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화산의 이름값 (3)
“멈추시오.”
낭랑하게 퍼지는 목소리에 강력한 내공이 담겼다. 화산일절 양오신공(養晤神功)의 힘이 실린 내력이었다.
“예까지 오셨거늘, 어찌 장문진인의 얼굴도 보지 않고 가려 하시오.”
웅혼한 내공.
마동필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마공과 반하는 신공 내력이 머리를 뒤흔드는 기분이었다.
촤아악!
마차가 그대로 대문으로 향했다. 들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광산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차의 움직임에서 상대의 단호함이 느껴졌다.
‘건방진!’
하지만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아직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다.
철혈성주의 첩을 납치한다는 건 보통 배포로는 불가능할 터, 쉽게 무시할 만한 인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직접 나선 것이다. 뛰쳐나가려는 홍산자를 막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쪽의 무례는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소. 귀하 측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을 터, 신경전은 이쯤 해 둡시다.”
무례를 인지하고 있다면서 절대 사과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화산파였다. 문도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윗사람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함이 옳다. 한데 사과는커녕 그저 신경전으로 치부해 버린다.
신경전은 맞지만, 적어도 광산자는 그래선 안 되었다.
덜컥.
마차가 멈추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서량이 내렸다.
광산자의 눈이 번뜩였다.
‘어리다?’
많이 봐 줘도 서른이 채 되지 않았을 외양이었다.
‘체격이 굉장하군.’
육 척 반에 가까운 키에 골격도 떡 벌어졌다. 그런데도 결코 둔해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사십을 넘게 산 광산자가 처음 보는 완벽한 몸이었다. 그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감탄하고야 말았다.
‘이런 무골(武骨)이 있나.’
어릴 적 연이 닿았으면 반드시 제자로 들였을 것이다. 성격이 어떠하든, 단순 외양만으로 탐이 나는 인재는 처음이었다.
“당신은 장문인이 아니군.”
극존대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그냥 넘기기엔 다소 건방진 말투다. 적어도 광산자는 그렇게 느꼈다.
사아아악.
매화검수들의 예기가 더욱 살벌해졌다.
광산자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거세게 피어오르던 예기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광산자라 하오. 들어 본 바 있을 것이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 본 적 없는데.”
“……뭐, 됐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당연하지. 일단 사과부터 받아야겠어.”
광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초출인가?’
설마하니 이립(而立)도 안 된 젊은 놈에게 저따위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뭐가 됐든 패는 저쪽이 쥐고 있는바, 한 번 더 참을 수밖에.
광산자가 백요를 돌아보았다.
“내 누누이 성질 죽이라 했거늘.”
백요의 얼굴에 은근한 불만이 떠올랐다. 상대가 장로라 감히 대놓고 표하진 않았지만.
“죄송합니다.”
“사과하거라.”
“……알겠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백요가 떨떠름한 얼굴로 서너 걸음 나오더니 짧게 포권했다.
“미안했소.”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빈다는 건 진심 어린 자책을 기반으로 한다. 즉, 백요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나한테 사과하냐?”
“……?”
“네가 모욕한 상대는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다.”
백요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서량이 엄지로 가리킨 사람은 마동필이었던 것이다.
“대가리 확실히 숙이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세세하게 열거하고 인정한 후,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어라. 사과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서량이 중얼거렸다.
“화산은 문도에게 기본 소양과 예의도 안 가르치나? 이건 뭐 엉망진창이군.”
혼잣말에 가깝지만 이곳에 고수가 아닌 자는 한 명도 없다.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단 뜻이다.
백요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이 개 같은……!”
“백요.”
“…….”
“백요!”
“……예, 장로님.”
“저이의 말대로 하거라.”
백요가 당황한 얼굴로 광산자를 보았다.
“장로님?!”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매화검(梅花劍)을 회수하겠다.”
매화검을 회수한다는 것은 매화검수의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뜻이다.
백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랑스러운 매화검수가 매화검을 회수당한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수치다. 소문이 돌면 화산파 내에서도 매장당할 만한 일이다.
백요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져 손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사죄를 받아 주십시오.”
마동필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동필은 입맛을 다셨다. 소교주님을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절단을 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았네.”
저도 모르게 하대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백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사형제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이런 치욕을 당했다.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만 같았다.
광산자가 서량을 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분란은 대충 마무리된 것 같소.”
더 이상 튀지 말라는 경고성이 담긴 말이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뭐, 번갯불에 콩 굽는 모양새긴 하지만 이쯤에서 마무리 짓기로 하지.”
“들어가시겠소?”
“그러지.”
광산자가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그의 눈빛은 극도로 싸늘해져 있었다.
‘거래가 끝나면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
이쯤 되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어느 정도 건방은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저놈들은 도를 넘어섰다.
화산 검수의 사과를 받았다? 그 사과는 반드시 회수될 것이다.
부서진 문을 넘어간 광산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는 두고 갈 것이오?”
“당연하지. 마차 몰고 여길 어떻게 들어가나?”
광산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갑시다.”
재차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하는 광산자.
그는 볼 수 없었다. 그의 싸늘한 눈빛보다 백배는 더 지독하고, 천배는 더 흉악한 서량의 표정을.
그렇게 마동필과 일행을 밖에 남겨 둔 서량이 홍산자를 만나러 들어갔다.
“장문인.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이게.”
문이 열리고 서량이 안으로 들어섰다.
홍산자가 차가운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예민한 감각으로 바깥에서 일어난 분란을 모두 들은 그였다. 당연히 서량을 보는 눈빛이 고울 수 없었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이자인가.’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과연 그가 기억하는 장문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무공은 장문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서량은 뚜벅뚜벅 홍산자의 맞은편으로 걸었다.
들어오자마자 인사부터 할 줄 알았더니 그마저도 생략한다. 광산자는 당황했고 홍산자의 눈빛은 갈수록 싸늘해졌다.
그렇게 홍산자의 맞은편에 선 서량이 짧게 포권했다.
“화산 장문인을 뵙소.”
“…….”
“서 호위장이라 불러 주시오.”
홍산자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자네는 참으로 예의가 없군.”
“예의라? 예의 좋지.”
서량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앞서 분란이 없었으면 나도 적당히 웃는 낯으로 대했겠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필요가 있겠소? 거래라 했으니, 말 그대로 거래만 하고 끝냅시다.”
“화산의 장문인을 앞에 두고도 그따위 언사를 내뱉다니, 자네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아예 사적인 대화 자체를 차단해 버린다. 홍산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력한 노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미리 알렸다시피 우리에겐 철혈성주가 아끼는 첩이 있소. 덤으로 그 호위까지 잡아 뒀지만, 그놈이야 상품 가치가 없을 테니 제끼고.”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사시겠소?”
“산다…… 이것 참 웃기는 녀석이로군.”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려 했는데 그게 안 된다. 홍산자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냥 넘겨주는 게 아니라 사라고?”
서량이 피식 웃었다.
“거래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거요? 그럼 공짜로 날름 가져갈 생각이셨소? 순진하군.”
“네놈이야말로 순진하기 짝이 없구나.”
홍산자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대화산파는 언제나 구대문파의 선두에 서 있다. 그리고 난 그런 문파의 장문인이야. 가져다 바쳐도 모자랄 판에 사라? 주제도 모르는 놈!”
쿠구궁.
홍산자의 몸에서 강력한 기파가 뿜어졌다. 화산 최강의 무공 자하신공(紫霞神功)의 압력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자하신공은 소림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무당의 순양무극공(純陽無極功)과 같은 선상에 놓인 극상승의 신공이었다.
선도술법은 물론 도가 무도까지 아우르는 흔치 않은 무공이란 말이다.
엇비슷한 경지라면 자하신공을 익힌 무인을 이기기 어렵다. 한 수 위, 아니 두 수 위의 고수라도 잡아낼 수 있는 무공이 자하신공이었다.
초절정고수가, 그토록 대단한 무공을 작정하고 개방해 압력을 선사하고 있다. 그 압력에선 누구도 쉬이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주제도 모르는 쪽은 그쪽 같소만.”
홍산자의 안광이 일렁였다.
그 눈빛이 발하는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전력은 아니라지만 설마 이 젊은 놈이 자하신공의 압력 아래서도 자유로이 입을 놀릴 수 있을진 몰랐다.
서량이 검지로 탁자를 툭툭 쳤다.
“천하 검문(劍門)의 수좌를 다툰다고 하나, 엄연히 도문이거늘. 그 문파의 수장이란 작자가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한다?”
“……!”
“이거 그림 좀 나오겠는데.”
“네놈…….”
홍산자의 볼이 씰룩였다.
“정체가 무엇이냐?”
“서 호위장이라 부르라 했잖소.”
“대체 어떤 놈이기에 신기(神氣)의 압력을 버틸 수 있는 것이냐? 너처럼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를 구축한 고수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이건 뭐 대화가 안 되는군.”
순간 홍산자의 눈이 번뜩였다.
“네놈, 설마하니 철혈성주나 의천맹주가 비밀리 키운 제자라도 되는 것이냐?”
뜬금없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다.
느닷없이 철혈성주의 첩을 납치했다면 성의 사정에 제법 밝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부 사람일 확률이 높다.
사파 놈들이니 제자가 사부를 배신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의미로 의천맹주를 떠올릴 만도 하다. 의천맹주는 음험하기가 천년 묵은 독사를 방불케 했다.
그런 인간이라면 제자를 시켜 화산을 함정에 빠트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 홍산자의 생각은 제법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해선 안 되었다.
삼 년밖에 누리지 못한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휘두르고 싶었다면, 절대 뱉어선 안 될 말이었다.
“의천맹주…… 의천맹주라.”
스르륵.
서량의 머리카락이 꿈틀거렸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가 그의 전신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흔들거리는 머리카락과 펄럭이는 장포 자락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그놈의 제자라고?”
본능적으로 마기는 억눌렀지만, 기질 자체가 무지막지했다. 홍산자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콰득.
탁자 끄트머리가 부서졌다. 양손으로 쥐고 일어나려 했지만 치솟는 분노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서량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웃음소리는 없었다.
“사실 고민하고 있었다. 너희를 어떻게 할지.
쥐고 흔들어 볼지, 아니면 그냥 박살을 내 버릴지. 처음에는 죄다 묻어 버리려고 했었어. 그게 속 시원하고 편하니까.”
천천히 일어나는 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위압감이 번져 나왔다.
“너희 문도들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놈들이라면 차라리 놔두자.
철혈성주의 첩을 던져 주고 제대로 날뛰어 보게 하자. 그것이 결국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
우우우우웅.
발산하는 기파가 서서히 그의 오른손으로 모여들었다.
“역시 쓸데없는 고민은 안 하는 게 좋았어. 그렇지?”
홍산자가 버럭 외쳤다.
“광산!”
파아아악!
광산자의 죽엽수(竹葉手)와 홍산자의 추영장(追影掌)이 단숨에 서량에게로 쏘아졌다.
서량의 눈이 무시무시한 분노를 토해 냈다.
“주제를 깨닫게 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