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철의 피 (1)
경치 좋은 곳의 밤하늘은 어디라도 좋을 수밖에 없지만, 십만대산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유독 운치가 좋았다.
항상 대전이나 후원 정자, 혹은 판마정에서 술을 즐기던 이천상은 간만에 마신궁의 지붕 위에 올랐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호위무사들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오른 다리를 쭉 펴고 사자상에 기대앉은 그의 얼굴에 나른함이 가득했다.
“올라오게.”
“예.”
스르륵.
무담이 그의 옆에 나타났다.
“같이 한잔할 텐가?”
“영광이옵니다.”
무담이 이천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편히 앉게.”
“……예.”
평생 그런 자세를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은 무담의 모습은 무척 어색해 보였다.
“호법원은 요새 어떤가?”
“이상 없습니다. 일 조장의 능력이 탁월하여 일체의 잡음이 없습니다. 조원들의 능력도 꾸준히 상승 중입니다.”
“이군성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괜찮은 인재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 그를 후계로 삼을 생각인가?”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하나, 뒤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마음을 정하면 데려오게.”
“예.”
“한잔하지.”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그때, 이천상이 밭은기침을 뱉어 냈다.
무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 교주님!”
“신경 쓰지 말게.”
“……혹,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병에 걸리고 싶어도 육신이 그걸 거부해 버리지. 평생 병마(病魔) 따위에 시달릴 일은 없을 걸세.”
그럴 것이다. 당장 극마에 이른 무담의 육신만 해도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 만하다. 그런 무담보다 한참 앞서 나간 이천상의 몸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잠시 고민한 무담이 조심스레 한마디를 뱉었다.
“조금…… 지쳐 보이십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을 완성한 이후, 처음으로 모든 공력을 쏟아부었네. 아니 지칠 수 없지.”
“소교주 때문입니까?”
이천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대호법.”
“예, 교주님.”
“내가 어떻게 교주가 되었는지 아나?”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직접 보진 못했겠지. 그때 자넨 아주 어렸으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투쟁으로 이 자리를 쟁취했네. 그때의 투쟁은 지금 내 제자들의 다툼과는 여러모로 달랐지.
훨씬 혹독했고, 지독하게 잔인했네. 상대를 속이는 것은 예사요, 필요하다면 가족을 인질로 삼기도 했고 심지어 내란을 일으키기도 했네.”
“……본교 역사상 가장 지독한 싸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나마 량이가 그때의 싸움에 가까운 파격을 저질렀지. 자칫 신교가 절단 날 뻔한 적도 많았네. 말 그대로 아귀다툼 그 자체였어.”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전대 교주가 제어할 수 없는 싸움이기도 했네. 그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었어.
이유인즉, 이미 나를 비롯한 몇몇 후보들의 경지가 진즉 교주를 뛰어넘었기 때문이야.”
대외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의 천마신교는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었다.
전전대 교주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그나마 괜찮은 역량을 뽐냈던 전대 교주가 뒤를 이었지만, 전대 교주의 무공에는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무공보다 심성이었다. 전대 교주는 천마의 칭호를 받지 못한 교주였으며, 그 자격지심에 폭정을 저질렀다.
폭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신(神)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던 마인들이 단체로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다.
수뇌부들은 부정부패에 찌들었으며, 폭압에 지친 마인들이 신교를 이탈하기까지 했다.
만일 환희원이 중심을 잡지 못했다면, 천마신교가 반 토막이 나버렸을 것이다.
그때 나선 것이 이천상을 비롯한 후보들이었다.
“나를 비롯한 후보들은 교주의 제자가 아니었네.”
무담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 듣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수뇌부의 자식도 있었고, 외성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마인의 자식도 있었지.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분이 아니었네.
미래였어. 본교의 미래를 위해, 다음 세대를 짊어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했네.”
“…….”
“그렇게 무재(武才)가 출중하고 심성이 올곧은 젊은 마인 열셋이 모였네.
그들은 비밀리에 신마회(神魔會)라는 조직을 만들어, 부패의 온상이 된 신교의 빈틈을 노려 온갖 무공과 영약을 빼돌렸다네.”
“그러셨군요.”
“오 년 후, 우리는 결의했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기로.”
“……!”
“누구도 우리를 후계 후보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움직였네.
그렇게 우의(友誼)를 기반으로 시작된 미친 싸움에서 절반이 죽어 나갔을 때, 비로소 우리는 교도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네.”
이천상의 미소에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지옥의 무대였지.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 왔던 전우를 죽이고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
“그래서 그들은 죽는 그 순간에도 상대를 원망치 않았네. 나보다 뛰어난 이라면 필시 신교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상대를 증오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지독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단 말이네.”
무담의 눈이 감격으로 일렁였다.
그는 지금 누구도 듣지 못했던 이천상의 비사(秘事)를 듣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준 것이 감사했고, 신교를 위해 헌신코자 한 선배들의 목숨을 건 행보에 감동했다.
“놀랍게도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예?”
“정확히는, 량이가 소교주가 되고 나서야 끝을 보려는 중이지.”
“그게 무슨…….”
“삼십여 년 전, 내가 본교의 대외 활동을 축소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달빛의 마력은 불세출의 마신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이천상은 작정하고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려는 것 같았다.
무담이 침을 삼켰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이천상이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던 거대한 계획의 일부를 들려주려 한다는 것을.
“궁금합니다.”
“궁금하겠지. 하지만 자네도, 마존도, 나아가 모두가 그 결과를 보고 있는 중일세.”
“……예?”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
이게 무슨 말일까?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그의 미소는 은근히 섬뜩했다.
“보이지 않는 적(敵)의 존재란 목에 걸린 가시와 같네. 하지만 그 상태가 지속되면 더 이상 거슬리지 않게 되네.
마치 휴식기의 화산처럼. 오히려 그 세대를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적의 존재에 공포보다 호기심을 갖게 되지.”
“……!”
“내부부터 무너진 세상을 장악하기에 딱 좋은 시기 아닌가?”
무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은 설마……?!”
“그렇다네.”
이천상이 잔을 비웠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후계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두었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 * *
“어디 보자.”
서량이 반투명한 재질의 상의 한 벌을 들어 올렸다. 탄성이 대단해 보였다.
“이건 영강보의(影鋼寶衣)라고 한다. 무슨 재질인진 모르겠지만, 절정고수의 검기에 맞아도 흠집 하나 안 난다고 해.
천고의 기물이지. 이건 속곳 바로 위에 입으면 될 거고.”
“…….”
“이건 피독환(避毒環)이라고 하는 건데, 어떤 면에서는 영강보의보다 귀한 놈이야.
무형지독(無形至毒) 정도는 무리지만, 어지간한 극독에 노출되어도 신체에 전혀 이상이 생기지 않게 해 주는 기물이다.”
“…….”
“요건 천잠혈포(天蠶血袍)야. 화포의 포격을 맞아도 멀쩡하다더군. 충격도 어느 정도 분산시켜 준다고 하니…….”
“소교주님.”
“응?”
가늘어진 여상린의 눈초리에 서량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뱉었다.
“일은 다 저질러 놓고 뒤늦게 이런 물건들 챙겨 주면 마음이 편하신가요?”
“……조금은?”
“소교주님!”
빽 내지르는 목소리에 귀청이 다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미리 상의라도 하셨어야죠! 냅다 일 터트리고 뒤늦게 와서 선물 공세를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안 갈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욧!”
“커험.”
서량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미안하다.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리해 버렸어.”
“어휴.”
“이 빚은 꼭 갚을게. 한 번만 봐줘라. 응?”
여상린이 투덜거렸다.
“봐주긴 뭘 봐줘요? 어차피 저는 소교주님을 도우러 온 건데.”
“껄껄.”
“웃지 마세요.”
“응.”
“하여튼, 뭐든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피곤해하죠.”
“쩝.”
“앞으로는 미리 말해 주셔야 해요. 아시겠어요?”
“알았다.”
여상린은 뒤끝 없는 사람이 확실했다. 몇 번 투덜거리는 걸 끝으로 서량의 몰상식함을 싹 잊어 주었다.
“그래서 같이 가는 사람은요?”
“나랑 너, 그리고 동필이 정도?”
“그게 끝이에요?”
“괜히 이목 끌어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앵화도 같이 가요.”
“안 돼. 위험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고 데려가요. 빙궁주의 여식이 중원을 둘러보러 나왔는데 시녀도 없이 나온다고요?
남자 호위무사 둘만 달랑 데리고? 그게 말이 돼요?”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생각 못 했네. 야, 그래도 앵화는 빼면 안 돼? 까딱하면 위험해진단 말이야. 앵화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본인 시녀라고 엄청 챙기시네요.”
“당연하지.”
“현재 신교에서 앵화만큼 내공 빵빵하고 눈치 좋은 시녀는 있고요?”
여상린의 말이 옳았다. 서량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만 보여 주지만, 앵화의 내공은 만만치 않았다.
서량이 준 내공심법을 꾸준히 연마한 지금의 앵화는, 환희원 소속 시녀 중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어요. 이 기회에 무공도 본격적으로 연마하게 같이 데려가요.”
서량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굳이 여상린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앵화만 한 적임자는 없었다.
그간 함께 지내 왔기에 위급 상황이 터져도 나름대로 손발이 맞을 것이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언제 출발한다고요?”
“한 시진 뒤에.”
“빡빡하군요.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는 여상린을 보며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좀 급했나?”
한옆에 서 있던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급하긴 하셨습니다.”
“뭐, 어차피 이것저것 준비한답시고 시간 늦춰 봤자 의미 없다. 이왕 마음먹은 거, 바로 움직이는 게 좋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적지(敵地)로 향하는 데에 있어 신중함은 필수다. 급하게 움직여서 좋을 건 하나 없단 말이다.
다만 서량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어차피 그쪽 인근엔 도피처가 많아.’
장강 이남과 다르게 이북에는 안가(安家)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중 그가 직접 만든 안가가 절반 이상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도 도주하는 데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도주할 생각도 없지만.
“소교주님.”
“음?”
“어쩐지, 기뻐 보이십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잖아.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의천맹이다. 기뻐하기 이전에 긴장을 하는 게 먼저일 텐데,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필아.”
“예, 소교주님.”
“제대로 달려 보자.”
다소 급하고, 꽤 들떠 보이지만 본분을 망각하지 않은 주인의 눈빛에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한 시진 후.
큼직한 마차 한 대가 신교의 성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