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염라, 그리고 마군 (5)
“뭐지?”
“왜 그러시는지요?”
“흐음.”
상각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가 텁텁해.”
송관이 저도 모르게 코를 씰룩였다.
하지만 공기가 텁텁한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시원한 가을 공기 덕분에 가슴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절정고수의 감이다. 은하검수의 수장이지만 아직 그 영역을 밟아 보지 못한 송관은 상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별문제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각은 껄끄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종남의 힘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며, 의천맹주라는 최고 권력자가 뒤를 봐주고 있다.
‘기분 탓인가?’
상각이 입맛을 다셨다.
“가자꾸나.”
“예.”
분명 무언가를 감지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는 상각.
천부의 재능과 정치 감각으로 사형제들을 제치고 종남파 장문인직에 오른 그였다. 홍산자와 비슷하지만, 그에게는 없는 신중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중함도 권력의 달콤함 앞에선 빠르게 마모되기 마련이다. 신중함도 결국 필요해 의해서 연마되었던 것일뿐, 충분히 제자리에 만족한 지금의 그에겐 활용 가치가 없었다.
딱 그 정도가 상각의 한계였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간웅(奸雄)이라 불릴지언정 종남의 전성기를 열어 볼 수 있겠지만, 그릇이 거기까지 닿질 않는다.
그 넓지 않은 시선, 자만으로 가득해진 마음.
그 시점에서 상각의 불행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투둑.
송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좌측 절벽에서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곳 일대의 지반이 약하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입니다.”
“지반이 약해서가 아니다.”
“예?”
상각의 안광이 점점 강해졌다.
“기감에 잡히질 않는군. 너무 멀어. 하지만 이 공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데…….”
“싸움이요?”
그때였다.
움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안함.
상각이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송관 역시 멈춰 섰다.
‘언제?!’
그림자 진 절벽 앞.
밑동을 드러낸 나무에 한 장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장검을 어깨에 걸쳐 놓은 채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은 굉장히 무뚝뚝했다. 천년,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송관의 손이 재빨리 검병을 쥐었다. 여차하면 뽑을 기세였다.
“누구냐!”
한 걸음 앞서 나와 정체를 묻는다. 목소리에 나름의 위엄과 패기가 실렸다.
사내, 마동필은 상각과 송관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려 땅에 시선을 박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소교주님 말씀대로야.’
강하다.
존재감 자체가 남다르다.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기도가 자연스레 공기를 장악하고 있다. 내공을 끌어 올린 것도 아닌데 은은한 압박감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한 수 위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는 정파 무림의 기둥 중 하나다. 이 정도 강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상각과 마주해도 눌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마동필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구파 장문인과 필적할 만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온 천하가 놀랄 것이다.
‘정면 승부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석대로 상대하면 내가 밀릴 가능성이 커.’
하지만 불안하지 않다.
실력은 분명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날의 상태, 주변 지형은 물론 운 역시도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실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아니, 이길 수 있다. 상각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마동필은 매 순간을 서량이란 괴물을 보며 성장해 왔다.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고수에게 익숙해진 마동필에게, 상각의 기파는 위협이 될 수가 없었다.
스륵.
자리에서 일어난 마동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종남파 장문인 뇌운검 상각, 맞나?”
송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장문인께 그 무슨 무례한 언사인가!”
스르릉.
마동필이 묵왕검을 뽑았다.
칙칙한 흑색 장검. 그 어두운 빛깔이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자아낸다.
‘흡!’
마동필이 검을 뽑아 든 순간, 송관은 안개처럼 스며드는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목덜미에 땀이 맺히고, 검병을 쥔 손이 점점 차가워졌다.
‘고수?!’
그것도 엄청난 고수다. 적어도 자신의 실력으로는 십 합도 채 버티기 힘든 검객이 분명했다.
그때, 상각이 앞으로 나섰다.
“마검(魔劍)이군.”
송관을 옆으로 밀어 낸 상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놈, 마인인가?”
마동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뽑은 순간 이미 승부는 시작된 셈이었다. 이미 그의 신경은 온통 상각의 자세와 기운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면 승부를 벌이되, 허를 찔러야 한다. 이건 비무가 아니야. 목표 대상을 지켜야 할 호위도 아니다. 죽고 죽이는 생사결일 뿐.’
어떻게 하면 상대를 방심케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마동필은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떠올렸다.
“설마 천마…….”
화아아아악!
“물러서!”
송관을 뒤로 밀쳐 낸 상각이 재빨리 검을 뽑았다.
하지만 늦었다.
시작부터 마공을 완전히 개방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그였다. 잠잠했던 바다가 순식간에 해일을 일으키는 것 같다.
폭풍처럼 터져 나가는 무지막지한 마기가 단숨에 상각을 휩쓸었다.
‘헉!’
한순간 굳어 버린 몸.
바로 그때, 마동필이 움직였다.
콰앙!
폭음을 터트리며 나아간 그가 눈 깜짝할 새 상각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상각의 눈빛이 돌변했다. 뇌운검이라는 별호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이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위협이었다.
그가 사선으로 검을 올려 쳤다.
쩌어어엉!
호구가 찢어질 것 같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공명음이 천둥소리를 방불케 했다. 상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목검으로 바위를 때린 것처럼 팔 전체에 충격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수법으로 충격을 흘려 내는데, 어느새 상대의 검이 명치를 찔러 오고 있었다.
중단을 노리고 곧게 뻗어 오는 검격. 피하면 그만일 것 같은 정직한 공격이지만 피할 수가 없다. 너무도 시기적절했기 때문이다.
참격(斬擊)이었다면 모를까 자격(刺擊)이니만큼 방어도 어렵다. 적절한 순간, 최상의 공격법을 쓴 것이다.
상각의 좌수에서 환한 빛이 타올랐다.
콰앙!
진기의 폭발이었다.
상각이 몸을 미친 듯이 뒤로 물렸다. 벽류인(碧流印)의 장법으로 자격을 막았지만, 자신도 충격을 받았다. 강한 폭발력이 독이 된 것이다.
후욱!
상각의 눈이 커졌다.
‘이놈?!’
중단 다음은 상단이다.
충격을 해소하지도 못했는데 상대가 공중에서 접근해 왔다. 양손으로 움켜쥔 장검에서 무시무시한 패력이 느껴졌다.
쐐애애액!
도끼로 내려찍듯 휘둘러지는 묵왕검.
일검양단(一劍兩斷)의 기세였다. 사량발천근을 쓸 새도 없었다. 상각이 마주 검을 휘둘렀다.
쾅!
“으득!”
발등까지 땅에 박혀 버렸다.
전신 관절이 삐걱거리고 근육이 요동쳤다. 충격을 흩어 내지 못한 경력이 내부를 뒤흔들었다. 내상의 징후였다.
‘이럴 수가!’
상각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마동필의 입가에 실낱같은 핏물이 보였다. 그 역시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공격을 감행한 것, 말 그대로 이판사판의 공격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파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발길질이 상각의 머리를 노렸다.
발이 닿기도 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쏟아지는 금빛 마기의 물결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훅!
마동필의 눈이 빛났다. 자세를 낮춰 각법을 피한 상각이 어느새 품 안으로 치고 들어온 것이다.
심리의 빈틈을 노려 무자비한 강격으로 몰아쳤지만, 상대는 구파 장문인이었다. 당하고만 있을 리는 없었던 것이다.
상각이 마동필의 가슴을 향해 장을 쳐 왔다. 검을 뻗기 어려운 거리였기 때문이다.
퍼억!
마동필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얼굴이 약간 창백해진 것이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상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이놈이!!”
상각의 왼손이 온통 시뻘겠다. 피로 물든 손바닥엔 대여섯 개의 암기가 박혀 있었다.
문제는 암기에 발라진 독이었다. 극독까진 아니지만 내력의 이동을 방해할 정도는 된다. 시간이 있다면 손쉽게 해독했겠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었다.
마동필의 눈이 빛났다.
‘됐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노렸던 바였다.
그에게는 초절정고수를 상대로 암습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서량처럼 도발에 능하거나, 변칙적인 공격으로 혼을 빼 놓는 능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정면 승부만 고집한다?
그럴 순 없었다. 이건 격식 있는 비무가 아니라 목숨이 오가는 실전이었다.
혼자의 몸이었다면 모르되, 최대한 신속하게 승부를 내고 서량을 도우러 가야 한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서 상대를 죽이는 수밖에.
터어엉!
궁신탄영의 신법으로 접근한 마동필이 기쾌하게 검을 찔러 댔다.
몸이 정상이었어도 위협을 느꼈을 만한 쾌검이었다. 상각이 몸을 뒤로 빼며 어지럽게 검을 휘둘렀다.
따다당!
마동필의 검격이 모조리 막혔다.
하지만 상각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왼손 장심을 통해 들어온 독기가 순식간에 어깨까지 치고 올라왔다. 자칫 방심하다간 독기가 오장육부까지 침범하겠다.
우우웅.
선천은하공(先天銀河功)의 진기가 독기를 밀어 냈다.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장심에서 시컨먼 핏물이 터져 나왔다. 어느 정도의 독기를 체외로 빼낸 것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왜 공격을 안 하지?’
이 찰나의 틈을 놓칠 리가 없다. 이러다간 진짜 위험할 것 같아 진기를 운용했지만,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회피를 염두에 둔 그였다.
그런데 후속타가 오지 않았다.
왜일까?
쿠르르르릉!!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위이이이잉!!
터져 나가는 금빛 마기가 무지막지한 파동을 일으켰다. 얼마나 마기가 짙은지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였다.
상각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쏟아질 듯 들어오는 파도 같은 마기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천마신교 최상의 절기, 구중마검세(九重魔劍勢)가 펼쳐진 것이다.
번쩍!
아홉 줄기 금빛 광뢰(光雷)가 상각을 향해 퍼부어졌다.
콰콰쾅!
상각이 왈칵 피를 토해 냈다.
신기의 보법으로 물러나며 막아 냈지만 충격이 너무 컸다. 희대의 패력강공, 순수한 파괴 의지가 담긴 필살의 검이었다.
마동필이 달려 나갔다.
터엉! 터어엉!
가속에 가속을 더한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명궁(名弓)이 쏘아 낸 화살처럼 쏘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다.”
마동필이 냉정하게 검을 내리쳤다.
결코 빠르다 할 수 없는 검인데 피할 수가 없다. 반경 삼 장을 아우르는 검압(劍壓)이 회피와 반응 속도를 뿌리부터 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상은 심해졌고 독기는 날뛰고 있으며 근육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한 번의 방심, 한 번의 빈틈이 자아낸 광경이었다. 상각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이노옴!!”
강철의 마검과 뇌운의 보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