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염라(閻羅)의 탄생 (9)
‘음?!’
마동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라도 느끼기 힘든 감각.
‘소교주님의 마기가?’
미세하게, 은밀하게.
하백수채 수적들의 몸에 파고들었던 서량의 마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서량의 마기를 숱하게 보고 느꼈던 마동필이기에 느낄 수 있는 마력의 이동이었다.
‘갑자기?’
그때였다.
“크윽!”
양유가 머리를 짚었다. 붉게 충혈되었던 눈에 은은한 광채가 일었다. 그가 익힌 내공심결이 점차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양유에게서만 일어났다. 다른 수적들은 마기가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제각기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저자의 실력이 그렇게 출중했나?’
당황한 마동필이 양유에게 다가갔다.
“으윽! 뭐, 뭐지?”
정신을 차린 양유가 힘 빠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강룡선. 자신의 부하들이 최선을 다해 배를 몰고 있었다.
강룡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의창이었다.
“이!”
스릉.
양유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먹빛으로 물든 검날이 어깨 위에 올려졌다. 살기 한 점 드러나지 않기에 마검 특유의 예기가 돋보인다.
.자칫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간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조용.”
마동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다툼으로 소란을 일으키긴 싫소.
장담컨대, 당신이 소리치려는 순간 내 검은 용맹했던 한 수적 대장을 과거의 추억 비슷한 술안줏거리로 만들어 버릴 거요.”
양유의 입술이 씰룩였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진심이 실렸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동필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소. 장부는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와 그러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라 했소.
쓸데없는 적개심으로 모두를 불행에 빠트리진 맙시다.”
“……좋소.”
침을 삼킨 양유가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
“당신들 정체가 뭐요?”
“계약 조항에 우리의 정체를 확실히 하란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하지만 알아야겠소. 당신, 아니 당신 상관처럼 보이는 자는 분명…….”
양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분명, 마기를 피웠소.”
“…….”
“천마신교에서 오신 게요?”
“많은 걸 알려 하지 마시오.”
창백했던 양유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마동필의 말은, 그들이 천마신교 소속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삼십 년이 넘도록 대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강호 최악의 조직.
무림 역사상 비견할 조직이 없다는 악마의 단체가 비로소 지옥문을 열고 중원에 나타났다. 향후 이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양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으음.”
마동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오?”
“…….”
“양 채주?”
주르륵.
양유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이만한 절정고수가 느닷없이 땀을 흘릴 일은 결코 흔치 않았다.
‘왜……?’
의아한 눈으로 양유의 뒤통수를 보던 마동필.
순간 그는 심상치 않은 기운의 이동을 느꼈다.
‘……!!’
스으윽.
양유의 몸에 축적된 서량의 마기.
그 마기가 조금씩, 조금씩 묵왕검에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마기가 묵왕검으로 들어오자, 이제는 양유 본인의 내력까지도 묵왕검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깜짝 놀란 마동필이 검을 회수했다.
“쿨럭!”
양유가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보니, 단순한 내력뿐만이 아니라 원정지기까지 손상을 입은 듯했다.
‘갑자기 왜?!’
마동필이 묵왕검을 내려다보았다.
검갑으로 들어간 묵왕검이 웅웅 떨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너무 은밀해서 느끼지 못했던 미세한 박동이, 지금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마동필의 눈에 은은한 금빛 광채가 어렸다.
은밀하게 마공을 열어 마안(魔眼)을 개방하는 마동필.
‘이런……!’
양유뿐만이 아니다.
서량의 마기에 침범을 당한 수적들, 어째서 그들 모두의 마기가 빠져나가고 있는지 의아했거늘 답은 묵왕검에 있었다.
선상 위를 맴돌고 있는 마기의 흔적.
그 무형의 흔적이 마기가 묵왕검을 향해 이동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묵왕검을 검갑에 집어넣었는데도 불구하고 극히 느릿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왜일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동필이 손에 힘을 주었다.
우우우웅.
묵왕검이 부르르 떨렸다.
금강야차마기로 마기의 유입을 차단하자 묵왕검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 마치 심통이라도 부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논리가 아닌 본능이었다.
저들의 마기를 빨아들이도록 놔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들이 정신을 차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불길하고 불안했다.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놔둬.”
깜짝 놀란 마동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선미에서 서량이 걸어오고 있었다.
“호위장님!”
그의 목소리는 유달리 격양되었다.
한쪽에서 졸고 있던 여상린과 앵화가 놀라서 후다닥 일어났다.
“어? 오셨어요?”
“호, 호위장님!”
서량이 혀를 찼다.
“왜들 그렇게 야단이야? 더 자.”
마동필이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안 괜찮아 뵈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수선 그만 떨고 손에 기(氣)나 풀어. 검이 아파하고 있잖아.”
마동필이 묵왕검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에 잡힌 묵왕검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보시다시피 지금 검이 저들의…….”
“안다. 그래도 놔둬. 아무런 문제 없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량이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마동필이 손에 힘을 풀었다.
여상린이 서둘러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다 아시면서 그러지 말고요.”
“너도 결과를 예상하고 있으면서 왜 물어봐? 싹 묻었다.”
“아……!”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굉장한 녀석들이더군.”
세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그렇게 강했어요?”
“당연한 거 아냐? 하나는 수상전의 최고봉이라는 수로채고, 다른 하나는 철혈성의 주력 부대 중 하나야.
그 정도 전력이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반나절도 버티지 못해.”
“호위장님이 강하다고 할 정도면…….”
“단순 전력도 대단했지만, 풍부한 전투 경험과 뚜렷한 목적의식이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이었어, 그런 놈들과 붙어 본 것도.”
여상린이 툴툴거렸다.
“자기를 치켜세우는 데에 도가 트셨네요. 그런 대단한 전력을 증발시킨 호위장님은 그럼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나야 뭐 원래 좀 하잖아.”
“칫.”
여상린이 난간에 기댔다.
“여하간 다행이네요. 추격자가 없다고 하니.”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치웠을 뿐이야. 분명 철혈성에도 연락이 갔을 테니, 어쩌면 의창 인근에도 병력이 깔렸을 가능성이 커.”
“하긴, 그렇겠네요. 이거 하선하자마자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서량이 마차를 돌아보았다.
“음, 지금은 자는 모양이군.”
“기력이 오죽이나 상했겠어요.”
“그렇겠지.”
본인들의 운명이 타인의 손에 농락당하고 있다. 심력 소모가 극심했을 것이다.
서량이 양유에게 다가갔다.
양유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장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도 수적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이봐.”
“헉헉.”
“의창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여상린은 혀를 내둘렀다. 힘들어서 호흡도 격해진 사람한테 잘도 저런 질문을 던진다 싶었다.
양유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쿨럭! 허억, 허억. 사, 사흘은 가야 할 겁니다.”
“사흘이라…… 역시 빠르군.”
서량이 양유의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다.”
툭.
양유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묵왕검?”
“예.”
“이제야 깨어난 거지.”
이제야 깨어났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전에 말했을 거다. 묵왕검을 제대로 다루려면 네 수준을 더욱 끌어올려야 할 거라고.”
“그러셨지요.”
“묵왕검은 내 기(氣)에 반응한 거다. 내가 품은 마기 정도는 되어야 깨어날 수 있다는 거지.”
마동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량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속도로 적들을 물리치고, 쉴 새 없이 되돌아왔다. 내력의 회복 속도는 어마어마했지만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순 없었다.
“그럼 그전까지는 왜 반응하지 않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내 마기는 나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저들의 몸에 남아 있던 마기는 다르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통제에서 벗어난 마기는 혼주(魂主) 없이 제멋대로 날뛰게 되지.
묵왕검은 그 주인 없는 마기를 빨아들인 거다.”
“아…….”
“달리 말하면, 묵왕검은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나의 마기를 받아들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서량의 눈이 마동필에게 향했다.
“네가 그 검을 다루려면 언젠가 나만 한 경지에 올라야 가능하다는 뜻이야.”
“…….”
“할 수 있겠냐?”
마동필이 다시 묵왕검으로 시선을 내렸다.
묵왕검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서량이 도착하자마자 선상 위에 감돌던 마기가 다시 그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자님께서 제게 하사하신 이 검은, 이제 제 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부담으로 가득하던 마동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소 굳은 미소긴 했지만.
“제 물건도 제대로 못 쓰는 바보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요.”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래야지. 걱정하지 마라, 넌 누구보다 잘하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몇 마디 더 해 주려던 서량은 입을 닫았다. 괜한 말로 마동필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방이겠군.’
마동필이 서량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 그 전에 극마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인가?
그것은 서량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묵왕검이 서량의 마기로 깨어났다.
아직 마동필의 경지는 진정한 검주(劍主)가 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이미 깨어난 검은 어지간해선 잠들지 않을 것이다.
즉, 마동필이 서량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도 묵왕검이 제힘을 발휘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휩쓸리진 않겠지.’
비록 극마에 달하진 못했지만 마동필의 심혼(心魂)은 극마의 고수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연련되어 있다.
그 강한 심혼이라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절대마검이라 불리는 묵왕검의 진력을.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내가 누구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한데.’
그가 마차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 내부 바닥, 비밀 수납장엔 온갖 부적으로 뒤덮인 천에 싸인 태도(太刀) 한 자루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천상이 만들어 낸 현세대 최고, 최강의 마도(魔刀)였다.
“사흘 동안 제대로 파 봐야겠군.”
사흘 후.
저 멀리 의창의 선착장이 보였다.
“호위장님.”
“그래.”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살벌한 기운을 피워 내는 서른세 명의 검귀들 뒤로, 이백은 족히 될 듯한 궁수(弓手)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철혈성 호북지부의 자랑, 귀곡궁대(鬼哭弓隊)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해.”
파지지직.
서량의 손에서 시커먼 전광이 피어올랐다.
“뚫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