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화산의 이름값 (5)
콰드드득!
홍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콰득! 콰드득!
광산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막다니?!’
죽엽수(竹葉手)와 낙화추영장(落花追影掌)은 화산일절로 꼽히는 무공들이었다.
내력이 강건하지 않아도 운용의 묘(妙)만 제대로 깨달으면 돌담 하나 허무는 것쯤은 우습다.
하물며 초절정고수인 홍산과 광산이 내친 장법이라면 머리통만 한 철구(鐵球)도 으깰 만한 위력이 나올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장법이 한 사람의 손에 막혔다.
우우우웅!
강력한 기파가 피어오르는 서량의 육신.
한 손으로는 광산자, 다른 한 손으로는 홍산자와 손을 마주하고 있다. 손과 손 사이엔 무시무시한 역장이 둘러쳐졌다.
분노한 와중에도 용케 마기는 뿜어내지 않는다. 서량의 두 발이 땅을 부수며 다섯 치나 밀린 이유였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퍼펑!!
폭음과 함께 홍산자와 광산자가 방 끝으로 쭉 밀려났다.
자하와 양오로 보호받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폭산경으로 터진 경력의 여파를 온전히 받아 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완전히 얼이 빠진 두 사람.
서량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구유마공을 개방하지 않아도, 군림마황기를 뽑아내지 않아도 견딘다.
마동필이 마기를 개방하지 않고도 소호향의 호위들을 쓰러트렸던 것처럼,
그 역시 마기가 아닌 무속성(無屬性)의 내력만으로도 화산파의 간판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양 주먹을 단단히 움켜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인질 교체의 시간이다.”
쿠웅!
강한 진각과 함께 자세를 낮춘 서량이 왼 주먹을 한껏 뒤로 뺐다.
“부디 도망치지만 마라.”
파아악!
거리를 좁힌 서량이 주먹을 뻗었다.
홍산자의 눈이 흔들렸다.
‘강하다!’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대체 이놈 정체가 무엇이냐!’
놀라서 먼저 공격하긴 했지만, 일단 싸움부터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상대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결국 실력 행사뿐이다.
홍산자가 다시 한번 쌍장을 휘둘렀다. 이전보다 훨씬 더 웅혼한 낙화추영장이었다.
콰아앙!
방 한쪽 면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두 사람의 경력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파아악!
광산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주춤거리는 서량에게 날아와 주먹을 휘두르는데, 도가의 무공답지 않게 강맹한 위력이 눈부셨다. 화산비형권(華山飛形拳)이었다.
훅! 쿠구궁!
비형권의 권풍이 땅을 반 장이나 갈아 냈다.
어느새 그 자리에서 사라진 서량이 홍산자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광산자의 눈이 흔들렸다.
‘빠르다!’
힘과 위력은 강하지만 그렇게 빠르진 않은 상대.
틀렸다. 비록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순간적인 대응 속도만큼은 두 사람을 상회한다. 그야말로 번개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서량이 발이 홍산자의 머리통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려 내리치는 모습이 마치 도끼로 찍어 내리는 듯했다.
콰앙!
널찍한 방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광산자와 함께 반대편 방 끝으로 물러난 홍산자, 그의 두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엄청난 파괴력!’
땅을 내리찍은 발 주위로 거미줄 같은 금이 번졌다.
기를 모아 방어할 시간이 없어 내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저걸 막으려 들었다간 최소한 팔에 금이 갔을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들.”
순간 홍산자와 광산자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졌다.
무덤덤한 얼굴로 무지막지한 도발을 해 오는 상대. 하물며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상대라 한들, 이런 모욕을 받고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놈!”
파아아앙!
시작은 광산자였다.
다섯 방위를 짚으며 다가오는 모습에서 표표한 매화 향기가 난다. 화산일절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였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퍼어엉!
광산자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덜컥 멎었다.
치고 들어가는 보법의 맥을 짚고 경력을 터트리는데, 멋도 모르고 다가갔다간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뻔했다. 신기(神技)의 보법으로도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이놈…….’
파아앙!
잠시지간 힘을 모은 홍산자가 광산자를 지나치고 나아가 서량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다섯 합을 교환하는 두 사람, 엄청난 힘의 여파에 방의 북쪽 벽면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제힘을 다 쓰지 않고 있다!’
광산자의 판단은 정확했다.
서량의 내공은 굉장한 깊이를 지녔다. 믿을 수 없게도 화산 장문인인 홍산자를 한참이나 웃도는 깊이였다.
하지만 정작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순간에도 모든 내력을 쏟아붓지는 않는 것 같다. 일부러 그러는 건진 알 수 없지만 결국 힘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저 무공.’
퍼퍼퍼펑!
화산의 온갖 절학들을 상대로 속도감 넘치는 권격(拳擊)과 장타(掌打)를 휘두르는데 가히 금성철벽과도 같은 위용을 뽐냈다.
뚫고 들어가기는커녕, 워낙 탄탄한 방어에 도리어 휩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즉각적으로 투로를 짜 내는 능력이 말도 안 되는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정형화된 초식이 아니야. 그저 순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뿐이다. 진신절학은 꺼내지도 않았어.’
기가 막힌다.
‘만약 저놈이 진짜 무공을 꺼내 든다면……?’
순간 오금이 저려 왔다.
놈은 내력, 초식, 외가 무공 모든 것을 제한한 채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초절정고수인 화산 장문인을 몰아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광산자가 외쳤다.
“장문 사형! 물러나야……!”
콰앙!
“큭!”
홍산자가 비틀거리며 일 장이나 물러났다.
서량 역시 두어 걸음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떠한 충격도 받지 않은 듯 재차 덤벼드는데,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홍산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저놈 몸뚱이는 도대체?!’
완벽하게 다듬어진 신체.
무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천골(天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일격에 바위를 으스러트릴 만한 필살의 무공을 받아 내면서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는 듯했다.
외공(外功)을 단련해서 저런 게 아니다. 외공만 단련해서는 저런 몸이 될 수가 없다.
근육 줄기 하나, 혈관을 도는 핏방울 하나에도 진기가 꽉 들어차 있다는 뜻이다.
융통무애(融通無碍)한 기(氣)가 의식하지 않아도 몸을 보호하는 경지다. 화산의 현역 고수들 중 누구도 저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저 육신, 저 실력이 증명하는 것은 하나.
“화경?!”
파아아앙!
순식간에 날아온 서량이 홍산자의 양 손목을 잡아채고는 무릎으로 그의 얼굴을 찍어 갔다.
퍼엉!
홍산자의 귀가 살짝 찢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고개를 틀어서 살았다. 무릎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기(勁氣)가 뒤쪽 탁자 하나를 깨부쉈다.
‘괴물!!’
박투술의 슬격(膝擊)으로도 경풍(勁風)을 쏘아 낸다.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휘이이익!
홍산자의 몸이 그대로 회전했다. 그의 손목을 틀어잡은 서량이 중심을 무너트린 것이다.
퍼어억!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자세가 무너졌음에도 각법을 내쳐 쇄골을 가격했다. 빈말로도 괜찮다 할 인성은 아니지만, 실력만큼은 화산 장문인의 자격이 있었다.
서량의 발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콰아앙!
땅에 떨어진 물건을 걷어차듯 홍산자를 차 버린다. 홍산자의 몸이 반대쪽 벽을 박살 내며 그대로 날아갔다.
“제법이구만.”
오른팔을 빙빙 돌려 쇄골에 남은 잔통을 없애는 서량.
광산자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술(術)로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틀렸어. 과연 화산은 화산이라는 건가?”
파아아악!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광산자가 몸을 돌려 뒤쪽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애초에 둘이서 합공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다.
강호공적(江湖公敵)이나 살귀가 아니면 정파 무림에서 합공은 쉽게 쓰는 방법이 아니다. 정정당당, 일대일의 겨룸을 중시하는 것이 명문의 법도였다.
하지만 저 둘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위협을 느꼈다고는 하지만 정신없이 몰아쳐 오는 게, 놀랍게도 합공이 익숙해 보일 정도였다.
한두 번 저랬던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강적이라면 서슴없이 손을 보태 제거한다.
서량에겐 당연한 방법이지만, 저들에게 당연해선 안 된다. 하물며 도문의 장문인과 장로가 아닌가.
심지어 혼자서 안 되겠다 싶으니 도주까지 감행한다?
“완전히 썩었군.”
파아앙!
광산자의 뒤를 쫓으려던 서량은, 문득 한 줄기 검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량이 재빨리 신형을 멈추었다.
콰콰쾅!!
그의 발 앞 반 장 거리에, 무시무시한 검기흔(劍氣痕)이 새겨졌다.
마공을 개방하지 않은 상태로 받아 냈다면 틀림없이 몸이 절단됐을 예리함이었다. 화산 최고급 무공, 이십사수(二十四手)의 매화검법이 펼쳐진 것이다.
“이놈…….”
푸스스.
돌무더기를 헤치며 일어난 홍산자의 이마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디에 모셔 두고 있던 걸까? 손에는 고색창연한 보검이 들려 있다. 화산 장문인의 상징이라는 화천신검(華天神劍)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체가 무엇이냐?”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내 정체가 그렇게 궁금한가?”
“이립도 안 되는 연배에 그만한 무공을 쌓은 자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진정 반로환동(返老環童)의 고수라도 되는 것인가?”
“반로환동이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홍산자의 볼이 씰룩거렸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철혈성주의 첩을 주겠다 한 것은 거짓이었군. 필시 날 제거하려는 누군가의 수작이겠지.”
“그럴 리가 있나.”
“누군진 몰라도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대화가 필요치 않은 놈이었다. 이놈은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을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차차차창!!
하늘 높이 쏘아지는 무시무시한 검기 다발이 있었다.
팔방으로 난무하는 검기 하나하나에 강력한 진기가 깃들었다.
강건하진 않지만 예리하기 짝이 없고, 빠르진 않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검기는 분명 매화검법이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시작했군.’
홍산자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함께 온 이들은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다.”
“그게 도문의 장문인으로서 할 말이냐?”
“닥쳐라! 감히 화산을 농락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응.”
“……뭐라고?”
순간 홍산자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파를 느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광산자가 매화검수들을 호출하기 위해 달려간 그 자리였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북방의 한기를 머금은 찬바람이었다.
쩌저저저적!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강력한 한기.
무너진 돌담이 얼어붙고 있었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그 광경에 홍산자의 눈이 흔들렸다.
‘빙공(氷功)?’
음한기공(陰寒氣功)은 양강한 무공보다 그 수가 적다.
이 정도로 농밀한 한기를 뿜어내는 무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온 천하를 뒤져도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머리 한구석을 스치는 섬뜩한 이름.
“서, 설마 네놈들 북…….”
“북에서 왔든 남에서 왔든.”
훅!
서량이 홍산자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넌 오늘부로 장문인 노릇 끝났어.”
그의 권장(拳掌)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쩌저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