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철의 피 (4)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소호향은 당당했다.
“아, 식사 중이셨군요?”
평온한 어조였다.
한참 음식을 씹던 여상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신성한 식사 시간에 방해받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녀였다.
마동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에 약간은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량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이 자리를 유연하게 풀고자 마음먹었다.
그가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만, 수일간의 여행으로 일행의 노독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저희의 시간을 빼앗지 말아 주시길.”
이 정도면 충분함을 넘어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린 격이다.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겐 누구도 이런 예의를 차리기 힘들다.
소호향이 담담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저도 이게 무례라는 건 알지만, 호기심이 동해서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말았어요. 이렇게 사과드려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목소리에 미안한 감정이 실리지도 않았거니와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마동필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호기심이라니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사륜의 육두마차, 귀하들이 타고 온 마차가 맞지요?”
“그렇……습니다만.”
소호향이 활짝 웃었다.
“역시 그렇군요.”
마동필이 힐끔 여상린과 서량을 돌아보았다.
여상린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서량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앵화만이 잔뜩 긴장한 채 소호향을 보고 있었다.
“굉장한 마차였어요. 언뜻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생김새지만 은은한 세공 하며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깔까지. 가히 명품이라 부를 만하더군요.”
“아…… 예.”
“본디 명품이란 그런 것이죠. 화려한 것만이 좋은 게 아니에요. 드러나지 않는 품격, 귀하들의 마차가 바로 그런 것이에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마차의 주인이냐고 묻더니만, 느닷없이 명품 운운하며 칭찬을 마구 해 댄다.
소호향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한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명품이라도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 손에선 해진 천 쪼가리보다 못한 법이죠.
결국 명품도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거라 생각해요. 보아하니 말의 품종도 굉장하던데요?”
“……예에.”
“말도 그렇고 차체도 그렇고,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임이 분명해요.”
마동필은 내심 긴장했다.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다는 말이 그를 자극한 것이다.
“정성 들여 만든 마차지만 실력 좋은 장인이라면 누구나…….”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소호향의 눈이 빛났다. 제 생각이 맞았다는 듯, 서량 일행을 바라보는 눈빛에 조금은 한심하면서도 안쓰럽다는 기색이 어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요. 귀하들은 그 마차의 진짜 가치를 모르고 있어요.”
마동필은 당황했다. 대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여상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아가씨?”
“아…….”
한창 열을 쏟다가 여상린을 본 소호향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세상에 잘생긴 사람도 많고 예쁜 여자도 많다지만, 여상린의 미모는 그 중에도 특히 대단한 면이 있었다.
유독 희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물론이요, 고혹적인 눈매와 붉은 입술을 보면 누구라도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소호향의 뒤를 따른 차위조차도 여상린의 미모에 깜짝 놀랐다.
“저기요.”
“……네?”
“묻잖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소호향은 그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예쁜 사람은 있어도, 자신만큼 매력적인 여인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선녀가 튀어나와 버렸다. 정신을 못 차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소호향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그 마차, 저에게 파실래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말이다. 워낙 황당해서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뻐끔거리고야 말았다.
소호향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가격은 원하시는 대로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는 대로 준다고요?”
“물론이죠.”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언행은 다소 짓궂고 사내 같은 면이 있지만, 워낙 출중한 미모 탓에 그마저도 색다른 매력으로 보인다.
“억만금을 준다면야 팔고는 싶지만…….”
여상린이 힐끔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여상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해요. 저희가 갈 길이 멀어서 저걸 팔 순 없겠네요.”
“새 마차도 드리죠.”
“…….”
“저 마차보다 훨씬 편안한 마차를 드릴게요.”
그건 불가능할걸……?
저도 모르게 그리 대답할 뻔했다. 여상린이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죄송해요. 저희 마차는 팔지 않을 것이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소호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진심으로 제안하는 거예요.”
“저도 진심인데요? 안 팔아요, 저희 마차는.”
“당장 금자를…….”
“저기요.”
여상린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식탁에는 아직 음식이 한가득 남아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안 팔아요. 안 판다구요. 금자 백만 냥을 주든, 천만 냥을 주든 절대로 안 팔아요. 됐어요?”
“…….”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죄송한 기색도 없이 마차를 팔라니, 이게 무슨 경우에요? 당장 나가 주세요.”
화가 단단히 난 기색이었다.
소호향의 눈이 샐쭉해졌다.
“정말 안 판다고요? 돈을 준다는데도?”
마땅히 느껴야 할 미안함보다 안 팔겠다는 말에 더 신경을 쓴다. 여상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돈은 저희도 충분해요.”
“오호, 그래요?”
순간 차위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다급하게 소호향에게 전음을 날렸다.
[부인, 안 됩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려던 소호향이 다시 입을 닫았다.
자신이 철혈성주의 첩이란 걸 밝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철혈성 소속이라는 것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나 싶었다.
필시 저 아름다운 얼굴이 공포로 물들리라.
하지만 차위의 전음을 들은 그녀는 참았다.
삼 년간의 철혈성 생활로 사치와 무례가 밸 대로 뱄지만, 적어도 철혈성의 위명을 함부로 뱉어선 안 된다는 사실까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여상린이 한숨을 쉬었다.
“됐죠? 이만 나가 주세요.”
“…….”
“나가시라고요.”
소호향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건 뭐 잡상인 취급이 따로 없다. 당장이라도 자신이 철혈성 소속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차위가 그녀의 가까이에 붙었다.
“부인.”
소호향이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상대를 잘못 만난 게 실수라면 실수다.
“좋아요.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차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안도한 것은 소호향이 더 사고를 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마동필 때문이었다.
‘굉장한 고수다.’
차위가 마동필을 힐끔거렸다.
어색한 얼굴로 서 있지만, 은연중 드러나는 자세에서 고수의 풍모가 묻어 나왔다. 기(氣)를 느끼려 해도 완벽하게 갈무리되어 있어 실력을 추측기 어려웠다.
‘최소한 나에 필적할 고수, 최악의 경우 나보다 몇 수는 더 강할 수도 있다.’
얼핏 보아하니 삼십 대 중반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굉장한 무공을 쌓았다.
물론 저런 고수라도 단독으로 철혈성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건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지금이었다. 혹시라도 상대가 철혈성에 반감이 있는 고수라면 부인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막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런 사태에 직면할 필요는 없다.
“차 호위, 이만 가요.”
“예.”
그때, 여상린이 중얼거렸다.
“휴, 이제 맘 편히 밥 좀 먹겠네.”
소호향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제야 맘 편히 밥을 먹겠단다. 상대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투, 자신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 여자다.
금이 갔던 자존심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는 게 느껴진다.
그저 그런 중소 문파의 자식으로 태어나 주변 문파들의 멸시를 받다가, 철혈성주의 첩으로 들어가 가문을 일으켜 세운 그녀였다.
자신감은 자만심으로, 자존심은 아집으로 변하기 충분한 환경이다. 지난 삼 년의 세월은 이십 년 동안 형성된 인격을 뒤바꾸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부르르르.
소호향의 주먹이 떨렸다.
차위가 다시 한번 전음을 날리려 할 때였다.
“제가 큰 실례를 했군요. 아리따운 분의 식사를 방해했어요.”
여상린이 소호향을 힐끔거렸다.
어느새 몸을 돌린 소호향이 환히 웃고 있었다.
“사죄의 의미로 이곳에서 가장 비싼 음식을 대접해 드리죠.”
“그럴 필요 없는데요?”
“아뇨, 받아 주세요.”
소호향의 미소가 더더욱 진해졌다.
“철혈성의 안주인 될 사람의 대접을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언제 받아 보겠어요?”
순간 여상린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마동필, 앵화는 물론 서량조차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놀란 것은 차위였다. 설마 싶었더니 정말로 이런 사고를 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철혈성의 안주인?”
“네. 제 본가가 이 인근에 있거든요.”
여상린이 입을 쩍 벌렸다.
소호향의 얼굴에 작은 쾌감이 드리워졌다. 여상린의 표정 변화는 그녀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여상린이 놀란 이유는 소호향의 정체 때문이 아니었다.
“워어…… 철혈성주 나이가 환갑은 넘었다고 들었는데…… 완전 도둑놈이 따로 없네.”
충격이 반전된다. 소호향의 얼굴에 경악이, 차위의 눈에 뚜렷한 불쾌감이 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여상린은 아차 했다.
“아, 죄송해요. 그냥 저도 모르게…… 방금 발언은 잊어 주세요.”
서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반면 의복에 가려진 마동필의 근육은 꽉 조여졌다. 언제라도 일격을 내칠 수 있도록 무의식적으로 준비한 것이다.
소호향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너, 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철혈성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상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죄송하다니까요.”
“이…… 이!”
“댁도 무례를 저질렀고 저도 말실수를 했네요. 그러니 이걸로 대충 마무리하죠. 괜찮죠?”
전혀 괜찮지 않다.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게 무림인이란 족속이었다. 설령 소호향은 그럴 수 있어도, 차위는 참아선 안 되었다.
그는 철혈성의 무사이기 때문이다.
사박.
차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늘해진 눈매에서 불꽃 같은 분노가 새어 나왔다.
“주모(主母)의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확실히 이쪽에서 실례를 범했소.”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스릉.
차위의 엄지가 칼받이를 들어 올렸다. 시린 검광 위, 싸늘한 예기가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감히 성주님을 모욕한 죄는 그냥 넘길 수 없겠소.”
차라리 소호향을 욕했다면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 같은 성주님에게 도둑놈이라니?
여상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좆 된 건가.”
“아니.”
서량이 일어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이 방정이긴 했지만 좆 된 건 아니지.”
“에헤헤. 그렇죠?”
“웃지 마라, 사고뭉치야.”
“옙.”
이놈은 또 뭔가 싶어 서량을 보던 차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놈은 언제?’
두 사람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존재감을 한계까지 지운 그였다. 자연 두 사람은 서량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도를 드러내지 않아도 서량의 외양은 굉장히 눈에 띄는 편이었다.
육 척 네 치에 육박하는 키에 떡 벌어진 골격은 누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상향의 육신이었다.
“아예 마주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왕 마주쳤으니 실몽당이 하나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알잖아? 나 사고 잘 치는 거.”
서량이 히죽 웃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거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