군사인 제가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권력자라고요.”
호요성이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그 위치는 소교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삼인자가 되어 버렸지 뭡니까.”
“다행이군요.”
“예?”
“총군사보다 지위가 높아진 거요.”
“헤에, 저를 껄끄럽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상처 받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차를 한 모금 마신 서량이 탁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래서, 여기까지 절 데려오셔서 뭘 보여 주고 싶으신 겁니까?”
“오늘따라 무척 싸늘하신데요?”
“싸늘한진 몰라도 기뻐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묻는 말에 바로바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만 더 말 돌리고 장난치면 그냥 나갈 겁니다.”
“……아, 예.”
호요성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사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이 새벽에 소교주님을 뵈러 가진 않았을 겁니다. 한데, 그 어지간한 일이 터져 버려서 문제지요.”
“어떤 문제입니까?”
“그 말을 하기에 앞서, 확인받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소교주한테 무엄한데요?”
“농담이시죠?”
“계속하십시오.”
“좋습니다.”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맹성(盟城)을 지상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말씀은, 두 세력을 와해시키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두 세력의 수장과 휘하 수뇌부들만 싹 박살 내겠다는 뜻입니까?”
서량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수장과 수뇌부들, 이차적으로는 와해.”
“음.”
“완전히 와해시키진 못해도, 최소한 맹성의 주인들은 몽땅 작살낼 생각입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충분히 되었습니다.”
호요성이 지도 위, 섬서 부근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이를 가져왔다.
“보십시오.”
“뭡니까?”
“보면 아실 겁니다.”
서량이 서신을 펼쳤다.
이내 그의 눈이 흔들렸다.
“……화산?”
“그렇습니다. 덕분에 의천맹이 제법 시끌시끌해졌답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정보의 송신처를 보았을 때 진실일 확률은 구 할 이상입니다.”
“…….”
“자, 골패 하나가 툭 던져졌습니다. 소교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서량의 눈이 빛났다.
“새벽에 찾아왔다고 혼내진 않으시겠지요?”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따로 호출할 테니 그때까지 곯아떨어지면 안 됩니다.”
“전 재미있는 놀이가 생기면 잠 못 잡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이따 봅시다.”
몸을 돌린 서량의 두 눈에 은은한 혈광이 일었다.
‘알아서 이유를 만들어 주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