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염라, 그리고 마군 (1)
껄껄껄 터트리는 웃음에 흡족한 기색이 감돈다.
“여하간 금번에 아주 감사했습니다.”
“허허, 내게 감사할 것이 무에 있소. 그저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약간의 도움을 줬을 뿐이오.”
“하하하! 맹주의 선의가 본문에 도움이 되었으니 아니 감사드릴 수 없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담사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부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소. 의기(義氣)와 협심(俠心)으로 똘똘 뭉친 우리가 아니오? 풍랑이 불고 벼락이 쳐도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을 것이외다.”
“맞는 말씀입니다. 맹주님의 의지가 그리 확고하시니 우리도 믿고 따르는 것이지요. 역대 어떤 맹주가 구파 장문인들의 이리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겠습니까?”
“얼굴에 금칠 그만하시구려. 그러다 이 늙은이, 체통 없이 방방 뛰겠소이다.”
종남파 장문인, 상각(詳覺)이 크게 웃었다.
“방방 뛰셔도 되지요. 암요.”
상각은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담사영은 차분해 보이는 미소를 베어 물었다.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화산 장문인이 이번에도 제법 몹쓸 짓을 획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무슨 말씀이시오?”
상각이 눈을 빛냈다.
“섬서와 호북 사이에 작은 상단을 열었답니다. 당연히 자파의 자금은 아닌 듯하고, 어수룩한 상회들을 포섭한 듯싶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소?”
말은 그리하면서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다.
상각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문파의 사업 확장이야 제 역량이라지만,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맹회에 알리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선대 어르신들 모두가 동의했던 사항이거늘 규정을 위반했어요. 너무 제멋대로입니다.”
“맞는 말씀이오.”
담사영이 수염을 쓸었다.
“일간 화산 장문인과 차나 한잔 마셔야겠소. 자꾸 그리 튀어서 좋을 게 없거늘.”
“하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키라고 만든 규정과 법도를 함부로 어겨서는 아니 되지요.”
상각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맹주님의 공사가 다망하신 걸 모르지 않습니다. 혹여 손이 부족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종남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허허, 종남에서 두 팔 걷고 도와준다면 이 사람이야 고맙기 그지없지.”
“하하하!”
겉으로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지만, 속으로는 음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그래, 그렇게 망가지시게.’
화산 장문인 홍산자와는 사사건건 부딪치는 사이였다.
천만다행이도 맹주는 종남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맹주는 정파 연합의 수장이니, 사고만 치는 화산 장문인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물론 화산이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수백 년 역사가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지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대의 화산은 결코 종남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담소를 주고받을 때였다.
“맹주님께 보고 드립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상각의 미소가 짙어졌다.
타인이 앞에 있는데도 서슴없이 보고하라 한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가까이 여긴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딱 거기까지였다.
“화산 장문인 홍산자가……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헉!”
상각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담사영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납치를 당했다고? 화산 장문인이?”
“그, 그렇습니다.”
“대체 누구에게?”
“정확한 정체는 파악 중입니다. 다만…….”
무인이 침을 삼켰다.
“격전지에서 빙궁의 무공으로 추측되는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뭣이!”
상각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북해빙궁. 새외사궁의 수좌.
의천맹과 손을 잡은 나머지 삼궁과는 달리 연락 자체를 받지 않았던 신비의 문파였다. 그런 그들이 화산파 장문인을 납치했다고 하는 것이다.
담사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주는 당연히 아닐 테고, 소궁주 역시 아닐 것이다. 그렇지?”
상각이 담사영을 보았다.
무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매화검수들에게서 흘러나온 얘기를 들어 봤을 때, 빙궁주의 여식일 확률이 높습니다.”
“계집아이라……? 빙궁의 여식은 중원 유람을 많이 다녔다. 그러다가 야수궁에 잡혀 버렸지.”
담사영의 눈에 작은 흥미가 일었다.
“야수궁에서 죽었다고 생각했거늘,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장강 이남에서 벌어진 일은 의천맹에서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숱하게 많은 첩자들을 파견했지만, 천마신교의 방어가 너무 탄탄해서 세작을 심는 데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야수궁과 손을 잡았기에 운남 지역의 정보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손을 잡았다고 해서 모든 정보를 알려 주진 않았다. 적당히 필요한 정보 이외의 것을 공유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야수궁주가 죽었다는 소문도 도는 판에…….”
“예? 야수궁주가 죽었다니요?”
담사영이 손을 저었다.
“그저 소문에 불과할 따름이외다.”
“아, 그렇습니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오.”
수염을 쓸던 담사영이 눈을 빛냈다.
“빙궁의 여식은 일류, 잘해야 절정고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정파 무림 최고의 권력자라면 흘려들어도 그만일 정보. 하지만 그는 용케 그것을 기억해 냈다.
“격전지에 누가 있었느냐? 설마 화산 장문인 혼자 그곳에 있었을 리는 없겠지. 그럴 위인이 아니야.”
“예, 광산자와 매화검수 오십이 있었답니다.”
담사영의 눈이 깊어졌다.
“화산의 일장로와 매화검수 오십이라?”
그 정도 전력이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 하나를 하룻밤 새에 괴멸시킬 전력이었다.
“그러고도 납치를 당했단 말이지? 분명 방수가 있었겠군.”
“맹의 정보단에서도 방수를 상정하고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몇몇 특이 사항을 제외하곤 아직까지 일행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특이 사항?”
“이것을.”
무인이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펼친 담사영이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독과 암기를 쏘아 대는 마차라니? 이건 또 무슨?”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마차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사천당가에서도 그런 물건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인원은 셋, 혹은 넷으로 추측되고 호위무사의 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순간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섬서로 길을 잡았을 확률이 높다고?”
그가 상각을 바라보았다. 아직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상각의 눈에는 강렬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화르륵.
담사영이 서신을 태우며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의천무림연맹의 일각을 담당하는 화산파의 수장이 납치된 것은 맹 차원에서도 그냥 있을 수 없는 문제다.
총력을 기울여서라도 납치범들의 위치를 찾아내도록.”
“명을 받듭니다!”
“단주에게 이 말도 전해라. 그 마차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조사하라고.”
“알겠습니다!”
무인이 재빨리 돌아갔다.
상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마차가 어디에서 왔는지 조사하라니, 거기까지 확인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물론이오. 보고를 들어 보면 빙궁의 여식이 타고 온 마차인데, 심지어 그 마차가 암기와 독을 쏘아 낸다고 하오.
어떤 마차인지 상상도 가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만한 물건을 만들어 낼 만한 단체가 온 천하에 많지 않다는 것이오.”
“……?”
“야수궁에 잡혀 있던 빙궁의 여식이 갑자기 호북에 나타났소.
나아가 화산 장문인을 제압할 만한 실력자까지 동행 중이오. 그렇다면 범위가 더더욱 축소될 수밖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상각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설마?”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상상은 금물이오. 게다가 격전지에서 발견된 건 빙공의 흔적뿐이오. 마공의 흔적이 있었다면 반드시 보고가 되었을 것이외다.”
“……그렇긴 합니다만.”
“오히려 철혈성이 빙궁과 비밀리 연수했다는 게 훨씬 신빙성이 있소.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미리미리 대비하자는 것뿐이오.”
담사영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은 싸늘한데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정한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왠지 주변이 어둡게 느껴지는 듯했다.
‘북행한다는 건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것. 하나 그 남쪽의 기준이 어딘지를 모르겠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담사영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
“말씀하십시오, 맹주님.”
“어떻소? 홍산자가 섬서와 호북 경계에 만들었다는 상단, 조사해 보고 싶지 않으시오?”
상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를 말입니까.”
“정보단을 한나절 동안 통제하겠소.”
정보단을 통제하겠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종남파 이외의 구파에 정보가 가는 것을 잠시 막아 주겠다는 뜻. 이 사태를 종남이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상각이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하하! 맡겨 주십시오.”
“조심하시오. 오십의 절정고수를 뚫고 화산 장문인을 납치한 고수가 있소. 족히 곱절의 전력은 쏟아부어야 할 것이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움직이면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 종남입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건네 드리겠습니다.”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홍산자가 심은 매실(梅實), 상 장문인의 것이 될 것이외다.”
* * *
“읍! 으으읍!!”
소호향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움직이지 마. 확 모가지 따 버릴라.”
“…….”
“옳지.”
그녀를 들쳐 메다가 거목 옆에 내려놓은 서량이 손을 털었다.
소호향 옆에는 차위가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피폐하기가 말도 못 할 정도였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서량이 손가락을 튕겼다.
푹푹! 티잉!
두 줄기 지풍이 차위의 단전을 두들겼고, 남은 하나의 지풍은 차위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찢었다.
“이각 후, 봉인해 두었던 내공이 풀릴 것이다.”
“쿨럭! 콜록콜록!”
“그동안 고생했다.”
서량이 품에서 수통과 육포 몇 덩이를 꺼내 던졌다.
“급하게 먹으면 체해. 살살 녹여서 먹어.”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격이었다. 차위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네놈……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얼마나 힘든 강행군이었는지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찾아내는 거야 상관 않겠다만 죽이진 못할 거다. 너희들 말고도 우리 목 노릴 놈들이 많을걸?”
“…….”
“잘 가라. 아, 그리고.”
서량이 소호향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좋은 호윈데 너무 뭐라고 하진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서량이 마차에 올랐다.
앵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소…… 아니, 호위장님께선 다정하세요.”
“엉?”
“물과 음식까지 주셨잖아요…….”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머뭇거린다.
서량이 앵화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납치범한테 다정하다니!”
“으억.”
그때, 여상린이 눈을 떴다.
“후우.”
뱉어 내는 숨결에 뭉근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괜찮냐?”
“전혀요.”
“그게 빙백신공이냐? 네 오라비가 말하던?”
“네. 어마무시하죠?”
“아찔해 뵈더라.”
여상린이 고개를 저었다.
“호위장님이 사고만 안 치셨어도 안 꺼내 들었을 무공이죠.”
“덕분에 난 네 실력의 한계를 봤고 말이지.”
“할 말 없게 만드시네.”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뭘. 게다가 동필이 말 들어 보니, 너도 제법 주둥이 좀 털었다며?”
“입 싼 양반 같으니.”
여상린이 옆을 힐끔거렸다. 마차 문 쪽 바닥에 밧줄로 꽁꽁 묶인 홍산자가 너부러져 있었다. 소호향과 차위에 비하면 지나치리만치 비참한 몰골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수명 줄겠어요.”
“왜?”
“막상 진짜로 화산파 장문인을 납치해 버리니까 등골이 오싹해지는데요?”
“너 얼굴은 웃고 있는데?”
“아.”
“걱정하지 마라. 든든한 아군이 발바닥에 땀 나도록 움직여 주고 있으니까.”
“……또 무슨 음흉한 일을 꾸미고 계신 거예요.”
“음흉하다니? 제대로 된 방어막을 쳐 두는 거지.”
서량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휙휙 바뀌어 가는 마차 밖 전경이 황량해 보였다.
“성격 급한 놈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