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철의 피 (3)
“날이 좋네요.”
“…….”
“그렇죠?”
“…….”
“쳇, 여전히 묵묵하시군요.”
표정을 구기던 여인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러자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아! 여기에 작은 성 하나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성주님이라면 날 위해 그 정도 성의는 보여 주시겠지?”
“소 부인.”
“네?”
“이만 들어가시지요.”
소 부인이라 불린 여인, 소호향(蘇狐香)이 고개를 저었다.
“나온 지 일각도 안 됐는걸요.”
“그래도 들어가셔야 합니다. 바깥 공기는 몸에 안 좋습니다.”
“헤에, 지금 제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
“괜찮아요. 너무 안에만 있는 게 오히려 몸에 안 좋은 것 같아요.”
중년의 호위무사, 차위(次衛)가 고개를 저었다.
“의원이 말하길, 조금의 찬 바람도 부인께는 좋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슬슬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으니, 바깥출입은 되도록 금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원하는데도요?”
“그렇습니다.”
소호향의 눈빛이 순식간에 표독스러워졌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차 무사는 날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잊은 것 같은데, 저는 성주님의 첩이에요. 말이 첩이지 실상은 이부인(二婦人)이지요.”
“…….”
“내 걱정을 해 주는 것까진 상관 않겠지만, 다소 주제넘은 어조는 조심해 줬으면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소호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저잣거리나 한번 가 볼까요? 양민들끼리 북적대는 공기도 오랜만에 맡아 보고…….”
“거처로 들어가시지요.”
소호향이 얼굴을 구겼다. 웃을 때는 그렇게 아름답더니, 표정이 일그러지자 놀랍도록 섬뜩해 보였다.
“방금까지 내가 한 말, 허투루 들은 모양이군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차 호위.”
“이곳은 장사(長沙)입니다. 성도(省都)라 유동 인구가 많지요. 혹시 모를 적들의 표적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거잖아.”
소호향의 말투가 바뀌었다.
“날 지키는 게 당신 일 아니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호위무사들도 날 지켜 주고 있어.”
“…….”
“적의 표적이 되면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면 돼. 내 말이 틀려?”
“맞습니다만, 굳이…….”
“그렇게 자신이 없어?”
차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호위무사들의 능력이 출중한 것과 적에게 표적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소호향에게 그런 말을 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정히 그러고 싶으시면 사흘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흘 뒤엔 묵풍대가 도착하면…….”
“나는 지금 둘러보고 싶다.”
“…….”
“잔말 말고 나나 똑바로 지켜. 당신 할 일이나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 정도면 생떼를 쓰는 거나 다름없다.
가만히 소호향을 보던 차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잣거리로 가시지요.”
소호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득의양양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가죠.”
웃으며 저잣거리로 향하는 두 사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두두두두.
저 멀리서 큼직한 마차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머.”
소호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단언컨대 저처럼 크고 아름다운 마차를 본 적이 없었다.
치장이 많이 된 마차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차 외벽 곳곳에 고풍스러운 세공이 되어 있었고, 특히나 마차를 끄는 여섯 마리의 말들의 풍채가 대단했다.
그냥 보면 ‘큰 마차구나.’ 싶겠지만, 아는 사람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명품으로 보이는 마차였다.
멋들어진 사륜(四輪)의 육두마차는 소호향에게 황홀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굉장해. 성에서도 저런 마차는 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 그녀가 타는 마차 역시 사륜의 육두마차였다. 그러나 저보다 크기가 작았으며, 말의 품종 역시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마차 자체의 치장은 훨씬 화려했지만, 저 마차를 보니 쓸데없이 장식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마차가 거대한 주루 앞에 멈추었다.
마부로 보이는 삼십 대 사내가 문지기와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마차가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소호향의 눈빛이 묘해졌다.
“어지간히 풍족하지 않고서는 장만루(長晩樓)에 들어가기 힘들 텐데.”
장만루는 장사 최고의 주루였다. 하룻밤 숙식에만 은자 백 냥이 넘어가니, 가히 사치의 극치라 할 만했다.
“저기로 가죠.”
소호향의 눈에 진한 흥미가 일었다.
* * *
“으, 시원해라.”
한 시진 내내 수욕을 한 서량이 머리를 말리며 후원으로 나왔다. 이미 수욕을 마친 여상린과 앵화, 그리고 마동필이 차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상린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저희보다 오래 씻어요? 결벽증이라도 있으세요?”
“씻다가 졸았다.”
“말도 안 돼.”
여상린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열흘이 넘도록 노숙만 하다가 장사 최고의 주루에 들어오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서량이 앵화를 보았다.
“피곤하지?”
“아니에요, 소교…….”
“커험.”
“헉!”
앵화가 자신의 입을 찰싹찰싹 때리더니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호위장……님.”
“그래도 간만에 쉬는 거니까 다들 맛난 거 먹고 푹 쉬어.”
“네에.”
앵화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의 평생을 신교에서 지내 온 그녀였다. 항상 누군가를 위해 움직였지, 대접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후원이 엄청 아름다워요.”
“이래 봬도 장사 최고의 주루라고 하니까. 뭐, 미치도록 비싼 것만 빼면 이만한 데도 없어.”
“습기도 덜하고, 확실히 신교보다 쌀쌀하네요.”
“여기도 꽤 습하긴 해. 비도 제법 많이 오는 지역이지. 살기 나쁘지는 않은 동네야.”
여상린이 신기하다는 듯 서량을 보았다.
“잘 아시네요? 호남에 와 본 적 있으세요?”
오백오십 번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들은풍월이야.”
잠시 후, 점소이 여럿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빈약한 육포 쪼가리 먹느라 고생들 많았어. 오늘은 목구멍에 기름칠 좀 해 보자.”
“넵!”
네 사람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젓가락을 들었다.
이내 앵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이 담백한데도 맛이 되게 깊어요! 엄청 맛있어요! 소…… 아니, 호위장님!”
“그렇지? 특히 쌀과 생선이 좋은 동네야.”
“네!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도 안 와요.”
살림의 영역에서 초절정고수라 할 만한 앵화였다. 광동, 광서 지역과는 전혀 다른 요리들을 접하니 눈이 초롱초롱해질 만도 했다.
반면 여상린은 얼굴을 구겼다.
“맛은 있는데, 그래도 앵화가 해 준 게 더 좋네요. 음식들이 뭔가 천편일률적이랄까.”
“당연한 거 아니냐. 너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든 음식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그렇긴 하지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먹기는 참 많이 먹는다. 특유의 식성이 어디 가진 않은 것이다.
한참 음식을 씹어 대던 여상린이 물었다.
“그나저나 호위장님, 우리 언제 출발해요?”
“내일.”
“으엑? 그렇게 빨리요?”
“하루 즐겼으면 충분하지 뭘 그래.”
“인간미 없어요!”
“시끄러. 도움이 되겠다면서? 그럼 칭얼대지 말고 끝까지 도움이 되어 주길 바란다.”
“으, 뻔뻔하셔라.”
마동필이 물었다.
“호위장님, 하면 곧바로 북쪽으로 향하실 겁니까?”
“그래야지. 악록산이야 대충 통과하긴 했지만 시간 지체해서 좋을 거 있나. 혹시라도 묵풍대랑 마주치면 골치 아파져.”
서량이야 별문제가 안 되지만, 자칫 마동필의 마기를 읽을 수 있는 고수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마동필 역시 호법이라 기를 감추는 데에 도가 텄지만, 마기 자체가 워낙에 튀는 기운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묵풍대와 조우하게 되면, 그들은 십중팔구 마동필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다.
‘하긴, 그런 건 고치라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지.’
기(氣)를 읽지 않고도 고수를 알아보는 방법은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자세였다.
마동필의 자세는 무인으로서 완벽에 가깝다. 내가 심법은 물론 외가 무공까지, 심신 모두가 극도로 단련되었으며 나아가 실전 경험까지 풍부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대단한 존재감이 고수들의 흥미를 끌 수 있다.
자세라는 게 느슨하게 만든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극마에 이른 서량조차 끊임없이 의식하지 않으면 자세를 느슨히 하기 어려웠다.
마동필이야 말할 것도 없다. 특히나 십수 년간 호위 대상을 지켜 온 마동필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뭐, 걸리면 다 작살내고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속 편한 생각이다? 전혀.
어쭙잖게 부인해서 마도 무림의 격을 떨어트리느니, 차라리 모조리 박살 내고 유유히 갈 길을 가는 게 낫다. 굳이 천마신교의 품격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서량의 성격이 그러했다.
조심은 하지만 걸려도 큰 문제는 없다. 목표는 명확하지만, 성격까지 죽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서량의 생각이었다.
“쩝쩝, 호위장님.”
“엉?”
“더 시켜도 돼요?”
“어…… 상관은 없는데, 벌써 다 먹었냐?”
“그럼요.”
“대체 네 내장 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거냐?”
“저도 가끔 궁금해요.”
“근데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며?”
“시켜요, 말아요?”
서량은 혀를 내둘렀다.
“시켜라, 시켜. 너도 다른 의미론 괴물이다.”
근육량도 많고 활동량도 많은 서량보다 배는 더 많이 먹는데도 여상린의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빙궁의 무공은 음식물을 소화하는 데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전에, 저 초월적인 섭취량 자체가 정상이 아니지만.
“린아.”
“네, 호위장님.”
“나중에 나랑 육장(肉掌) 수련이나 하자.”
음식을 입 안 가득 몰아넣고 우물대던 여상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리따운 얼굴에 순진무구한 표정,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이 보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자태였건만 서량의 눈빛은 냉정하기만 했다.
“왜요?”
“네 무공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보고 싶어서. 겸사겸사 서로 배우는 게 있으면 좋잖아?”
“아하? 좋죠.”
……그래도 고수가 상대해 준다는데 고맙단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툴툴대던 서량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제법 배가 찼던 것이다.
“여유롭구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하오문도에게 총 세 번 정보를 받았다. 현재 호남의 정황과 묵풍대의 이동 경로, 호북의 분위기 등을 듣고 판단하면서 움직였던 것이다.
중간중간 쉬면서 왔지만, 머리까지 쉬진 못했다. 그랬기에 지금의 휴식이 몹시 달콤했다.
‘저녁은 뭐 먹지? 술이라도 한잔할까?’
나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량, 입에다가 음식을 쓸어 넣는 여상린, 생선 요리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앵화.
그리고 마동필.
“호위장님.”
“그래.”
스으으윽.
마동필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기를 발산하진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전투에 임하는 무사의 그것이다. 투기(鬪氣)마저 억눌렀기에 공기가 달라지진 않았으나,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을 만큼의 긴장은 놓지 않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중원 한복판. 주루 하나 들어왔다고 이만한 고수가 등장하는군. 게다가 일류의 호위가 오십 명이나 은신 중이라…… 상당한데.’
잠시 후, 누군가가 후원의 문을 두드렸다.
“저, 죄송합니다만.”
문밖에서 주눅 든 점소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분께서 손님들을 뵙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동필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마동필이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 중이니 내일 찾아오시라고…….”
그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두 남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