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염라(閻羅)의 탄생 (8)
“저기…….”
마동필이 힐끔 앵화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괜찮으실까요?”
마동필이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호위장님의 무공은 십대고수가 아니라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설령 십대고수라 한들, 지금의 호위장님이라면 절대 밀리지 않으실 거다.”
천하십대고수는 천마신교를 제외한 중원 최고수들을 일컫는다.
수년 전 천하제일살수 살왕이 죽고 난 후 기다렸다는 듯 화경에 오른 축융무후(祝融武后)를 제외하면, 십대고수 전부가 맹성(盟城)에 속해 있다.
그들 열 명은 중원을 대표하는 최고수들이다.
물론 구파일방의 은거 기인이나 현역에서 물러난 오대세가의 원로 중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이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중요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중원 무림인 중 그러한 경지에 오른 이가 한 줌도 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선택받은 이들만의 경지다. 그 지고한 경지에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오른 게 서량이다.
신교의 마인들은 서량이 신교 역사상 최고, 최강의 교주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능, 노력, 타고난 감각까지. 호위장님은 하늘이 내린 무신(武神)이야. ‘그분’을 제외하면 누구도 호위장님을 넘어서지 못할 거다.”
‘그분’이라 함은 다름 아닌 교주 이천상을 뜻한다.
이천상은 초대와 칠대에 비견되는 역사상 최강의 천마 중 한 명이다. 그는 ‘당대’가 아니라 ‘고금’에서 평가를 받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러한 규격 외의 고수가 아니면 누구도 서량을 당해 낼 수 없다는 말. 앵화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이 어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마동필의 목소리는 무뚝뚝한 만큼이나 사람에게 신뢰를 주었다.
무공을 익히긴 했지만, 그에 관한 지식은 깊지 않은 앵화는 그제야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었다.
마동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제는 이곳이다.’
하백수채의 수적들은 최선을 다해 배를 몰고 있었다. 오히려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듯했다.
‘소교주님의 마기는 사람의 정신까지 지배한다.
하지만 저들 중엔 무시할 수 없는 고수도 있어.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조만간 마기를 벗겨 내고 제정신을 찾을 거야.’
결국, 마기에서 언제 자유로워지느냐가 관건이다. 저들이 이성을 찾는 즉시 또 한 번 선상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꾸욱.
묵왕검을 쥔 마동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약 그리된다면, 어떻게든 내 손으로 막는다.’
굴강한 눈빛으로 선상 위를 둘러보는 마동필.
과도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긴장 때문이었을까.
우우웅.
그는 묵왕검의 미약한 박동을 느끼지 못했다.
* * *
퍼어엉!
거대한 물세례 위로 수십 줄기의 도검기가 짓쳐 들었다.
화경, 극마의 고수라도 당황을 금치 못할 공격이었다. 기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절묘했다.
촤아아아악!
도검기가 물줄기를 통과했다.
문황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관통했나?!’
저 괴물은 손짓 한 번으로 묵풍대의 사망기공진(死網氣功陣)을 파훼하는 고수다. 가능했다면 이번에도 수십 줄기의 도검기를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검기가 물살을 통과했다. 막지 못하고 당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심은 금물.’
문황이 재차 칼을 내리쳤다.
파아아아악!
밑으로 쏟아지던 물줄기가 순간적으로 뚝 잘려 나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묵풍대원들의 사망기공진만큼 넓은 범위를 아우르진 못하지만, 일격의 위력은 초절정고수인 문황의 도기가 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죽었는가?’
순간 문황의 눈이 흔들렸다.
‘피가?’
잘려 나간 의복도, 신체의 일부도, 하다 못 해 피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촤아아아악!
허공 높이 솟구쳤던 물이 이제야 수면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등을 타고 오르는 섬뜩함.
그 섬뜩함은 괜한 긴장이 아닌, 곧 현실이 될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했다. 문황이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없다. 어디에?’
번쩍!
모두가 수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번쩍! 번쩍!
바다처럼 넓은 강물 속.
저 밑에서 섬뜩한 붉은 광채가 명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강 밑이다!!”
파아아악!
다시 한번 사망기공진이 펼쳐졌다. 수적들은 일제히 작살과 암기를 퍼부었다.
그때, 붉은 광채가 꿈틀거렸다.
기공진에 당한 것도, 작살과 암기에 당한 것도 아니다. 무서운 속도로 배 주변을 훑고 다니던 광채가 일순간 용익 한 채의 선미로 쏘아졌다.
푸화아아악!!
솟구치는 화산처럼.
전신 가득 붉은 마기를 피워 내며 물 위로 올라온 서량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나 더.”
콰르르릉!
쏘아져 나가는 권풍 뒤, 위협적인 전광이 잔영을 남겼다.
이천상의 소매까지 태워 버린 극상의 공격력, 천마벽력권의 최후 초식 진천벽력파(振天霹靂波)였다.
마공을 개방한 채 발산하는 진천벽력파는 그 위력이 용익의 화포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콰아앙!
“크아아악!”
“아아악!”
용익의 선두를 부순 권풍이 그대로 선저까지 일직선으로 뚫어 버렸다.
피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벽력권의 극의는 곧 기(氣)와 기의 충돌로 생성하는 뇌전(雷電)에 있었다.
실제 벼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한 전력(電力)을 지닌 경력의 여파가 물에 빠진 이들의 체내로 침투했다.
파지지지직!
무섭도록 빠르고 강한 전파력이었다. 물에 빠진 모두가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었다. 전신이 마비된 것도 모자라 혼절까지 했으니 익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
서량이 부서진 용익의 선체 위로 올라섰다.
그러곤 오른발을 들었다.
쾅! 쾅! 쾅!
진각 세 번에 용익이 완전히 파괴되고야 말았다.
무식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행위요, 무공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누구도 서량을 비웃지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신경질적인 파락호의 발길질처럼 보이는 진각으로 저 큰 배가 대파된 것이다.
파아앙!
서량은 쉬지 않았다. 쉴 수가 없었다.
허공을 밟아 가며 마황군림보를 구사한 그가 아직 침몰하지 않은 용안으로 올라섰다.
번쩍!
단숨에 다가온 문황이 서량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죽여 없애야 할 적에게 품을 감정은 아니지만, 서량은 그 순간 문황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전노장이 따로 없군.’
수상전의 경험이 거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구사하는 무공에 흔들림이 없는 것은 물론, 와중에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어 절묘하게 공격을 가한다.
혀를 내두를 전투 능력이었다. 무공의 경지는 자신의 아래일지언정, 저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습 능력만큼은 자신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아쉬운 자야.’
파아아앙!
문황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일었다. 시기적절하게 휘두른 칼이 그대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의 팔뚝도 함께.
그 짧은 거리에서 올려 친 서량의 각법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문황의 팔을 날렸다. 신병이기 못지않은 족도(足刀) 일격이었다.
팔꿈치 밑이 허전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전신의 피가 절단면으로 확 몰리는 느낌이 일었다.
푸화아아악!
대량의 선혈이 뿜어졌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문황이 내공을 조절하여 혈관을 조였다. 그럼에도 일순 머리가 핑 돌았다. 순간이었지만 출혈량이 너무 많았다.
서량이 쌍장을 내질렀다.
콰앙!
문황의 몸이 훨훨 날아갔다. 새하얀 연기를 피워 내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목숨이 성치 못할 듯했다.
퍼어엉!
물에 빠진 묵풍의 수장.
묵풍대원들의 기파가 일렁였다. 몇 합 제대로 붙어 보지도 않았는데 대주가 당했다. 그것이 그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렸다.
서량의 판단은 정확했다. 묵풍대를 진정 묵풍대답게 만드는 것은 대주인 문황의 존재감이었다.
그가 남아 있는 용조를 향해 뛰어들었다.
콰아앙! 퍼퍼펑! 콰직!
폭음과 폭음의 향연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빠르다. 순식간에 쾌속선을 박살 내고 그 위에 탄 묵풍대와 수적들을 모조리 강에 빠트렸다.
퍼어엉!
한 줄기 폭음을 끝으로 서량이 용안의 선미로 내려섰다.
섬멸은 순간이었다.
용안을 제외한 다섯 척의 쾌속선이 전부 대파되었다. 극강의 무공, 신에 이른 전투 능력이 빚어 낸 화려한 전장이었다.
“이럴 수가…….”
사곡의 몸이 덜덜 떨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지도 못하는 새에 부하들의 팔 할이 죽었다. 육지로 도주하는 이들을 제외한 묵풍대원들 역시 대부분 수장되었다.
수전(水戰)의 경험? 전투에서의 우위?
그것도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이어야 뭐라도 내세울 수 있는 법이다.
적의 무공은, 그가 이룬 경지는 ‘고작’ 전투 부대 하나와 수적 몇백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용아채의 채주라 했더냐.”
사곡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귓가로 담담하게 흘러들어온 목소리에 오금이 저렸다.
“옆 동네 늑대가 무서워 호랑이를 건드리다니, 장강삼십육채도 다 됐군.”
오싹!
그렇다.
감히 받아칠 엄두도 나지 않는 무공을 보며 마냥 놀라기만 했지만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저자는 마교도다.
무림 역사상 최악의 단체, 인신 공양은 물론 기괴한 사술로 귀신과 요괴까지 부린다는 마교의 악귀인 것이다.
그제야 현실감이 확 들었다. 사곡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덕분에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앞으로 다시 한번 수상전이 터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어.”
미소 짓던 서량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하게 변했다.
“잘 가라.”
퍼어어어엉!
사곡의 머리통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끔찍한 죽음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무리해 볼까.”
콰아앙!
용안의 선체 안으로 들어간 서량이 구유마공을 극성으로 발휘했다.
콰콰쾅! 퍼어어엉!!
핏빛 전광과 거대한 불길이 뿜어졌다. 선체가 부서지고 화포가 날아갔으며, 기름에 닿은 화약이 연신 폭발을 일으켰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은 넓었지만, 끝 간 데 모르고 퍼져 나간 서량의 기감은 살아 있는 묵풍대원과 수적 하나하나를 간파했다.
‘별수 없지.’
전의를 상실한 상대를 끝장내는 건 달갑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들 중 하나라도 살아서 도망치면 마인이 중원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파아아앙!
신들린 속도로 수면 위를 오가는 서량이 폭산충파경을 터트려 댔다.
퍼펑! 퍼퍼펑!
수면이 터져 나갔다. 강물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사라락.
부서진 판자 위에 올라선 서량의 눈은 이전보다 훨씬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공의 장시간 개방, 나아가 수백의 적을 죽이면서 마기가 들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흥분 상태에도 머리는 냉정하다. 세 번째 지옥문, 열세마왕공포식을 연 이후 정파의 신공(神功)보다도 안정적으로 마기를 운용하는 그였다.
‘내공 소모가 심하군.’
다만 극마의 고수라도 내공을 무한정 쓸 수는 없다.
내공을 많이 잡아먹는 수상비를 이용해 이곳까지 도달해서 무차별 학살을 벌였다. 서량이라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서량이 마공을 다스렸다. 그러자 단전의 마기가 무섭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한정 쓸 수는 없지만, 회복 속도가 누구보다도 빠르다. 지금의 서량은, 어떤 의미론 과거에 살왕이었던 시절보다도 더 지독한 살육 병기가 된 셈이었다.
몇 번 숨을 들이쉬며 마기를 안정시킨 서량이 재차 눈을 빛냈다.
“저기로군.”
묵풍대 오십여 명이 헤엄쳐 가는 곳.
서량의 두 발에 붉은 기운이 맺혔다.
퍼어어어엉!!
수면이 다시 한번 폭발을 일으키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흘 후.
용상협에 떠다니는 시체와 파괴된 선박의 잔해를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노한 장강의 용이 마귀를 보내 이 많은 이들을 죽인 거라고. 조만간 세상에 크나큰 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수신(水神) 용왕(龍王)의 분노로 태어난 이름 모를 장강 최악의 악귀.
용문염라(龍紋閻羅)의 소문이 조금씩, 조금씩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