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염라(閻羅)의 탄생 (5)
서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적혈염강령이라는 거, 설마 수로채에서 비상을 건 거요?”
“그렇소.”
양유의 얼굴은 확연히 굳어져 있었다.
“장강삼십육채는 하나의 동맹이지만 각 수채의 자치를 인정해 주고 있소. 하지만 모든 수채가 무조건 따라야 할 절대명령도 분명 있소.”
“그중 하나가 적혈염강령이다?”
“그렇소.”
철컥.
양유가 등 뒤에 멘 곡도(曲刀)를 쥐었다.
“혈염의 명령은 적의 완전한 섬멸을 뜻하오.”
“그 적이 우리인가?”
“그렇소. 하지만 조금 복잡하오.”
“알아듣기 쉽게 말해 줬으면 좋겠군.”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소. 사륜의 육두마차를 탄 이남 이녀의 일행을 찾아내라고.”
여상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삼남 삼년데요, 우리는?”
“그럴 수밖에.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철혈성의 이부인과 그 호위일 테니.”
“……쩝.”
여상린의 반응에 양유는 확신했다. 철혈성이 찾고 있는, 수로채가 찾아야 하는 일행이 바로 이들이라는 것을.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군.”
양유가 질린다는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당신들, 미친 거요?”
철혈성은 정파 무림 연합인 의천맹, 마도 총본산이라는 천마신교와 더불어 강호삼세로 이름을 떨치는 막강한 세력이었다.
그만한 세력의 수장이 아끼는 첩을 납치했다니, 목숨이 백 개라도 시도하기 힘든 일이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우리와 싸우시겠다?”
“죽이지 말라는 명령도 같이 내려왔소.”
“초비상 상태지만 죽이진 말아라…… 억류로군.”
“그렇소.”
“꼭 그래야겠소?”
“물론이오. 작게는 우리 수채, 크게는 장강수로채 전체가 피해를 볼 수 있는 일이오.”
“계약은 철저히 이행한다더니?”
“그 어떤 계약도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해할 수는 있되, 지금은 공감하고 싶지 않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이 꼬이는군.’
잘 나가다가 꼭 이런 문제들이 생긴다.
하긴 애초에 저들을 납치한 순간, 이 화(禍)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마 장강수로채 전체에 비상이 걸릴 줄은 몰랐다.
양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비록 상부의 명령이 절대적이라고 하나, 그래도 하오문의 소문주가 중개인으로 나서 계약한 사이 아니겠소. 서로 불편한 꼴 보지 않게 얌전히 계시면…….”
“미안하군.”
“……?”
“우리는 의창에 꼭 가야 하오. 그러기 위해선 당신들의 능력이 필요하오.”
“백 번, 천 번을 부탁해도 우리는 당신들을 도울 수 없소.”
“부탁…… 부탁이라.”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건 부탁이 아니오. 강권이지.”
양유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놀라운 고수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선상 전투에서 장강의 사내들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는 별로 없소.”
선상 전투와 수중전(水中戰)은 경험 없는 자들에겐 극도로 위험하다.
흔들리는 배 위, 언제든 물에 빠질 수 있다는 긴장감은 절정고수라도 쉬이 떨칠 수 없다.
게다가 수공(水功)을 전문적으로 연마한 무인들은 선상에서 본래 역량보다 적게는 두 배, 많게는 대여섯 배의 전력을 낼 수 있다.
양유의 자신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서량의 눈이 점차 싸늘해졌다.
“결국 끝장을 보자는 건가.”
양유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서량이 안광을 터트리자 마치 수천 자루의 비수로 몸이 난자되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해하시오.”
첫인상은 빵점이었지만, 그래도 서량은 양유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마 자신이 강자가 아니더라도 지금 양유의 처신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서글펐다.
서량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무형의 진기가 일렁였다.
우우우우웅.
순간 양유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모두 물러……!”
퍼어어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쏘아진 붉은 소용돌이가 선두(船頭)의 철제 장식물을 날려 버렸다.
촤아아아악!!
붉은빛 광채는 장식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 강물까지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 길이만 오 장이 넘고, 좌우로 솟구친 강물은 이내 높은 파도가 되어 작은 바위섬을 순간적으로 암초로 만들었다.
“……!!”
수적들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일섬(一閃)의 발경만으로 철제 장식물이 부서지고 잠시나마 강물까지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설령 장강수로채의 총채주라도 엄두를 못 낼 무공이었다.
약식으로 펼친 천마벽력권의 최후 초식 진천벽력파였다. 마기를 억눌렀기에 제 위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들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당신에게도 사정이 있듯,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소. 그러니 똑같이 말하겠소.”
“…….”
“이해하시오.”
양유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서량에게 당한 건 기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한 강자지만 배 위에서라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저 청년의 무공은 이미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었다.
‘초절정고수! 그것도 무르익을 대로 익은 경지가 분명하다. 저 연배에 어찌……?!’
설마하니 반로환동(返老環童)의 절대고수는 아닐 것이다. 물론 그만한 고수이건 초절정고수이건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출발하시오.”
양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떤 협박에도 굴할 수 없소. 어차피 당신은 우리를 죽일 수도 없을 것이오. 우리가 아니면 의창에 이르지 못할 테니까.”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되, 양유는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죽이지 않고도 당신들을 움직이게 만들 방법은 있소.”
“……?”
“하지만 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소. 그리하면 이 일이 끝난 후, 당신들은 수적 노릇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질 거요.”
“……!”
“당신과 수하들의 미래를 송두리째 날려 버리겠소? 아니면 우릴 의창까지 데려간 후, 새 미래를 도모해 보겠소?”
의창에 데려다준 후,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위협을 당한 후, 억지로 의창으로 갔다가 폐인처럼 살아가느냐.
그 방법이란 게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유인즉, 저들에게도 물러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제기랄.’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더럽게 걸렸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원 공격!”
파파파파파팡!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에 탄 수적 절반이 일제히 쓰러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양유는 경악보다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이상한 파공성이 연달아 터진다 싶더니, 어느새인가 부하들이 쓰러져 버렸다.
치이이이익.
서량의 손가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별수 없지.”
뭉클뭉클.
여상린이 눈을 감았고, 마동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앵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아아아악.
어느덧 서량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붉은 연기가 안개처럼 배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양유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을 잃지 않은 수적들의 안색이 모두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개중에는 오금이 저려 무릎을 꿇는 이들까지 있었다.
쿠구구궁!
배가 크게 출렁였다.
지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악의(惡意) 넘치는 기운. 부처의 수행을 마지막까지 방해했다는 제육천마왕의 기(氣)가 수면에 파랑을 일으켰다.
붉은 피로 강을 물들이란 절대명령을 받은 건 하백수채였지만, 정작 핏빛 세상을 만들어 버린 사람은 서량이었다.
서량의 동공이 피처럼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너희의 선택을 존중하겠다.”
마공을 개방하자 말투가 바뀌었다. 끓어오르는 붉은 욕망이 서량의 상중하 모든 단전을 지배했다.
마학의 경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조금씩 이천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는 그였다. 호흡을 따라 반투명한 붉은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것도 비슷했다.
우우우웅!!
양유가 저절로 허공을 날아 서량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파악!
목을 틀어잡힌 양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내공을 봉인한 것도 아닌데 그의 표정은 멍하기만 했다.
서량의 핏빛 눈이 조금씩, 조금씩 양유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주르르륵.
양유의 하의가 젖었다. 극심한 공포에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이대로 죽겠느냐?”
오싹!
양유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목이 붙들린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면, 의창으로 향하겠느냐?”
양유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한 극마를 맞이한 서량의 기파는 발산되는 것만으로 삼류 무사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하다 하여, 마왕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 기파를 집중하면 그 마기는 사람의 정신을 파괴한다.
서량이 손을 놓았다.
털썩!
양유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덜덜 떨면서도 용케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절정의 내력이 심맥을 보호하는 덕분이었다.
“이제부터 이 배의 주인은 나다.”
오만함이 가득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서량이 외쳤다.
“당장 속도를 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적들이 움직였다. 마치 총채주의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촤아아아악!
배가 다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커헉!”
“크르르륵!”
쓰러져 있던 수적들이 일제히 발작을 일으켰다.
연달아 쏘아 낸 지풍에 혼혈을 짚인 동시에, 지독한 마기에 신체의 통제권을 잃었다. 덜덜 떠는 그들의 입에서 거품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수적들은 당장이라도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배 전체를 장악한 구유마기는 일부나마 그들의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 마기가 경고하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의창에 도착하는 것뿐이라고.
화르르륵!
시뻘겋게 타오르는 마기, 낮게 깔리는 차가운 공포.
장강수로채에서 가장 크고 빠르다는 강룡선(江龍船)은 순식간에 유령선이 되어 버렸다.
서량이 입을 열었다.
“동필.”
“예, 호위장님.”
“최소한 한나절은 다른 생각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놈들을 잘 감시하도록.”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추적을 끊어야겠다.”
마동필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제가 가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상대는 묵풍대였다. 마공을 개방해도 단신으로 그들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장강 한복판이야. 마기의 발산 정도를 통제할 테니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아볼 사람이 없다는 뜻은 곧, 묵풍대를 전멸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마동필이 마차를 힐끔거렸다.
“마차로는 구유마기가 번지지 않더군요. 기막을 세워 두신 겁니까?”
“그래. 두 연놈은 우리가 마인이란 사실을 절대로 모를 거다.”
지금의 마동필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공 운용이었다.
서량이 턱으로 양유를 가리켰다. 양유는 덜덜 떨며 선두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뭣하면 저놈을 다뤄라. 저놈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이라면 네 무공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다.”
절반이나 되는 수적들을 잠재운 이유였다.
서량이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온 길이 단순해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파아아아앙!!
붉은빛이 수면을 가로지르며 번개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