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염라(閻羅)의 탄생 (6)
“……철혈성주의 첩실이라.”
홍산자의 눈에서 광기가 이글거렸다.
“기억이 나는군. 그 색욕에 미친 늙은이가 삼 년 전에 첩을 들였다고 하였지.”
“많이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제 나이의 삼분지 일밖에 안 되는 어린 처녀가 아닌가.”
“하하.”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던 광산자(廣山子)가 문득 드는 생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한데 이 정보, 믿을 만합니까?”
“하오문의 직인이 찍힌 정보일세. 악취 풀풀 나는 쓰레기들이지만 그들의 정보력은 개방에 밀리지 않네.”
“결국 사실이란 거군요.”
“그렇지.”
“대체 어떤 오만방자한 놈이 의창까지 장문인을 불렀을까요.”
그것까지는 홍산자도 알 수가 없었다. 서신에 납치범들의 정체는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의천맹 쪽은 아닐 걸세.”
강도는 강도가 더 잘 아는 법이다. 의천맹 소속이라면 오직 자파의 권리를 위해 움직였을 터, 인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진 않을 것이다.
“마교는 절대 아닐 테고…… 설마 철혈성일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네.”
말은 그리했지만, 홍산자는 철혈성일 확률이 오 할은 넘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본처가 사람을 시켜 납치했을 수도 있겠다. 처의 입장에서 아리따운 첩의 존재는 눈엣가시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본디 강호에서 벌어지는 사건 중 절반 이상이 치정(癡情)에 관한 문제인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마침 현(縣) 하나만 넘어가면 호북이로군. 크게 먼 거리도 아니고 일도 대충 처리해 놨으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광산자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혹시라도 이것이 누군가의 함정이라면…….”
“그렇진 않을 걸세.”
홍산자가 서신을 품에 넣었다.
“하오문의 쓰레기들이 지금껏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신용에 있네. 그것은 녹림채도, 수로채도 마찬가지지. 대화는커녕 겸상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지만, 적어도 이런 걸로 장난질하진 않는다네.”
실제로 그는 몇 번이나 하오문과 거래해 보았다. 스승을 몰아내는 일에, 같은 의천맹 소속인 개방의 협조를 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홍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화검수(梅花劍手) 이 개 조를 부르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자네는 이쪽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봐야 하지 않겠나.”
“아시잖습니까? 제자들 모두 똑똑한 녀석들입니다. 게다가 구산자도 있으니, 별일은 없을 겁니다.”
홍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도 함께 가지.”
사제여서가 아니라 광산자는 제법 똑똑한 녀석이었다. 적어도 함께 가서 피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홍산자가 씨익 웃었다.
“철혈성주의 첩이라…… 이거 또 후끈 달아오르는군.”
잘하면 화산의 이름을 제대로 휘날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 * *
“하백수채?”
“그렇습니다.”
문황의 눈이 빛났다.
“하백수채라면 장강삼십육채 중 서열 이 위가 아니오?”
용아채(龍牙寨)의 채주 사곡이 고개를 숙였다.
“본채보다 서열이 하나 위지요. 장강수로채를 지배하는 것은 총채주지만, 경력으로는 하백채주가 최곱니다. 그만큼 사람 보는 눈도 확실하지요.”
하백수채의 채주 양유에 대해서는 문황도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
‘강룡도객(江龍刀客)이라 했던가.’
누구한테 사사했는지는 몰라도 능히 절정고수라 불릴 만한 무인이라 들었다. 특히나 수공(水功)으로는 수로채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달인으로, 선상에선 초절정고수조차 상대할 수 있다는 수귀(水鬼)가 그였다.
‘그만한 인물이라면 믿을 만하지.’
수적이라 하여 의리도, 최소한의 도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그들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처사다.
장강의 사내들은 하나 같이 용력과 배포가 넘치는 이들이었다.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그중 최고라는 자가 양유이니, 힘이 닿는 한 납치범들을 어떻게든 억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힘들겠지.’
납치범 중에는 초절정고수가 속해 있다. 최악의 경우 둘일 수도 있다.
귀신같은 수공으로 어느 정도는 붙잡아 둘 수 있겠지만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속도를 내야 했다. 자칫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도 있다.
“다시 한번 확인하겠소. 하백수채의 채주 양유의 배가 하루 전 떠났고, 그 배에 사륜의 육두마차가 실렸다. 그리고 납치범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호북 의창이다. 맞소?”
“정확합니다. 수로채의 모든 거래는 총채주에게 전달됩니다. 총채주가 그렇다고 했으니, 분명 맞을 겁니다.”
“좋소. 고생하셨소.”
“별말씀을. 그보다, 대원들은 괜찮은 것입니까?”
묵풍대원들은 하나같이 갑판 위에 너부러져 있었다. 문황을 따라 이곳까지 쉬지도 않고 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달린 무한 질주에도 낙오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독한 부대였다.
“반나절 정도 쉬면 활기를 되찾을 것이오.”
“음식과 물을 넉넉히 실어 두었습니다. 곧바로 준비할 테니 대원들에게 먹이시면 됩니다.”
“호의 감사하오.”
지나칠 정도로 잘해 주는 거 아닌가 싶지만, 이것은 총채주에게서 직접 내려온 명령이었다. 자칫 장강수로채 전체가 끝장나게 생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문황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용아채의 대표 선박인 용안(龍眼)의 좌우로, 용익(龍翼)과 용조(龍爪)라 불리는 쾌속선들이 따르고 있었다. 총 다섯 척의 쾌속선에는 일당백의 수적들이 타고 있었다.
육지라면 상대도 안 되겠지만, 수로에서라면 묵풍대보다도 전략적 활용도가 높은 병력이었다. 그 수가 무려 삼백이나 된다.
지나치게 많은 수가 아닌가 싶었지만, 혹시 모를 사태는 대비해야 했다.
‘마음 같아선 장강수로채 전체가 나섰으면 좋겠다만.’
물론 그렇게까지는 해서는 안 된다. 힘으로야 철혈성의 상대가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의천맹에 붙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골치가 아파진다.
완전히 없애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적당한 압박 정도로 마무리 짓는 게 좋다. 그게 딱 지금이었다.
“대주님.”
“음.”
“호북지부에서 전서응을 보냈습니다. 의창 부근에 철검귀(鐵劍鬼)들을 깔아 두겠다고 합니다.”
문황의 눈이 번뜩였다.
철검귀는 호북 최고의 사파라는 귀왕문(鬼王門)의 정예였다. 비록 그 수는 서른셋에 불과하지만, 하나하나가 살육에 미친 검귀들이었다.
“알았다.”
의창 인근에서는 철검귀가, 장강에서는 용아채의 모든 전력이.
문황의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무조건 잡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쏴아아아악!
저 멀리서 자욱한 안개가 일었다.
문황의 눈이 깊어졌다.
“갑자기 웬 물안개가?”
사곡이 입맛을 다셨다.
“유독 물안개가 심한 구간입니다. 과거에는 장강 밑바닥에서 자고 있는 용왕(龍王)의 콧김이라고도 했지요. 이런 구간이 장강 전체에 걸쳐 수십 개나 됩니다.”
“그렇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짙지도 않을뿐더러 일각만 지나면 거의 사라집니다.”
“보통 물안개는 온도 차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맞습니다. 어지간하면 새벽에 깔리는 게 정상인데 여기는 시시때때로 물안개가 생기다 사라지길 반복합니다. 신기하지요?”
“그렇군.”
휘이이잉.
사곡이 장난스럽게 몸을 떨었다.
“정말 가을이 오긴 온 모양입니다. 날이 꽤 춥군요.”
“슬슬 해도 지고 있소.”
“어두워져도 속도에 큰 변함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용안과 용익, 용조가 물안개 가득한 구역으로 진입했다.
사아아악.
짙은 안개로 시야가 흐릿해짐과 동시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문황이 사곡을 힐끔거렸다.
사곡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곳을 여러 차례 지나다녔어도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바람 소리는 아닌 것 같고…… 이상하군. 뭐지?”
그때였다.
‘……?’
문황이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빙굴에 갇혀 있어도 그의 무공이면 추위를 느낄 리가 없는데도.
‘뭐지?’
촤아아아아악.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이제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건 노랫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비슷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사곡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속도를 늦춰라!”
추르륵. 추르르륵.
모든 배가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속도를 늦추었다. 배를 모는 솜씨가 가히 신기(神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이곳, 물안개 가득한 용상협(龍喪狹)으로 접근하는 이는 제국 최강의 전함(戰艦)보다도 강하고, 수로채 최고의 쾌속선보다도 빠르며, 선체의 포격보다도 무시무시한 마귀였다.
문황의 눈이 흔들렸다.
물안개 너머에서 명멸을 반복하는 핏빛 광채.
“전투 준비!!”
문황이 연신 소리쳤다.
“묵풍대 전원 전투 준비!”
차차창!
묵풍대원 전체가 칼을 빼 들었다.
사곡 역시 기다렸다는 듯 용아채의 수적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언제, 어느 때라도 공격을 감행할 수 있도록 대비를 시켜 뒀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마쳤다.
“…….”
잠시의 침묵.
휘이이이이잉!!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물안개를 한 점으로 집중시켰다.
소용돌이치며 와류를 형성하는 물안개의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강이 아니라 허공에 와류를 형성한다.
‘안개가?!’
물안개의 영역이 조금씩 축소되고 있었다. 제법 넓은 영역에 퍼져 있던 물안개가 조금씩 줄어드는 광경 역시 신비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공격이 시작되었다.
쿠르르릉! 쏴아아아아!!!
강물 속에 괴물이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무서운 속도로 강물을 가르며 쏘아지는 것은, 지옥의 바람을 담은 막강한 도기(刀氣)였다.
“자세를 낮춰!”
“선체를 잡……!”
콰아아앙!!
용안의 거대한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으아아악!”
“잡아! 잡아!”
아우성치는 묵풍대원들, 그리고 수적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용상협 좌우에서 솟구쳐 오른 거대한 불기둥이 호선을 그리며 쏟아졌다. 엄청난 열기에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요동을 쳤다.
문황의 눈이 흔들렸다.
좌우로 좁혀 들어오는 거대한 불기둥 두 개가 마치 두 마리의 화룡(火龍)을 보는 듯했다.
‘도기?!’
콰아앙! 콰아아앙!
용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수로채 최고의 조선 기술이 집약되었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재앙은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가히 자연재해에 달하는 위력이었다.
무지막지한 칼바람, 그리고 환상과도 같은 불기둥.
그다음은?
쩌저저저저적!!
사곡이 입을 쩍 벌렸다.
“장강이…… 장강이?!”
강의 표면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동풍(凍風)에도 쉽게 얼지 않는 강물이 무서운 속도로 얼어붙는다.
귀신에 홀린 것인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저벅저벅.
두껍게 얼어 버린 강물 위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여유롭게 뒷짐을 진 장신의 청년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단단한 체격, 새하얀 복식이 기이할 정도로 조화롭게 보였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미남자지만 감탄이 나오기보다는 기괴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청년이 피워 내는 무시무시한 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찾았군.”
문황이 버럭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청년, 서량이 하얗게 웃었다.
콰아앙!
얼어 버린 강물을 깨부수며 뛰어오른 서량이 홀로 용안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