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염라, 그리고 마군 (6)
부서지고 갈라진 땅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초토화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준을 달리하는 무공이 만들어 낸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파지지직! 파지직!
벽력권의 경기(勁氣)가 전신을 뒤덮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하늘을 다스리는 뇌신(雷神)의 모습이 사라지니, 지옥 밑바닥에서 흉소를 터트리는 염라의 모습만 남았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헤치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서량을 본 모두가 얼어붙었다.
우우우웅.
정운의 검에서 강렬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명 장로! 괜찮은가?!”
“쿨럭!”
피 섞인 기침을 뱉어 낸 명효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창백해진 얼굴에 두려움과 분노가 엿보였다.
“이 괴물 놈이……!”
걸음을 멈춘 서량이 명효를 돌아보았다.
명효의 몸이 뻣뻣해졌다.
구유마공의 핏빛 안광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상단전을 황폐화하는 힘을 지녔다.
천하십대고수라도 승부를 논하기 힘든 절대고수 앞에서, 명효는 심신이 얼어붙는 공포를 느꼈다.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정운이 외쳤다.
“안 돼!”
파아아아앙!
혼신의 힘을 다해 접근했지만 서량보다는 늦었다.
퍼어억!!
서량의 주먹이 명효의 복부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명효의 상체가 절로 수그러졌다.
빠각!
우측 무릎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명효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서량은 그가 쓰러지도록 얌전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피이이잉!
정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그의 검을 회피한 서량이 명효의 뒤로 돌아가 그의 머리채를 감아쥐었다.
서량이 명효의 손에 들린 검을 빼앗았다.
우두두둑!
검만 뺏은 게 아니라 손을 잡아 악력으로 부러트려 뽑아 버렸다. 우악스럽다는 말로도 형용이 안 될 악랄한 행동이었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여 지켜보는 가운데.
서량이 명효의 목젖을 갈라 버렸다.
푸화아악!
대량의 피가 터져 나왔다. 서량은 그제야 명효의 머리칼을 놓아주었다.
양손으로 목을 감싸 쥔 명효가 그대로 쓰러졌다.
“……!!”
차라리 일격에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면 이렇게 충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모두가 치를 떨었다.
‘좋아.’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아니다. 이런 잔혹한 광경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정운이 외쳤다.
“모두 죽음을 불사해라! 저런 잔혹한 마인을 세상에 내보내선 안 돼!”
단순히 미친 적(敵)에서 세상에 해악이 될 것 같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
서량의 의도대로였다. 명효보다 훨씬 고지식한 정운은 죽음을 불사하고 서량을 막으려 들었다.
우우우웅!
그의 명령을 들은 은하검수와 벽산십검, 나아가 태룡백인대가 서서히 서량을 압박해 들어왔다.
마음 같아선 십 리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정운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포위망을 형성한 것이다.
‘이로써 완전한 도주는 막았군.’
입구를 막긴 했지만 결국 시간을 끄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절정고수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도 있다.
정운을 살려 둔 것은, 얼빠진 정운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저지른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단 한 놈도 놓치지 않으려는 서량의 치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콰앙!
진각을 밟은 서량이 무서운 속도로 뛰어들었다.
퍼퍼퍼퍽! 콰드득!
사방에서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겨 날아간다. 쏟아지는 피가 강을 만들고, 산산조각이 난 병장기들이 날카로운 눈 폭풍이 되어 잔혹한 전투를 장식했다.
일각 후.
털썩!
마지막 한 명의 목을 꺾은 서량이 정운을 바라보았다.
멍한 눈으로 서량을 보던 정운이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서량은 대답 없이 정운에게 걸어갔다.
“설마 마교주라도 되는 것이냐?!”
서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의천맹주 놈도 작살내기 귀찮아하는 양반이다. 너희 같은 햇병아리들한텐 관심도 없어.”
정운이 이를 갈았다.
“하늘이 널 단죄할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놈!”
쐐애애액!
혼신의 힘을 다한 검격이 서량의 목을 노렸다.
서량이 발을 휘둘렀다.
콰득!
검은 허공을 갈랐고, 정운의 목은 완전히 뒤로 돌아가 버렸다. 목이 부러진 정운이 그대로 쓰러졌다.
“후우.”
숨을 뱉은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시산혈해(屍山血海)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다. 무려 백팔십여 명의 고수들이 처참하게 박살 나 죽은 것이다.
서량이 몸을 돌렸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지옥도(地獄圖). 씁쓸할 만도 할 텐데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소호향은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조리 죽였다.
서량 입장에선 이들이야말로 전쟁의 사상자인 것이다. 건드리지 않았다면 모르되, 한 번 건드리면 끝을 봐야 한다.
“갈까.”
파아앙!
그의 신형이 광장을 벗어났다.
잠시 후.
사라라락.
복면을 쓴 사람 수십이 나타나 시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공야치가 파견한 하오문도들이었다.
* * *
송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콰르릉! 퍼어엉!
검과 검이 부딪치며 폭음을 터트리고, 기와 기가 부딪치며 지진을 일으킨다.
경천동지의 격전이 따로 없었다. 은하검수의 수장으로서 어디에서도 부족하단 말을 들어 본 적 없던 그에게 두 고수의 충돌은 신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대체 저 마인의 정체가 뭐지?!’
언뜻 보면 자신과 나이 차가 많은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장문인과 호각이다. 아니, 장문인께서 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 승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그가 상각을 돕지 못하는 이유였다.
콰앙!
두 사람이 제각기 물러났다.
상각이 연신 주춤거리는 가운데, 마동필은 또 다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전신 가득 피어오르는 황금빛 마기가 삼두육비 괴물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심장, 느려지지 않는 질주.
‘괴물!’
퍼퍼퍼펑!
상각이 다시 한번 물러났다.
턱수염이 붉게 물들어 있다. 충격이 더해지며 내상이 깊어진 탓에 몇 번이나 각혈을 한 것이다.
터엉!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마동필의 몸이 덜컥 멎었다.
‘이런!’
마동필이 이를 악물었다.
금강야차마공의 회복력에도 한계가 왔다. 누적된 충격을 끊임없이 흩어 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줄어든 마력이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한 것이다.
뼈를 주고 뼈를 깎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이 정도나마 몰아친 것이 대단한 것이다.
후우우우웅.
마동필이 상각을 보았다.
고개를 든 상각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감히!”
마비된 왼팔, 누적된 내상, 누더기가 된 체면까지.
신공을 개방할 한순간의 틈도 없이 몰린 덕에 팔다리가 무거웠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놈의 공격은 멈추었고, 폭발적인 마기도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선천은하공이 전력으로 개방되었다.
쿠구구궁!!
삽시간에 번져 나가는 신기(神氣)가 마기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기파가 주는 의도는 명백했다. 힘으로 밀렸으니 힘으로 갚아 주겠다는 것이다.
퍼어어엉!
상각이 질주했다.
“치졸한 마인 놈! 일검에 목을 따 주마!”
종남파 장문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상각이 그만큼 분노했다는 뜻이리라.
마동필의 눈이 고요해졌다.
확대되듯 눈에 박혀 들어오는 상각의 모습.
퍼어어억!
상각의 검이 마동필의 옆구리에 박혔다.
명치를 찌르려는 걸 겨우 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중상이다. 게다가 검신에서 흐르는 신공의 경력이 마동필의 마공을 뒤흔들고 있었다.
상각이 잔혹한 웃음을 지었다.
“고통스럽게 죽…….”
퍼억!
상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느새 묵왕검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목숨을 깎는 승부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주르르륵.
마동필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표정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상각은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선천은하공의 내력이라면 사지가 마비되는 게 정상이었다. 마공이라도, 아니 마공이기에 더더욱 효과가 좋을 수밖에 없다.
‘설마하니 이놈의 마기가 은하공의 신기에 저항할 정도로 순도가 높다고?’
부르르르!
상각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선택을 잘못했어. 신중하게 몰아붙였어야지.”
금강야차마공은 선천은하공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마공이었다.
더하여,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묵왕검이었다. 묵왕검 자체의 마기가 야차마기를 증폭시켜 상각의 내력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푸화아악!
상각이 토해 낸 피가 마동필의 앞섶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 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상각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공의 힘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신체를 장악한 마기가 생명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마동필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퍼어억!
무릎에 턱을 가격당한 상각이 벌러덩 쓰러졌다. 옆구리엔 여전히 묵왕검이 꽂혀 있었다.
“쿨럭!”
마동필 역시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옆구리를 뚫은 보검이 들썩이며 상처가 벌어졌다.
그가 검을 뽑아 던졌다.
티리링!
당장이라도 눕고 싶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마동필이 좌측을 바라보았다.
부르르르.
마동필과 마주한 송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심각한 내외상, 깎일 대로 깎인 체력.
하지만 뿜어내는 존재감은 여전했다. 오히려 기파가 거칠어져 이전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덤벼라.”
“……!”
마동필의 안광이 점점 진해졌다.
“수장의 복수를 하지 않을 작정이냐?”
“이익!”
차앙!
송관이 검을 뽑았다.
“이놈! 죽여 주마!”
그때였다.
“누가 누굴 죽여, 미친놈아.”
쩌어엉! 콰득!
송관의 검이 부러짐과 동시에 그의 흉부가 움푹 들어갔다. 흉부 골절에 심장 파열이다. 송관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마동필의 눈이 커졌다.
“소, 소교주님?!”
서량이 상각을 힐끔거렸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꿈틀거리고 있지만 매번 실패한다. 선천은하기가 빠른 속도로 흩어지고 있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너답다.”
뼈를 주고 뼈를 깎는 수법. 어떻게 싸웠는지 둘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흡!”
마기로 상처를 조인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늦었습니다.”
“늦기는. 피 질질 흘리면서 헉헉대고 있을 줄 알았더니, 진짜로 종남 장문인을 작살냈을지는 몰랐다.”
상각에게 다가간 서량이 묵왕검을 뽑았다.
푸슉!
“헉!”
고통에 부르르 떨던 상각이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상태도 딱 좋고.”
“실력은…… 확실히 제가 아래였습니다.”
“중요한 건 누가 이겼느냐지. 결국 이긴 놈이 강한 거야. 암기를 쓰든 독을 쓰든 말이지.”
“알고 계셨습니까?”
서량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정정당당한 전쟁터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적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얕보다가 밀린 저놈이 병신이야. 네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그걸로 되었다. 성격상 아니 찝찝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서량의 말이 위안이 된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량이 상각을 들쳐 맸다.
“이걸로 장작 다 모았으니 불붙일 일만 남았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