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한 걸음 (5)
“교주님. 소교주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쿠구궁.
문이 열리고 서량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이천상은 여전했다. 태사의가 아닌 창가에 앉아 술을 따라 마시는 그의 모습은 특유의 나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왔느냐?”
“예. 어? 육천심주 아니네요?”
“죽엽청주다.”
“향 좋네요.”
“한잔하겠느냐?”
“좋지요.”
이천상의 맞은편에 앉은 서량이 공손하게 잔을 받았다.
시원하게 잔을 비워 낸 서량이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찾아온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언제 주무시는 겁니까?”
“필요할 때만.”
“그렇군요.”
이천상이 다시 서량의 잔을 채워 주었다.
“고생했다.”
“예?”
“대관식 말이다. 물론 대관식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생은 사람들이 했지요.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굳이 왜 찾아왔느냐 묻지 않았다. 찾아온 상대가 알아서 말하리라 생각하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서량이 말했다.
“군사부에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그렇군.”
“작전실까지 들어갔다 왔지요.”
“재미없는 곳이지.”
이천상은 서량이 군사부의 작전실에 들어갔다는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소교주라면 언제 어느 때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총군사가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다며 제게 보여 주더군요.”
서량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이천상의 잔 앞에 내려놓았다.
잔을 든 이천상이 힐끔 서신을 보더니 잔을 비웠다.
“화산도 말썽이군.”
“그러게요.”
“언제나 그랬다.”
“예? 화산이요?”
“화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잔을 놓은 이천상이 입꼬리를 올렸다.
“의천맹주 말이다.”
순간 서량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의천맹과 철혈성을 없애는 것이 너의 꿈이라 했더냐?”
“그렇습니다.”
“소교주가 되었으니, 이제 말해 주마.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놈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삼가 경청하겠습니다.”
이번엔 서량이 이천상의 잔을 채워 주었다.
“삼십 년 전, 내가 대외 정책을 수동적으로 바꾸었을 때만 해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제법 강단 넘치는 문파들이었다.”
제법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이천상이다. 그 말 자체가 그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점차 예전과 달라졌다. 적극적인 무공 교류로 문파의 전력은 강해졌지만, 과거와 같은 강한 유대와 여유는 사라져 버렸지.
그 이유를 아느냐?”
“……그게 의천맹주 때문입니까?”
“그렇다.”
이천상이 잔을 들며 말했다.
“의천맹주는 뱀이다. 천 년 묵은 독사 중의 독사지. 놈은 이무기만큼 간사하고, 구미호만큼이나 영악해.”
동감이었다. 그나마 이천상은 의천맹주를 독사에 비유했지만, 서량이 보는 그는 그저 악에 물든 쓰레기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쓰레기의 정치력이 중원에서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지만.
“놈은 문파의 수장들을, 협의(俠義)의 상징이라는 그들을 타락시켰다.”
“……?”
“궁금한 모양이군. 그들을 어떻게 타락시켰는지.”
“예. 썩어도 준치라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이 되려면 웬만한 무공으로는…….”
“의천맹주가 그들을 타락시킨 방법은 사술 따위가 아니야.”
“예?”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마공보다 열 배는 지독하고, 사술보다 백 배는 더 효율적인 무기로 그들을 타락시켰다.”
“그런 게 있습니까?”
“욕망.”
“……!”
“의천맹주는 욕망이라는 게 무엇인지, 권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들에게 제대로 체감시켰다. 깨끗한 우물에 독을 푼 것이지.”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어떻게……?”
“말하지 않았느냐. 의천맹주는 독사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의 발바닥을 핥도록 만들기 위해선 놈들의 정신부터 망가트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니, 제가 여쭙고 싶었던 건 이유가 아니라 방법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아주 쉬운 방법이 하나 있지.”
“예?”
“경쟁이다.”
“……아!”
이천상이 서량을 직시했다.
“체제가 확립된 조직의 경쟁은 선순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조직에서의 경쟁은 악순환을 일으키지.”
“…….”
“놈은 구파와 오대세가 사이를 찢어 놓았다.”
간단히 말해 구파는 종교이고, 오대세가는 세도가다.
도가,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수행자의 심신(心身)을 건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각 종파들은 양생술(養生術)이란 것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그 양생술이야말로 현재의 구파가 구파로 불릴 수 있게 만들어 준 시작점이라 할 수 있었다.
수 세대를 지난 구파는 양생술을 기반으로 절정의 무공을 만들어 냈고, 이내 중원 무림의 기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오대세가는 달랐다. 그들은 수행자가 아니었다. 구파와 다른 속세의 세력인 만큼 각자가 최고의 자리에 서기를 바랐다.
싸우고 또 싸워 지금의 자리를 쟁취한 투쟁심 넘치는 승부사들. 그들이 바로 오대세가였다.
“구파와 오대세가는 같지만 다르다.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 불리고는 있으나, 나눈다면 나눌 수 있는 조직들이란 말이다.”
“그렇군요.”
“의천맹주는 그렇게 정파 무림을 장악했다. 경쟁을 통한 욕망의 싹을 던져, 알아서 분열하게 만든 것이다.
이후 분열된 두 집단의 광기를 과열시키고, 중간에서 조율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아무리 경쟁에 미쳤다 한들, 수백 년간 정파 무림을 위해 헌신해 온 저력까지 망가지진 않았다. 그들은 현재 상황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랬겠지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틀렸다. 그들은 바보였고, 그 순간 타락해 버렸다.”
“예?”
“진정 그 상황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힘을 모아 의천맹주를 몰아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야 말았지.”
이천상이 다시 잔을 채웠다. 오늘은 유독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랐다.
“악의 가득한 조율자에게, 자신들의 편이 되어 달라 압력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서량이 탄성을 질렀다.
담사영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긴 했지만, 놈이 정세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세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 보니 알겠다.
담사영은, 협의 넘치던 열다섯 개의 문파를 자신과 똑같이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의천맹주의 교활함은 거기서 빛을 발했다. 그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고개를 숙이라면 숙였고, 꿇으라면 꿇었지.
꼭두각시 맹주로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최선이라 할 순 없지만, 훌륭하다는 평가는 받을 만한 공략이었다.
결국 구파와 오대세가는 의천맹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만 묶여 있을 뿐,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지.”
“그리고 바로 그때, 의천맹주가 마각을 드러냈겠지요.”
“정확하다. 틀어진 두 집단 사이에서 존재감을 키워 시선을 제게로 집중시켰지.
두 집단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데리고 써먹기에는 충분한 힘이 될 만한 수준의 존재감을 뽐냈다.”
“…….”
“거기서 두 집단은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각성의 여지가 있었던 첫 번째 실수와는 격이 다른 실수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의 투신이었지.”
“어떤 실수였습니까.”
“중소 문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의천맹주에게, 각 문파의 뜻이 실린 명령서를 발송한 것이다.”
“……!”
“명령서에는 각 파 장문인들의 신물(神物)로 찍힌 직인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지.”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의 목숨줄을 알아서 건네준 격이로군요.”
“그렇다. 딴에는 맹주를 압박할 의도였겠지만…… 글쎄, 오히려 그것이 자신들의 목을 옭아매는 최악의 한 수가 될 거란 생각을 왜 못 했는지 모르겠다.
경쟁이란 밭에서 싹을 틔운 욕망의 향기 때문이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천상이 턱으로 서량의 잔을 가리켰다. 아차 싶은 서량이 서둘러 잔을 비웠다.
그러자 그가 다시 서량의 잔을 채워 주었다.
“의천맹주는 그 명령서를 숱하게 받아 놓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그가 받은 명령서들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공격의 시작이로군요.”
“잘 보았다. 의천맹주는 그것을 중소 문파의 대표들 앞에 꺼내 놓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기가 막히는군.”
“담대한 전략이었다. 중소 문파는 믿고 있던 맹주의 치부를 알게 되지만, 그를 탄핵할 수 없었다. 그럴 힘도 없었어.
오히려 맹주를 위로해야 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줄 유일한 사람이 맹주였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몇몇 놈들은, 그 치부를 갖고 맹주를 휘두를 생각도 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맹주를 휘두르려 할 때, 이미 맹주는 구파와 오대세가를 전부 장악했겠군요.”
“그렇다. 강자와 약자 사이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의천맹주는 비로소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들으니 새삼 소름이 돋는다.
무공보다도 지략이, 지략보다도 음험한 마음이, 마음보다도 그것을 실제로 실행해 낸 광기 어린 추진력이 무서웠다.
의천맹주 담사영.
의천무제(義天武帝)라고도 불리는 그의 실체는, 천마신교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흉악한 악마 그 자체였다.
“놈의 무공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권력이 강해지고, 금력과 정보력까지 한 손에 쥔 놈은 천하 온갖 영약들을 취하기 시작했지.”
“무공이 영약 많이 먹는다고 강해지는 건 아닐 텐데요.”
“물론 그렇다. 하지만 철벽의 난도를 돌담 수준으로 낮출 수는 있지. 내 장담컨대, 현재 의천맹주의 무공은 십대고수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것이다.”
이천상이 서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아가 지금의 너와 마존들보다도 확실히 강하겠지.”
서량이 씨익 웃었다.
살기가 묻어 나오는 그 웃음에는 질투도, 호승심도 없었다. 그저 죽이겠다는 순수한 의지만이 배어 있었다.
“기대되는군요.”
이천상이 피식 웃었다.
‘완전히 마(魔)에 물들긴 했어도 습관은 버리지 못하는군.’
상관없다. 이미 마의 품으로 들어왔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품격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승리 앞의 품격인지, 죽음 앞의 품격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에 비하면 철혈성주는 양반이다. 정쟁을 기반으로 성주의 직위를 따냈지만, 적어도 화통한 면이 있는 놈이야.
공략하기는 당연히 의천맹주보다 쉬울 것이다.”
“저는 맛난 음식이라고 아껴 먹지 않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날 찾아온 이유는 그 섬서의 일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이천상은 거기서 뭘 어떻게 할 것인지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허가를 받으러 왔군.”
“그렇죠.”
“미안하지만 허가할 수 없다.”
서량은 대답 없이 이천상을 주시했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건방진 눈빛이구나.”
“소교주 아닙니까.”
“네 스승은 교주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부분에서만 날 닮았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
“예. 근데 어디 가시는데요?”
이천상이 힐끔 서량을 바라보았다.
“중원에서 설치든 새외에서 설치든, 최소한 네놈이 내 제자임을 증명할 것들은 가져가야 할 것 아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