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염라, 그리고 마군 (2)
사흘을 내리 달린 일행은 관도에서 제법 떨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이제는 노숙도 일상이 되어 버렸다.
후다닥 자리를 만드는 마동필,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오는 앵화, 아직 몸이 회복되질 않아 여전히 운기조식에 열중인 여상린.
각기 할 일을 하는 일행을 훑어본 서량이 말에게 먹이를 주었다. 하오문에서 푹 끓인 콩을 조달해 주는 덕분에 먹이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각자가 할 일을 마친 일행이 모닥불 앞에 모였다.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하면 정오쯤에는 보강(保康)에 도착할 거야.
거기서부턴 섬서로 뻗은 좋은 관도가 있으니까 여행이 한결 편해질 테지. 오늘까지만 고생한다 생각하고 쉬어.”
“주루나 객잔에는 안 들러요?”
“들를 거야. 하지만 현(縣)에는 들르지 않아.”
여상린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사흘 동안 잘 먹고 푹 쉬었는지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정파 측에서 눈이 뒤집혀 찾고 있겠죠?”
“당연하지.”
“그러고 보니 이거 안 물어봤네요. 매화검수들 어떻게 했어요? 죽어라 운기만 하느라 신경도 못 썼네요.”
서량이 힐끔 남쪽을 바라보았다.
“쫓아오고 있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
여상린이 고개를 저었다.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들이라더니.”
이름 모를 적이 장문인을 사로잡았는데 감히 덤비지도 못한다.
서량의 존재감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이건 너무했다. 사문의 수장이 적도의 손에 넘어갔으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어 구해 낼 의기가 있어야 한다.
그게 정파 무림이다.
한데 겁을 먹고 멀리서 따라오고만 있다니,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가.
하다못해 노리는 게 있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새끼 오리처럼 졸졸 쫓아 다니고만 있는 것이다.
“뭐, 나는 그걸 나쁘게 보지 않아. 대적할 상대가 아니니 일단은 지켜보는 것, 모양새는 좀 빠지지만 나름 현명한 대처야.”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진심이 묻어 나왔다.
백방으로 손을 써도 어찌하지 못할 상대라면 기다렸다가 복수라도 해야 한다.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여상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소교주님의 생각이고요. 원래 정파는 저러지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의와 협, 충의(忠義)와 도리를 최우선으로 하기에 명분도 확실하다. 정파 무림이 민중의 지지를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파 무림이 지금껏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산파의 꼴을 보니 정파도 썩을 대로 썩어 버린 모양이다.
서량은 문득 이천상의 말을 떠올렸다.
- 놈은 문파의 수장들을, 협의(俠義)의 상징이라는 그들을 타락시켰다.
의천맹주 담사영에 대한 이천상의 평가는 실로 인상적이었다.
천 년 묵은 독사. 이무기만큼 간사하고 구미호만큼이나 영악한 자.
다른 누구도 아닌 이천상이 직접 내린 평가다. 그만큼 위험한 자라는 뜻이리라.
물론 담사영에 대해선 서량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저대로 놔두시게요?”
“엉.”
“거치적거리잖아요? 그냥 싹…….”
“묻어 버리라고?”
“뭐, 말하자면 그렇죠?”
“희대의 살성(煞星)이 다 됐군.”
“어머, 흉해라.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서량이 육포를 씹으며 말했다.
“내버려 둬도 돼. 좀 있으면 정파 무림 전체가 우리를 죽이려 들 텐데, 저런 떨거지 정도야 뭐.”
“삼십이 넘는 절정고수 집단인데 떨거지라뇨. 게다가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전력을 하나라도 줄이는 게 좋잖아요?”
서량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여상린이 못 말린다는 듯 육포를 집어 들었다.
“생각해 둔 바가 있으시군요?”
“대충.”
공유할 생각은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이 음흉한 인간의 머릿속에는 정파 놈들을 엿 먹일 온갖 방법들이 판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냥 지금껏 해 왔던 대로 하면 된다. 말을 멈춘 여상린은 신나게 육포를 뜯어 댔다.
마동필이 은근슬쩍 물었다.
“소교주님.”
“응?”
“혹…… 마공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화산 장문인을 잡을 때 말입니다.”
서량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냐? 그게 느껴지디?”
“긴가민가했습니다. 극히 미세해서 확신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허, 대단하구만? 그렇게 정신없던 상황에서 용케 그걸 느꼈어.”
서량이 놀랄 만도 했다.
그가 마기를 발산한 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광산자를 방심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하지만 마동필이 그걸 알아챌 줄은 몰랐다. 워낙 정신이 없었던데다, 심지어 거리도 제법 떨어지지 않았나.
‘아무리 무공이 성장했어도 그러긴 쉽지 않을 텐데?’
새삼 감탄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마동필은 항상 놀라움을 안겨 주는 녀석이었다.
자신이야 전생의 기억도 있고, 최고급의 무공까지 창안해서 익혔기에 빠른 성장이 가능했지만 마동필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며 묵묵히 단련했을 뿐이다. 그러더니 어느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일가(一家)를 이루지 않았는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살짝 개방했지. 곧바로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그러셨군요.”
“근데 왜?”
잠시 고심하던 마동필이 말했다.
“아무래도 마공을 개방하지 않고는 제 실력을 내기 어려운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하여 적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도 좋은 전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이 없었음에도 자신이 마공을 개방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니 성장이 빠를 수밖에.’
무뚝뚝하고 고지식할 것 같지만 사고의 영역이 넓다. 진정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뜻하리라.
“답이 안 나오는 상황 아니면 섣불리 시도하진 마라.”
“아, 물론입니다. 상황에 따라 여 소저와 앵화의 도움도 적절히 받을 수 있을 테니, 앞으로는 그런 수법을 쓰지 않아도 될 확률이 훨씬 높겠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본인도 뭔가를 느끼고 있는 거겠지.’
항상 자신을 호위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모두 함께 싸워 이겨 나가겠다는 생각은 안 해 봤을 녀석이었다.
내상을 감수하고 시간을 끌어 준 여상린, 제때 마차를 운용해 준 앵화를 보며 생각이 트인 모양이다.
이제야 마동필도 두 사람을 전우(戰友)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쉬고들 있어라.”
“어디 가시는지요?”
“명상.”
마차로 간 서량이 홍산자를 힐끔거렸다. 홍산자는 여전히 바닥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다. 아마 사나흘은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덜컹!
마차 바닥을 열어 길쭉한 물건을 꺼내 든 서량이 일행과 떨어진 곳으로 가 앉았다.
‘여전히 묵직하군.’
시커먼 천으로 둘둘 싸인 물건은 그 길이만 다섯 자가 넘어갔다. 바로 이천상이 제련해 준 마도(魔刀)였다.
‘용린도보다 칼날은 짧아졌지만, 대신 손잡이가 엄청 길어졌어. 도병(刀柄)이 거의 단창 길이야.’
칼날보다 손잡이가 조금 더 길다. 도신(刀身) 이 척 오 촌, 도병만 삼 척이다. 자루가 달린 대도(大刀) 계열의 무기였다.
굳이 도병을 굵고 길게 만든 것은 도신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다.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 길고 단단한 한철(寒鐵)을 써서 살상의 효율을 극대화했다.
중병(重兵)이자 장병(長兵)이다. 용린도보다 다루기가 어려워 보였다.
‘한바탕 휘둘러 볼까?’
여태 이 천을 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아직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천마도(天魔刀)는 마기를 일절 풍기지 않았다.
이천상의 마기야말로 진정한 선천마기(先天魔氣)라, 그만큼 자극적인 힘을 쏟아붓지 않는 한 진체(眞體)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동필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묵왕검의 진력을 끌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의 서량도 천마도의 진짜 힘을 뽑아낼 수 없다.
‘어차피 배우라고 만들어진 마병(魔兵)이다. 지금은 병기로 쓰지 않아.
되새기고 또 되새겨서 군림마황기의 성취를 올리는 게 먼저야. 이 칼을 쓰는 것은 그 다음이다.’
전생의 기억, 타고난 창의성 그리고 피를 토하는 노력.
하지만 그것 말고도 서량이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언제, 어떤 노력을 어떻게 쏟아부어야 할지를 알기 때문이다.
‘시작해 볼까.’
가부좌를 틀고 다리 위에 천마도를 올려놓은 그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우우웅.
그의 몸에 낮은 진동이 일었다.
뭉클뭉클 모습을 드러내는 청색 마기. 하지만 기파(氣波)가 일정 영역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운기를 하면서도 기도를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난해하다.’
서량의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어.’
하나의 무공을 대성하면 다른 무공을 연성하기도 쉽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구유마공은 독존(獨存)의 무공이라, 다른 무공을 쉬이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군림마황기의 성취가 빠르지 못한 것이다. 군림마황기의 성취를 폭발적으로 올리려면 구유마공을 반으로 갈라야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약 구유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성취가 몇 배는 더 빨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량이 천마도 위에 손을 얹었다.
‘역시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치이이익!
천마도에 손이 닿자마자 손등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렁였다. 도신에 봉인된 이천상의 마기를 되짚어 보려는 것이다.
이천상의 마기를 탐색하자 군림마황기가 강렬하게 박동했다.
선천마기라도 근원은 마황기인지라, 서량의 군림마황기가 공명하여 순도와 크기를 늘리는 것이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
‘괴물 같은 양반.’
이천상은 이 칼을 만들어 주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군림마황기의 성취가 빠르지 못할 것임을, 그 이유가 구유마공 때문임을.
새삼 이천상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자신도 그와 같은 경지에 올라서면,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될까?
우우웅. 우우우웅.
희미했던 청색의 마기가 짙어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님.”
“…….”
“소교주님!”
퍼뜩 놀란 서량이 눈을 떴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마동필이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곤히 주무시고 계시기에 깨우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슬슬 동이 틀 시간이라.”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동필의 말대로였다. 숲은 아직 어두웠지만, 동쪽 인근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묘시(卯時)가 훌쩍 넘었다는 소리였다.
‘언제 잠이 들었지?’
운공을 하다가 졸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서량은 체내의 군림마황기를 더듬었다.
‘……어라?’
상당히 불었잖아?
그동안은 찔끔찔끔 성장하던 군림마황기가 지금은 제법 든든하게 늘어나 있었다. 예상보다 두 배는 더 늘어난 수치였다.
서량이 천마도를 보며 감탄했다.
“이거 아주 물건이네?”
몇 번 잡고 운공을 해 봤지만, 오늘처럼 큰 성장세는 없었다. 귀찮아서 내팽개치려고 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써먹어야 할 듯하다.
“저는 먼저 가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어? 어어, 금방 뒤따라갈게.”
“예.”
마동필을 먼저 보낸 서량이 잠시 고민하다가 문득 저 멀리 떨어진 작은 바위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군림마황기를 끌어 올린 그가 힘차게 장(掌)을 뻗었다.
후웅.
시원한 바람 한 줄기.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바위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커허허험!! 염병, 쪽팔리게.”
얼굴이 붉어진 서량이 냅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필아! 같이 가자!”
헐레벌떡 마동필의 뒤를 따르는 서량.
잠시 후.
푸스스스.
바위 중앙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뚫린 구멍에서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일격에 내부를 터트려 즉사시킨다는 죽음의 무공.
화려한 폭산경과 달리 조용하고 음험하다. 군림마황기의 탈혼장(奪魂掌)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공야치가 찾아왔다.
“상황은 어때?”
“거물이 걸렸습니다.”
“누구?”
“종남파의 장문인, 상각입니다.”
서량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끼가 좋으니 줄줄이 대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