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염라, 그리고 마군 (3)
“다 모였는가?”
“은하검수(銀河劍手) 칠십과 벽산십검(劈山十劍) 전원 모였습니다.”
“장로급은?”
“오장로와 칠장로가 동행중입니다.”
“호오? 칠장로의 폐관이 끝났나?”
“예. 이번 호북행에서 실력 발휘 좀 해 보겠다며 나섰다고 합니다. 섣부른 판단이지만 공력이 훨씬 심후해지신 듯합니다. 오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제 본인과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하하! 그 사람 참, 그렇게 이겨 보겠다고 이를 갈더니 기어이 따라잡았군.”
“그리고 태룡가(泰龍家)가 지원을 하겠다며 함께 나섰습니다.”
상각의 눈이 커졌다.
“태룡가? 근래 사천 사업으로 바쁘지 않나?”
“일이 끝나면 장문인께 술 한잔 올려도 되겠느냐고 전해 달랍니다. 제대로 힘을 써 줄 모양입니다.”
“크핫! 좋은 사람과 술 한잔하는 거야 아니 즐거울 수 없지. 꼭 시간을 내겠다고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태룡가는 섬서에서 이백 년 동안 가업을 꾸려 온 무림 세가였다. 세(勢)는 크지 않지만, 보유한 무사들의 수준은 능히 일류라 불릴 만하다.
당장 태룡가주의 무공만 해도 섬서에서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작정하고 나서 준다면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물론 이 사태의 해결사로 이름을 올리는 건 종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납치범들의 행방은?”
“현재 보강과 방현 사이라고 합니다. 무당산(武當山) 턱밑이지요.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무당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겠지만.”
“예?”
“소림은 모르겠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무당은 나름대로 흐름에 맞게 살 줄 알아. 과거 산중추도(山中追道)의 정책도 거리낌 없이 버릴 작자들이다.”
상각의 눈이 번뜩였다.
“전대의 원로들만 없다면 말이다.”
“전대라 하심은…….”
“삼풍진인 이후 최고의 도인이란 평가를 받던 현천진인(玄天眞人)이 아직 건재해.
전대, 심지어 아직 죽지 않은 전전대 원로들까지도 현천진인을 따르고 있다.”
“현천진인?! 그분이 아직 살아 계십니까?”
“물론이다. 무당파 최초로 검종(劍宗)이라 불리던 괴물이야. 지금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아무도 모른다.”
원무검신(元武劍神) 검종(劍宗) 현천(玄天).
전 세대, 소림의 신승(神僧) 나한권신(羅漢拳神) 적송대사(寂松大師)와 함께 정무쌍신(正武雙神)의 전설을 알린 최고의 검도(劍道) 고수가 그였다.
“현천진인의 영향력은 무당 전체를 좌우한다. 현 장문인은 물론 장로들도 그를 무시할 수 없어. 전대의 괴물과 힘겨루기를 하는 지금, 그들은 납치범들에게 신경 쓸 새가 없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상각이 손뼉을 쳤다.
“자, 모일 사람도 모였고 후원 병력도 생겼다 하니 더 시간 죽일 필요 없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한 자루 보검을 등에 멨다.
“머저리 같은 화산 장문인이나 구하러 가 보자고.”
* * *
“정말 여기서 쉬실 생각입니까?”
“응.”
“사흘 동안 말입니까?”
“뭣하면 나흘도 좋고.”
공야치는 당황했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문제라도 있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현재 종남의 병력이 섬서 남부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들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이틀 안에 들이닥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겠지.”
“…….”
“어차피 한바탕할 거라고 말했잖아. 뭐가 문제야?”
“이곳을 수성(守成)으로 삼아 격파하시겠다는 의도입니까?”
“수성? 수성은 수성이지만 여기서 싸우진 않을 거야.”
“그건 또 무슨……?”
서량이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곧이어 마동필에게 턱짓했다.
“동필이.”
“……?”
“둘이 가서 다 작살낼 거야.”
공야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분이서요?”
“린이는 아직도 회복 중이야. 굳이 무리할 필요 없잖아. 앵화야 제대로 싸울 줄 모르니까 결국 우리 둘이서 해결해야지.”
“그렇긴…… 합니다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모르고 마주하는 것과 알고 부딪치는 건 차원이 달라. 적의 이동로와 전력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습격할 수 있지.”
“……!”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면서 올려다보고만 있는 것도 피곤하지 않나?”
공야치는 새삼 서량의 배포에 감탄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여기가 의천맹의 영역이라서 그렇다.
정파 무림이 휘어잡고 있는 동네이니 한층 더 조심했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까지 신경 썼다.
그것은 충분히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꼭 수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는 없다.
‘혼자 힘으로 소교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서량은 강하다.
그리고 그 강함을 더욱 빛내 주는 것은 그의 능동적인 추진력이었다.
적지에서도 정세를 끌고 가는 저 역동적인 움직임이야말로 서량의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지.”
“예?”
“내가 준비해 달라는 거, 착착 진행되고 있겠지?”
“아, 물론입니다.”
왠지 얼이 빠진 것 같다. 공야치는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소교주님께서 장강에 계실 때, 본문에서 가장 빠른 전서응을 다섯 마리나 보냈습니다. 지금쯤 북해(北海)에 닿았을 것입니다.”
“철혈성은?”
“조용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럼?”
“고수들을 은밀히 호북으로 파견했지요. 일차적으로는 첩실을 구해 내려는 목적인 듯하고, 이차적으로는…….”
“날 잡으려 드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매화검수 나부랭이들의 기척이 많이 줄었던데,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군?”
공야치가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하지만 자신감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매화검수 중 십여 명이 첩실과 호위를 쫓고 있습니다. 적당히 시기를 조절하여 정보를 주고 있으니, 머지않아 철혈성의 병력과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성주의 첩실을 쫓고 있다?
철혈성 입장에서는 분노로 눈이 돌아갈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립하고 있는 조직들이니만큼, 결코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강룡선에서, 너희를 화산 장문인에게 팔아 버릴 거라고 차위에게 정보를 흘렸던 게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납치범이 빙궁이든 은거기인이든, 철혈성은 화산파, 나아가 의천맹에 복수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그 머저리들한테 뭐라고 말했기에 열 명이나 뚝 떼서 첩실을 쫓아가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엉?”
“그저 두 사람의 이동로를 시시각각 보고해 줬을 뿐입니다. 병력을 나눈 것은 온전히 매화검수들의 결정이었습니다.”
“알아서 그런 거라고? 우리야 그걸 원했지만 왜 지들이 먼저 나서서?”
“뭐라도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었겠지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본 매화검수들은 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치졸하고 품위가 없었다. 말 그대로 파락호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장로는 죽었고 장문인은 납치를 당했다. 와중에 거래하려던 철혈성주 첩실까지 도주한 상황이었다.
장로는 살릴 수 없고 장문인도 구하기 어려운 실정. 그렇다면 철혈성주의 첩이라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사문의 질책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급할 만도 하구만. 굳이 유혹할 필요도 없었겠어.”
“그렇습니다.”
“정리해 보자. 현재 의천맹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남의 병력이 코앞까지 와 있다.
매화검수 중 일부가 철혈성주의 첩을 쫓고 있고, 철혈성 측에서도 첩의 안전을 위해 고수를 파견했다.”
“…….”
“흐음, 착착 돌아가고 있기는 한데.”
순간 무엇을 떠올렸을까.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이봐, 소문주.”
“예.”
“당신, 첩과 호위를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공야치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두 사람은 미끼야. 하지만 미끼 역할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선 그 둘이 매화검수 손에 죽어야 해. 그럼 철혈성이 확실하게 분노해 주겠지.”
“…….”
“미리 말하는데, 그러지 마라.”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공야치는 궁금했다.
따로 노림수가 있는 것일까? 혼란 유도?
“첩실은 이쪽 사람이 아니야.”
“……예?”
“무례하고 싸가지가 없지. 당연히 재수도 없어. 겸상도 하고 싶지 않은 부류야.”
“…….”
“하지만 그 인간은 민간인이라고 봐야 해. 무림 문파의 자식이고, 철혈성주의 첩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그 여자, 무림인이라고 볼 수 없어.”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칼을 뽑았다면 목을 날렸겠지만, 그 여자는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돼.”
“그,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 이 이유가 왜?”
“소교주님. 아시겠지만…… 전쟁에 사상자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르는 거 아니야. 자랑은 아니지만 나 역시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봤어.”
“…….”
“솔직히 나도 가끔 혼란스러워. 이런 부분은 고민을 해 본 사람에게도, 안 해 본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그 첩실을 죽이는 건 반대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 어쩔 수 없을 때, 그런 때가 오면 나도 당신과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거야. 그 정도가 되면 더 이상 남 생각할 처지가 아닐 테니까.”
“…….”
“놔두자, 그 사람은.”
가만히 서량을 주시하던 공야치가 고개를 숙였다.
“철혈성주의 첩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철혈성의 분노를 최대한 끌어올려 보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배웠습니다.”
공야치가 미소를 지었다. 그 무뚝뚝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웃음이었다.
“쉽게 가고자 괜한 목숨 하나를 날릴 뻔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고, 최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았을 판단이었습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날 너무 착하게 보진 마. 적한테는 인정사정없는 개백정이 나거든.”
“압니다.”
“……서운하네.”
입맛을 다신 서량이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 등을 기댔다.
“여하간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 하니 다행이야. 오늘 하루는 푹 쉬고 싶구먼. 동필아, 너도 그간 고생 많았다. 내일은 바쁘게 움직여야 되니까 푹 쉬어라.”
“예, 소교주님.”
그때, 공야치가 말했다.
“소교주님.”
“엉?”
“이번 싸움, 결코 쉽지 않겠지요.”
서량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병력이 아주 어마무시하다며? 동필이랑 둘이서 잡아먹으려면 배 터질지도 몰라.”
“게다가 마공도 개방할 수 없고요.”
“그렇다니까.”
공야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저는 소교주님 일행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합니다. 그렇지요?”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제대로 날뛰셔도 될 무대를 만들어 드리려 합니다.”
“잉?”
서량과 마동필이 알쏭달쏭하다는 눈으로 공야치를 보았다.
공야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 * *
“장문인, 오장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음?”
“최단기간 이동로의 절벽이 산사태로 무너졌다고 합니다. 본래 지반이 약한 곳이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라 하더군요.”
상각이 혀를 찼다.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하루 이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알았네. 그렇게 알도록 함세.”
“예.”
상각이 입맛을 다셨다.
“한 번씩 꼭 애가 타게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