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철의 피 (2)
“총군사님께 알립니다. 현재 소교주님께서 성문을 통과하셨다고 합니다.”
“음, 알았네.”
“하면 이만.”
보고를 마치고 나가는 마인을 보던 호요성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무엇을요?”
“살왕기차 말입니다. 이번 파순제 때 선보이려고 꼭꼭 숨기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소연심이 피식 웃었다.
“총군사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클클, 딱 보면 알죠, 저는.”
“어차피 교주님께서도 큰 감흥은 없으실 거예요. 그런 데에 놀라시는 분도 아니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소교주님께 건네신 게 더 좋은 선택일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차를 홀짝이던 소연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화산파 장문인이 작정을 했더군요.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소교주님께 들으셨습니까?”
“대충은요.”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화산 장문인 홍산자는 옛날부터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무공은 고강하지만, 도인답지 않게 성품이 과격하지요.
자존심도 강할뿐더러 오만함이 하늘에 닿았다고 하더이다.”
“그런 사람을 장문인으로 뽑다니, 전대 장문인의 안목이 형편없었나 보네요.”
“어? 모르셨습니까?”
“뭘요?”
“전대 장문인이 물러난 건 홍산자 때문입니다.”
“네?!”
“성정이 과격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홍산자가 장문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력을 갖추는 데에 능하기 때문이지요.
빈말로도 정치에 능하단 평가는 받기 힘들지만, 의외로 그런 데에 능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골목대장 기질이 있다고 할까요?”
“이해가 쏙 되네요.”
“예. 그 세력으로 전대의 세력을 그대로 밀어 버렸답니다. 실제 칼부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요.”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인물이네요. 어지간한 배포로는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르기 힘들 텐데.”
“기사멸조의 죄. 정파 무림인들에겐 두고두고 욕먹을 중죄이지요. 하지만 정작 그런 게 가능했던 걸 보면 현재 정파 무림이 많이 썩긴 썩은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소연심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정보를 들을 때마다 한 번씩 의아해요.”
“어떤?”
“이런 생각을 가져선 안 되지만…… 교주님께서는 왜 본교의 대외 활동을 축소하셨을까요?”
“흐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어요. 화산 장문인이 그런 인물이라면, 그 밑은 안 봐도 뻔하죠.
나아가 검(劍)의 명가라는 화산파가 그럴 정도면, 구파일방은 물론 오대세가 전체가 썩을 대로 썩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그렇지요.”
“어떨 때는 답답하기도 해요. 교주님께서 나서기만 하신다면 그놈들을 단숨에 짓눌러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세력 간의 힘 싸움이라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소연심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의 힘과 현재 신교의 병력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강력하다. 충분히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된단 말이다.
호요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연 그럴까요?”
“네?”
“소 원주께서는 혹, 순서를 달리 보신 것은 아닐는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새끼 호랑이가 커서 밀림의 왕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집채만 한 이무기가 밀림에서 한 발 벗어난 게 먼저일까요?”
“……!!”
“굶주린 맹수들이 사라져 밀림이 썩어 들어가게 된 것이 과연 호랑이 덕분일까요? 밀림을 독지(毒地)로 만들려는 이무기의 기다림 덕분은 아닐까요?”
소연심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그 말씀은, 설마 교주님께서 일부러 대외 활동을 축소시키셨다는 뜻인가요?”
“교주님의 속내를 뉘라서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교주님께서 대외 활동을 축소하신 이후, 정파 무림이 썩어들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호요성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지금, 소교주님께서 본교를 나섰군요.”
“…….”
“앞으로 재미있어지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연심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로군요.”
“괜한 걱정은 아니지요. 본교를 향한 소 원주의 충정이 그만큼 깊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호요성이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었다.
나른한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한 흥분이었다.
“거칠 것 없이 달려 나가는 마군(魔君)의 행보라……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군사님.”
“무슨 일인가?”
“오공녀께서 총군사님을 뵈러 오셨답니다.”
호요성과 소연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굉장하구만.”
서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마차가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거야? 이거 마신궁에서 보낸 것보다 더하잖아?”
좌석의 편안함은 단연 최고였다. 승차감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산길을 타고 내려가는데도 마차 안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극히 미세했다.
떨림이 이 정도인데 소리는 오죽하겠는가. 고요하다는 표현을 써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방음이 철저했다.
여상린도 놀란 눈으로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장정 다섯이 누워도 넉넉할 크기에 푹신한 좌석까지…… 그냥 여기서 자도 되겠어요. 처음 봐요, 이런 마차는.”
“그러게나 말이야. 앵화도 처음이지?”
앵화는 거의 혼이 달아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좌석을 내려다보는데 동공이 흐려져 있었다.
서량이 혀를 찼다.
“저거 정신 나갔구만.”
“그럴 만도 해요.”
여상린이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네요. 마 호위도 같이 타면 좋았을 텐데.”
“뭐,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본인은 오히려 불편해할 거야. 특히 내가 몰겠다고 하면 팔짝 뛸걸?”
마동필은 손수 마부 노릇을 자처했다. 어차피 마부가 딸려 와 봐야 위험하니, 직접 마차를 끌겠다는 것이다.
마차를 몰아 본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초절정의 경지까지 오른 내가고수(內家高手)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차가 삼십 리를 주파한 후부터, 말을 모는 마동필의 실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여상린이 지긋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신기해요.”
“뭐가.”
“어떻게 마 호위처럼 진득하고 묵직한 분이 소교주님께 충성을 바치는 걸까요?”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 불만이냐?”
“그냥 신기해서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교주님과 마 호위의 성격은 극과 극이거든요.”
극과 극까지는 몰라도 절대 같은 부류는 아니다.
“같이 생사를 넘나들었거든.”
“전우애라는 건가요?”
“그런 것도 있고. 사실 동필이가 아랫사람이 아니었으면 이 관계는 절대 이뤄지지 않았을 거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소교주님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을 것 같거든요.”
“억지로라면 가능은 해.”
이를테면 혈고라든지 말이야.
서량이 창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를 떠올리자 기분이 팍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이대로 그냥 쭉 가나요?”
“그렇지? 식량은 넉넉해. 노숙을 대비해서 엄청 싸 왔거든.”
“그게 아니라요. 어디 들르지 않고 섬서로 직행할 거냔 뜻이에요.”
“그럼 어디 들르게?”
“……음, 그리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요. 이왕지사 중원 한복판으로 가는 건데 산천 좋은 곳 유람도 하고 그러면 오죽 좋을까 싶어서요.”
서량이 뜨악한 얼굴로 여상린을 바라보았다.
“놀러 가는 건 줄 알아?”
“그냥 그렇다고요.”
여상린이 볼을 부풀렸다.
하기야 그 머나먼 북해에서 중원까지 유람을 나올 정도면 여행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보통 신교에 인질로 잡혔다면 긴장해서 덜덜 떠는 게 정상이거늘, 여상린은 사흘 만에 신교 구석구석을 구경하겠다며 발을 동동 굴러 댔다.
어떤 의미로 굉장한 녀석이긴 해.
“되게 지루한 여행이 되겠네요.”
“지루하다…… 그럴 리가 있나.”
“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길잡이한테 정보 받아 가며 이동할 거니까, 딱히 지루하진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보면 안다.”
사흘 뒤, 여상린은 서량의 말이 무엇을 뜻했는지 깨달았다.
광동과 인접한 호남의 의장(宜章)에 접근했을 때, 마동필이 말을 세웠다.
서량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저 멀리 언덕, 유독 큰 나무에 서 있던 누군가가 마차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그렇군요.”
사내, 하오문의 소문주 공야치가 고개를 숙였다.
“신교의 작은 주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마 호위가 보낸 서신에 적혀 있었습니다.”
서량이 마동필을 힐끔거렸다. 마동필이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또 뭐야. 어차피 알게 될걸.”
공야치가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모로 도움을 드릴 방법을 찾는 와중이었는데, 이리 빨리 승자가 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서량이 손을 저었다.
“되지도 않는 얘기는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좋습니다.”
딱딱함은 여전하다. 마치 고죽림에서 마동필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의 마동필보다 훨씬 사무적이긴 했다.
“이곳에서 섬서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만, 저 마차를 보니 수로(水路)를 통하는 두 가지는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래도 한 번은 수로를 이용해야 합니다. 호남까지는 육로로만 갈 수 있어도 호북을 통과하려면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의 도움을 받는 게 좋습니다.”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와 장강삼십육채(長江三十六寨)는 무림에서 유명한 도적 떼였다.
단순히 도적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독자적으로 힘을 키운 그들의 저력은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대단했다.
산채와 수채의 병력을 모두 모으면, 어지간한 대문파를 상회하는 전력이 나올 정도였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굳이?”
“양에 대해 잘 아는 건 양치기보다 늑대입니다. 특히 장강은 그들의 주 무대입니다. 어떠한 쾌속선보다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빠르고 확실하다면 그걸로 됐어. 다만, 그놈들이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지?”
“도적 떼가 수백 년 동안 세를 이어 가기 위해선 여러 가지 덕목이 필요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계약의 철저한 이행이지요.”
공야치의 눈이 반짝였다.
“장담컨대, 그들은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아.”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서 터질 수 있습니다.”
“음?”
“바로 육로입니다. 강서 북동부에서 서쪽으로, 철혈성의 병력이 은밀히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순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천하의 공야치도 서량의 안광을 마주하긴 힘들었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는 공야치의 안색이 조금은 창백해졌다.
“철혈성 어디?”
“자세한 정보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 하나 신기(神技)에 이른 이동 속도,
이동 중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 치밀함으로 보아 철혈성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묵풍대(默風隊)로 추정됩니다.”
“묵풍대라…… 그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묵풍대는 기동성을 살린 철혈성의 주력 부대로 평야보다는 산악 지대, 혹은 시가전(市街戰)에 특화되었다는 부대다.
총 삼백 명으로 이뤄진 묵풍대의 전력은 광마대와 비교해도 큰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묵풍대 삼백 인원 모두가 움직인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로군.”
“예.”
“예상하는 부분이 있나?”
잠시 고심하던 공야치가 말했다.
“이건 철저히 제 생각입니다.”
“그래.”
“아마 철혈성주의 첩을 데리러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철혈성주의 첩?”
“그렇습니다. 철혈성주는 삼 년 전, 아무도 모르게 첩을 들였습니다.
호남 악록산(岳麓山) 인근의 문파인 청사방(靑蛇房)의 여식인데, 그 미태가 곱기로 유명했습니다.”
“호오?”
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본가에 볼일이 있어 간 건가?”
“그렇습니다.”
“본가로 보낼 때 나름 호위를 딸려서 보냈을 거 아냐? 그런데 묵풍대까지?”
“그걸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철혈성주의 성격상, 요즘 같은 불안정한 시국에 첩 때문에 묵풍대만 한 전력을 빼는 것도 의아하고요.”
“흐음, 흥미로운 정보로군.”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들만 조심하면 된다는 거지?”
“일단은 그렇습니다. 다만 호북과 호남의 공기가 심상치 않으니, 이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좋아. 다음은 어디서 보면 되지?”
“먼저 호북으로 가 있겠습니다.”
“빨리 가는 샛길이 있나 보군. 우리도 그 길로 안내해 주면 안 되나?”
“죄송합니다.”
“하오문의 기밀이란 거로군. 알았네.”
“그럼.”
고개를 한 번 숙인 공야치가 기민한 몸놀림으로 물러났다. 느껴지는 무력은 어중간한데 신법만큼은 초절정고수만큼이나 빨랐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묵풍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