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염라(閻羅)의 탄생 (2)
적벽의 수역은 엄청난 너비를 자랑한다.
그래서일까. 사방 어디를 가도 물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워낙 압도적인 너비라 그런지, 비릿한 물 냄새가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신비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바다처럼 철썩거리는 강물을 보며 정좌한 채 눈을 감은 서량의 모습은 그런대로 평온해 보였다.
운기조식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의 뒤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상린이었다.
서량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어쩐 일로 왔어?”
“그냥 물 구경이나 하고 싶어서요.”
“북해의 해상 경관도 굉장하다고 들었는데.”
“물론이죠. 하지만 사방이 다 새하얗기만 한걸요. 그 나름의 압도적인 면이 있지만, 자주 보다 보면 질려요. 가만히 서 있으면 좀 무섭기도 하고.”
“그럴 만도 하겠어.”
“중원은 달라요. 정말 여행하는 맛이 있단 말이죠.”
“응, 그렇군.”
여상린이 힐끔 서량을 내려다보았다. 서량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고 계세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어.”
“수로채에서는 언제 온대요?”
“글쎄다? 난 물길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공야치 말을 들어 보면 최소한 반나절 안에는 도착하겠지.”
“그렇군요.”
다시 강가를 바라보던 여상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해.”
“어쩌려고 그러세요?”
“뭘 어째?”
“화산 장문인을 잡아다가 뭐, 걸레가 될 때까지 써먹어 보시겠다면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지 뭔 말이긴.”
“진짜 화산 장문인을 인질로 삼겠다고요?”
“안 될 건 또 뭐야.”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화산파는 그 유명한 구대문파 중 하나에요. 특히 검학(劍學)으로는 무당(武當)과 함께 수위를 다툰다고 하죠.”
“안다.”
“말하자면 정파 무림 중 최고라는 구파일방에서도 특별하다는 거예요.”
“그것도 알아.”
“화산파 장문인을 인질로 삼는 것은 저나 철혈성주의 첩을 인질로 잡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예요.”
서량이 눈을 떴다.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가만히 서량을 보던 여상린이 그의 옆에 풀썩 앉았다.
“생각이 있으신 거죠?”
“그럼 아무 생각도 없이 그만한 거물을 건드릴까.”
“…….”
“물론 생각 없이 사고 친 적도 많긴 했지. 그래도 이번에는 아니야.”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괜히 저 때문에 급하게 움직이게 됐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영 보기가 안 좋군요.”
“그런 소리 마라. 네 출신 덕분에 우리가 이리 편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사소한 사고 정도야 신경 안 써도 돼.”
여상린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이 정도 일을 사소하다고 하는 사람은 소교주님밖에 없을 거예요.”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맹성을 작살내러 나온 길인데 철혈성주 욕 좀 했기로서니 뭐 어떻다고 그러냐. 몰래 이동해야 한다고 성질머리까지 억누르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 큰 사고 터지면 어떻게 하시게요?”
“정 힘들면 교주님한테 도와 달라고 떼 써 보지 뭐.”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그거 아세요?”
“뭐?”
“교주님은 소교주님한테 스승님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소교주님은 한 번도 그분을 사부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 항상 교주님이었지요.”
그녀로선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서량은 움찔했다.
‘그랬군.’
어쩌면 그는 이천상을 스승이 아니라 동반자 내지는 강호의 절대고수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이천상에게 사사한 건 군림마황기가 최초였다. 그 전까지의 가르침이라고 해 봤자 지도 비무 정도밖에 없지 않았나.
부르는 호칭에 대상을 어떻게 보는지의 시선이 담긴다. 서량이 입맛을 쩍 다셨다.
“뭐, 워낙에 딱딱하고 우람한 양반이라. 스승보다는 무림의 거장 같은 느낌이 강하지.”
“이해해요. 저도 가끔 아버지한테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사궁의 주인들 중 빙궁주의 무공은 단연 최고라고 들었다. 그럴 만도 하겠어.”
“꼭 무공 때문은 아니고요.”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빙궁주를 생각하는 여상린의 얼굴에 짙은 그리움이 드리워졌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도 남겠다, 슬슬 시작해 보자.”
“뭘요?”
“전에 말했잖아? 육장 수련이나 해 보자고.”
“지금 하게요?”
“체력도 빵빵한데 마냥 쉬어서 뭐 하냐. 이럴 때 무공 한 번 건드려 보는 거지.”
“귀찮은데…….”
“야! 극마의 고수가 친히 대련해 주겠다는데 그게 무슨 망발이야? 얼씨구나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입으로 용케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일어나기나 해, 인마.”
여상린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그냥 쉬고 있을 걸 괜히 왔네.”
기가 막힌 반응이다. 그래도 무림인인데 무공 욕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적당히 거리를 벌린 서량이 손을 까딱였다.
“시원하게 땀 한 바가지 흘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배 타자고.”
“땀 흘리면 찝찝하지 왜 상쾌…….”
“시끄럽고, 이만 들어와 봐.”
“쳇.”
진짜 귀찮은가 봐.
눈썹을 찡그리고 웅얼대며 자세를 낮추는데 엄청나게 느릿느릿하다.
느껴지는 무력을 보면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거늘, 저런 성격으로 어찌 저만한 무공을 쌓았는가 싶었다.
“쩝, 그럼 대충 한번 가 볼게요.”
“대충 오지 말고 제대로…….”
파아앙!
서량의 눈이 커졌다.
‘이것 보소?’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질주하는 여상린.
‘이런 신법을 숨기고 있었어?!’
접근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뜬금없이 혀만 차다가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서량의 면전에 도달한 여상린이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퍼퍼퍼펑! 촤르르륵!
공기가 터져 나가며 새하얀 가루가 휘날렸다. 피부에 닿은 가루에서 굉장한 한기가 느껴졌다. 발산하는 내력이 습기 가득한 공기를 그대로 얼려 버린 것이다.
서량이 주먹이 일직선으로 내질러졌다.
여상린의 얼굴에 순간 다급함이 일었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은 주먹인데 너무 시기적절해서 피하기가 힘들었다.
터어엉!
피하기가 어려우면 방어하면 되고, 방어가 힘들면 흐트러트리면 된다. 올려 친 무릎에 서량의 주먹이 위로 쑥 솟구쳐 버렸다.
‘호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공격선을 흐트러트리고 단숨에 접근한 여상린이 양손을 짧고 탄력적으로 휘둘렀다.
섬섬옥수에서 뿜어지는 경력이 굉장했다. 주변 공기를 모조리 얼리며 쏘아지는데, 소용돌이치는 한기에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퍼퍼펑! 쾅!
몇 번의 파공성과 폭음, 거친 경파가 두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한 수, 한 수 나눌수록 서량의 얼굴에 드리워진 놀라움이 커졌다.
‘이거 제대로잖아?!’
상상했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실력이었다.
맨손 백타의 능력이 엄청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단순 백타술은 오라비인 여강휘조차도 상대가 안 되겠다.
기(氣)는 둔하기 짝이 없는데, 투로를 풀어 내는 창의력과 반사신경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파바바박!
서량의 몸이 회전하며 여상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퍼엉!
“크윽!”
여상린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품 안에서 휘둘러진 서량의 팔꿈치 공격은 그녀의 수준으로 막을 만한 게 아니었다.
후속타를 대비하던 여상린이 주춤했다. 자세를 푼 서량이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안 해요?”
“…….”
“소교주님.”
“어?”
“더 안 하시냐고요.”
“어…… 그래, 이만해도 되겠어.”
여상린이 투덜거리며 자세를 풀었다.
“뭐여, 땀 한 바가지 흘리잘 땐 언제고 맛만 보고 말자네.”
“야.”
“왜요.”
“너 왜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냐?”
“숨긴 적 없는데요.”
하긴, 무공을 써야 할 때가 없었으니까.
서량이 혀를 내둘렀다.
“대체 그 백타술은 어디서 배운 거냐? 이 정도면 거의 정상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됐네요.”
“얘가 사람 말을 못 믿네. 그리고 그 신법은 뭐야? 엄청 빠르잖아? 그것도 빙궁 거냐?”
“그럼 어디 거겠어요.”
“그 좋은 신법을 가지고도 왜 잡힌 거냐, 대체?”
“크르릉.”
여상린이 손을 저었다.
“그냥저냥 대충 짜깁기한 거예요. 별걸 갖고 놀라시네.”
서량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는 천재가 참 많아.’
어렸을 때 배운 무공들을 짜깁기했다?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게다가 주먹질을 하는 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걸 보면, 처음 펼치는 무공에도 충분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하긴, 야수궁의 최면에 걸렸을 때 펼쳤던 수공(手功)도 대단했어. 자칫 위험할 뻔했잖아?’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이런 재능을 갖고도 무공에 관심이 없다……?’
왠지 사연이 느껴졌다.
“어쨌든, 이만하실 거면 전 가서 좀 쉽니다?”
“그래라. 실력이 좀 딸리면 호신(護身)으로 몇 수 가르쳐 줄까 싶었더니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겠군.”
여상린이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다.
“명색이 호위장이면서 왜 무공을 가르쳐 줘요? 그 정성으로 끝까지 지켜 주면 되지.”
“확.”
화들짝 놀란 여상린이 팔랑거리며 뛰어갔다. 기품 넘치는 외양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방정맞음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저 녀석,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는걸?”
시간이나 때워 볼까 해서 벌인 비무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한 시진 후, 강가에 거대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펄럭이는 돛은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대한 삼지창(三枝槍) 문양이 검은 바탕의 돛 위에 새겨졌다.
어느새 다가온 공야치가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장강 수로 삼십육채 중 서열 이 위인 하백수채(河伯水寨)입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이거 영광이구만.”
서열 일 위의 수채는 장강수로채 전체를 다스린다. 말하자면 수로채에선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수적 집단을 보낸 것이다.
“힘써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서량과 공야치의 거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 거래가 지속되는 이상, 공야치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해 줄 것이다.
잠시 후, 선박에서 수적 한 명이 내렸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수적의 외양과는 수만 리 동떨어진 사내였다.
당당한 체격과 멋스러운 콧수염, 인자해 보이기까지 하는 두 눈은 재지로 빛나고 있었다.
당금 하백수채의 채주 비천수귀(飛天水鬼) 양유(楊儒)가 그였다.
“오랜만이외다, 소문주.”
“그간 격조했습니다.”
“일이 바빠 먼저 연락을 못 했소이다. 조만간 한잔하십시다.”
“영광입니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양유가 서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귀하가 내 손님이오?”
마동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넘어가기엔 다소 무례한 언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량은 신교의 소교주가 아니라 여상린의 호위대장이었다. 섣불리 반응해선 안 된다.
서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는 우리 일행 전체가 손님이외다.”
“물론 그러시겠지.”
양유가 서량의 후방을 둘러보았다.
이모저모 뜯어봐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무사 하나,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말이 어울리는 어린 처녀, 그리고…….
“……허어.”
여상린을 본 양유가 고개를 저었다.
“미모를 무기로 써도 될 정도군.”
손님 앞에서 언사가 지나치게 무례하다. 공야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채주님.”
“음? 아, 미안하오. 내 생에 저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봐서 놀랐소. 양해해 주시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조였다. 여상린이 인상을 찡그렸다.
양유가 물었다.
“최고의 귀빈들이라 해서 오긴 왔소만, 아직 저분들의 신상은 듣지 못했소이다.”
“귀빈의 정체는 극비입니다. 서신에 적어 드리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랬소.”
양유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소. 저 귀빈들의 정체를 꼭 알아야겠소.”
공야치의 얼굴이 굳어졌다.
“채주님.”
“미안하오. 하지만 소문주, 내 물길 생활만 삼십이 년이외다. 이제는 딱 봐도 상대가 사고를 칠 사람인지, 아닌지 감이 온단 말이오.”
“…….”
“내가 볼 때, 이 귀빈들께선 양 모가 감당하기 벅찬 분들인 듯하오. 물길 위에서 사고가 나면 얼마나 고달파지는지 소문주도 알지 않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양유의 눈이 깊어졌다.
“왜 웃으시오?”
“감당하기 벅차면 그냥 안 맡겠다고 하면 되지 굳이 정체를 알아야겠다고 하길래 말이야.”
“그게 문제라도 되는 거요?”
“다 됐고, 이쪽에서 묻고 싶은 건 하나다. 할 거야, 말 거야?”
양유가 ‘이것 봐라?’ 하는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소문주의 얼굴을 봐서 어지간하면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 했소만,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제법 거칠어질 수밖에 없소이다.”
“어련하시겠나.”
“무슨 뜻이오?”
“시간이 촉박해. 쓸데없는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딱 말해. 할 거야, 말 거야?”
양유가 불쾌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말 거라면?”
서량이 씨익 웃었다.
“너, 숨 얼마나 참을 수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