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염라(閻羅)의 탄생 (1)
실몽당이를 만들겠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차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성주님을 모욕한…….”
“동필.”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예, 호위장님.”
서량이 턱으로 문 너머를 가리켰다.
“다 잡아.”
파아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동필이 움직였다. 마공을 끌어 올리지 않았는데도 뛰쳐나가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삼 할의 마기로 육체 능력을 극대화하고, 칠 할의 마기로 흘러 나가는 기운을 막는다.
대담하고도 섬세한 기공 운용이었다. 발산, 확장의 특성을 가진 마기를 이리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마인은 온 천하에 드물 것이다.
차위의 검이 뽑혔다.
차아앙!
일검에 마동필을 공격하려던 차위의 검이 일순간 우뚝 멈추었다.
파아앙!
마동필이 차위와 소호향을 그대로 지나쳤다.
차위의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이럴 수가!’
그가 서량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가 넘쳤다.
‘허공섭물?!’
검격(劍擊)으로 마동필의 질주를 막으려 했지만,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검로(劍路)를 붙들었다.
초절정의 영역을 넘보는 고수의 내공으로도 허공섭물의 한 수를 뿌리치지 못한다. 서량의 어기(御氣)가 극한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아니, 애초에 허공섭물을 이리 쉽게 구현한다는 것 자체가 차위에겐 신세계였다.
“경쾌한 발검, 삼점(三點)의 퇴로를 상정한 일직선의 출수라?”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삼환귀검(三煥鬼劍)한테 제자가 있었나?”
차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사부님을……?”
“역시 그랬군. 파지법부터 검보(劍步)까지 그 미친 늙은이를 빼다 박았어.”
스승에게 미친 늙은이란다.
제자라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소리고, 참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차위는 섣불리 살기를 터트릴 수 없었다.
‘강하다!’
눈을 마주하자 온몸이 조각난 채로 늪에 가라앉는 것 같다.
문밖으로 뛰어나간 장년 사내보다 훨씬 강한 자다. 적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차위가 외쳤다.
“이부인! 어서 도망치십시오!”
“나, 나는…….”
“어서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
스륵.
한 걸음 내디뎠다 싶은데 어느새 소호향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신기의 보법이었다. 언제, 어떻게 움직인 건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서량이 소호향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풀썩.
소호향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어깨를 타고 흐른 기가 단숨에 그녀의 혼혈을 짚은 것이다.
“이부인!!”
차위가 서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분노와 초조함으로 물든 검은 투로가 다소 흐트러졌을지언정,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카앙!
‘헉!’
맨손으로 검을 붙든 서량이 눈을 빛냈다.
“제법이야.”
치이이이익!
검을 쥔 손에서 희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삼환귀검의 양강공력이 서량의 진기로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제법이긴 한데, 연마를 게을리했군.”
“이익!”
서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아앙!
검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차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신병이기는 아니더라도 흔치 않은 보검이 분명하거늘 이걸 맨손으로 부러트리다니?
퍼어억!
“꺼어어…….”
외마디 신음과 함께 차위가 풀썩 쓰러졌다. 내공을 담지 않은 발길질로도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서량의 각법을, 그는 버틸 수가 없었다.
지풍으로 차위의 내공까지 봉인해 둔 서량이 문밖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 하지만 서량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번개처럼 움직이는 마동필이 은신한 호위무사들을 무서운 속도로 기절시키는 것이.
‘한층 좋아졌어.’
마공을 개방하지 않고 저리 빨리 움직이긴 힘들다. 기(氣)의 수발이 자유자재요, 힘의 낭비는 하나도 없다. 인상적인 암격(暗擊)이었다.
잠시 후, 마동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정면 승부였다면 몰라도, 오십 명이나 되는 호위들을 들키지 않고 기절시키는 건 그로서도 상당한 노동이었던 것이다.
“끝났습니다, 공자님.”
“고생했다.”
여상린이 다가오며 한숨을 쉬었다.
“기어이 이렇게 되는군요.”
“어차피 물러날 생각도 없어 보였잖아. 어설프게 놓치느니 그냥 다 잡아 버리는 게 나아.”
“그렇긴 하지만요.”
“그러게 방정맞게 철혈성주는 왜 언급했어?”
“쩝, 할 말 없습니다.”
머쓱하다는 듯 입맛을 다신 여상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게요? 저 여자가 성주의 첩이라잖아요. 함부로 해쳐선 안 될 텐데.”
“무서운 소리 하고 있네. 해치긴 누굴 해쳐? 절대 안 될 말이지, 암.”
“그럼요?”
서량이 마동필에게 말했다.
“호위들은 언제쯤 깰 것 같으냐?”
“짧으면 두 시진, 길면 세 시진 정도입니다.”
“얼추 반나절 동안은 기절해 있을 거라는 거군.”
“예. 그 이상 진기를 주입했다간 마기가 새어 나왔을 듯하여.”
“잘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 지면 이동하려 했는데 안 되겠다. 다들 짐 싸.”
여상린과 앵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출발하시게요?”
“그럼 호위들을 괜히 기절시켰겠어?”
“으으, 오늘은 편안히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다음에 들를 곳에서 사흘 정도 쉬자고. 곧 묵풍대도 올 테니까 빨랑빨랑 움직이자.”
“예이.”
몇 겹의 천으로 기절한 두 사람을 돌돌 만 일행이 순식간에 후원을 빠져나와 곧장 마장으로 향했다.
마장 관리인에게 돈을 쥐여 준 일행이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서량이 외쳤다.
“동필아! 호북 적벽(赤壁)까지 쭉 달려!”
“예!”
히히힝!
여섯 마리 명마(名馬)가 이끄는 사륜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흘 후.
퍼억!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호위대장이 쓰러졌다. 기절을 해도 모자라지 않지만, 그는 끝끝내 다시 일어나 뒷짐을 졌다.
“병신 같은 자식! 대체 어떻게 하면 두 분을 놓칠 수 있단 말이냐! 너희가 진정 본성 호위 부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노호성을 지르는 묵풍대 부조장 광성의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들끓는 분노의 이면에는 공포심도 엿보였다.
이 작전에 투입된 부대의 부대장이라면, 그 역시 성주의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할 사람 중 하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흔적도 끊겼다니?! 후원에 머물던 놈들이 맞다면 필경 마차를 타고 갔을 터! 그리 큰 마차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너희는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
차아앙!
칼을 뽑아 든 광성.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살기에 호위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막았다.
“그만.”
광성이 씩씩대며 칼을 내렸다. 거역할 수 없는 상관의 명령이었다.
그들 사이로 걸어나온 사람은 묵풍대주 문황(文煌)이었다.
“모두가 반나절이 넘도록 기절해 있었다고?”
“그, 그렇습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단 말이지.”
“……예.”
문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가 개입한 것이로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살수가 개입했다면 모조리 죽었을 것이요, 수면독(睡眠毒)을 뿌렸다면 주루 일대의 사람들이 몽땅 잠들었을 것이다.
“제삼(第三) 호위대 오십 전원을 기절시킬 정도면 최소한 초절정고수가 개입했다고 봐야 한다.”
광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초절정고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이다.
같은 초절정고수라도 얼마나 연마되었는지에 따라 극심한 편차가 있지만, 애초에 그만한 경지에 올라서는 것 자체가 대단한 위업이었다.
“차 호위라고 놀고만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초절정에 근접한 실력자야.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지. 흉수의 무공이 화경에 가까울 만큼 대단하거나, 그만한 고수가 둘 이상이거나.”
문황이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묵풍대원 하나가 공손하게 종이를 건넸다. 이곳 주루 점소이들의 증언을 모아 놓은 종이였다.
“총원 넷. 남자 둘에 여자 둘. 남성들의 체격은 크고 탄탄했고 여성들의 체격은 호리호리했다.
최상급의 마차를 타고 왔지만 의복은 남루했다. 병장기는 남자 중 하나만 소유하고 있었다. 여성 한 명의 외모가 무척이나 빼어났다.”
문황의 눈이 빛났다.
“이부인께서 먼저 후원으로 향했다?”
그 말인즉, 계획된 납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황은 최상급의 마차라는 말에 주목했다.
‘이부인의 성격이라면…….’
가난한 문파의 자식으로 태어나, 삼 년 동안 온갖 사치를 누려 본 그녀였다.
철도 없는 사람이 사치스러운 생활에 물들었으니, 좋은 마차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물론 추측일 뿐이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직접 보지 못한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다.
“부대주.”
“예, 대주님.”
“성에 연락해라. 이부인께서 실종되었다고.”
광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소호향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리면, 설령 그분을 다시 찾는다고 해도 성주님은 자신들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주님의 분노가 무섭다고 보고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부인을 찾으면 그나마 경질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면 그들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본성과 연합을 맺은 문파 중 청사방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문파가 어디냐?”
“신권문(神拳門)입니다.”
신권문은 호남에서 내로라하는 권법가들이 득실거리기로 유명한 문파였다. 당장 신권문주의 무공만 해도 광성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문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권문주에게 지급으로 연통을 보내라. 연이 있는 문파들을 섭외, 장사 남쪽을 전부 훑어보라고. 이 종이에 적힌 내용도 동봉하도록.”
“알겠습니다.”
문황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우리는 북쪽으로 간다.”
점소이를 시작으로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대부분을 심문했다. 그들 모두의 공통적인 발언이, 그 큰 마차가 남쪽에서 올라왔다고 하였다.
동서(東西)로 갈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장사에 들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지 모를 납치범들은 북쪽으로 향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 또한 가능성일 뿐이었지만, 설령 틀려도 길 하나를 잡고 가는 것이 부대를 분산하는 것보다 낫다.
“호남과 호북 모든 지부에 연락해라. 최상급의 사륜, 그것도 육두마차를 찾아 정보를 보내라고. 성주님과 관련된 일인 이상, 초비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전해라.”
“예!”
화르르륵!
문황의 손에 들린 종이가 타올라 사라졌다. 화경의 고수들의 전유물, 삼매진화(三昧眞火)까진 아니지만 절정고수는 흉내 낼 수 없는 신기의 내공 운용이었다.
철혈성의 전투 부대 중 최고는 묵풍대가 아니다.
하지만 부대장들 중에서 최고를 고르라면 문황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성의 간부보다 현역이 더 좋아서 남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보름 안에 무조건 이부인을 찾는다. 찾지 못하면 나를 포함, 우리 부대 모두가 죽는다.”
* * *
열흘 뒤 적벽.
오랜만에 만난 공야치는 서량을 웃는 얼굴로 맞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둘을 납치했다는 겁니까?”
“엉.”
공야치의 얼굴이 굳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전(前) 삼공자이자 현(現) 소교주는 반쯤 미친 작자가 분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무엇입니까?”
“하오문의 이름으로 보장된 정보를 화산 장문인에게 전해 줘. 철혈성주가 아끼는 첩이 우리 손에 있다고.”
서량이 히죽 웃었다.
“이 멋진 선물을 받아 가고 싶다면 호북 의창(宜昌)으로 오라고 전해 줘.”
“화산 장문인과 직접 만나 거래하실 생각이십니까?”
“응? 뭐, 만나는 거야 만나는 거지만…… 글쎄? 거래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어.”
“하면 왜……?”
“작은 미끼로 큰 미끼를 사로잡으려 그런다.”
공야치의 입이 기어이 쩍 벌어졌다.
서량의 얼굴에 쾌감이 일었다.
“뭣 하러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재 보고 있냐? 그냥 화산 장문인 잡아다가 걸레가 될 때까지 써먹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