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파격적인 출도 (2)
“쿨럭!”
밭은기침을 뱉어 내는 상각의 얼굴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창백했다.
힘없이 고개를 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
“글쎄다, 어디일까?”
퍼뜩 놀란 상각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나무상자 위,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바로 서량이었다.
“이렇게 둘이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반갑다.”
“누, 누구냐?”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마인(魔人).”
순간 상각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기억이 난 것이다. 자신이 왜 정신을 잃었는지, 누구와 싸웠는지.
“마교도!”
목이 다 쉬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몇 번이나 밭은기침을 토해 내던 상각이 고개를 들었다. 한껏 일그러진 얼굴에 강한 분노가 엿보였다.
“죽일 놈들! 감히 날 습격해?”
“너뿐만이 아니다.”
“……뭐?”
“네가 끌고 온 병력 전부 죽였다. 생존자는 너 하나뿐이야.”
“……!”
“쓰임새가 있다는 데에 감사해라. 아니었으면 네 머리통도 진즉에 날아갔을 테니까.”
“이, 이 죽일!”
상각이 버럭 외쳤다.
“쓰레기 같은 마교도들! 우리와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게냐?!”
“그럼 안 되나?”
“뭣이?!”
“전쟁 벌이면 안 되는 거냐고.”
서량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칼로 쑤시든 도끼로 찍든 그거야 우리 문제다, 이 패배자 놈아.”
“……!”
“쓸데없는 신경은 쓰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똑바로 해 줬으면 좋겠군.”
“닥쳐라! 나는 절대……!”
“그럼 죽을래?”
상각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담담하게 묻는 모습이 섬뜩한 공포를 자아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것 하나는 알겠다. 눈앞의 이놈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긴말 안 한다. 그 같잖은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면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아니면 그냥 죽어. 미리 말하는데 너 아니어도 일 처리엔 별문제 없다.”
“…….”
“선택한 것 같군. 질문 들어간다.”
서량이 깍지를 끼곤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기이한 압박감을 자아내는 자세였다. 상각이 마른침을 삼켰다.
“종남의 전대 원로들을 가둬 둔 참회동(懺悔洞) 열쇠, 그거 어디 있어?”
“……!”
“세 번 질문 안 한다. 마지막으로 묻지. 참회동 열쇠 어디에다 뒀어?”
“그, 그걸 어떻게 아느냐?!”
모를 수가 없지.
홍산자는 장문인이 된 지 삼 년밖에 안 됐다. 그에 대해서는 당연히 하오문의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상각은 다르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어떻게 종남 장문인에 올랐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세대교체가 된 장문인들이 무슨 짓들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다.
살왕이었던 시절, 의천맹주에게 올라온 보고 대부분을 옆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세 번은 없다고 했지?”
스르르릉.
서량이 검을 뽑았다.
상각이 들고 있던 보검, 종남파 장문인만이 들 수 있다는 육련검(六蓮劍)이었다.
서량이 검을 들었다.
“잘 가라.”
쐐애애액!
냉정하게 내리쳐지는 검.
상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말하겠다!”
슥.
육련검이 상각의 이마에 닿았다.
확실히 보검 소리를 들을 만하다.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베였다.
또르르 흘러내린 피가 상각의 코끝에 맺혔다.
“말해.”
“……그 검이다.”
“이 검이 참회동의 열쇠라고?”
“그, 그렇다.”
서량이 육련검의 검신을 매만졌다.
“검이 열쇠야? 분실하려면 어쩌려고 이런 걸 들고 다녔냐?”
말을 하면서 답을 찾은 그였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아, 그래도 상관없겠군. 평생 참회동에서 늙어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테니까.”
눈치가 귀신처럼 빠르다. 상각이 입술을 짓씹었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럼 이만.”
“자, 잠깐!”
상각은 당황했다.
“말해 주었는데 왜 날 풀어 주지 않는 것이냐?!”
“뭐라는 거냐?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풀어 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
“죽지 않게 물과 음식은 넣어 주지. 옆에 방문 열면 작은 동굴이 나온다. 대소변은 거기서 처리하면 될 거야.”
서량이 씨익 웃었다.
“참회동을 열고 난 후, 그때 널 풀어 주마.”
“이, 이 더러운 놈!”
“사문의 존장들을 참회동에 가둔 쓰레기가 할 말은 아니구만.”
문을 닫고 나온 서량을 기다리는 것은 마동필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량이 육련검을 들어 보였다.
“이게 참회동 열쇠라던데?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마동필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저들이 그리도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문의 어른들을 가두고 권력을 독차지했다…… 마도 무림에서도 쉬이 저지르지 않는 패악을.”
“의천맹주, 그 약삭빠른 늙은이가 대단한 이유지. 전통과 역사로 유지된 문파들을 세 치 혀로 무너뜨렸으니까. 누구라도 그러기 힘들 거다.”
“한데 소교주님께선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야 소문주가 알려 준 것입니까?”
괜히 뜨끔하군.
“……어쩌다 알게 됐다.”
“그러시군요.”
마동필은 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서량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홍산자는 건드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필요 없다. 화산은 알아서 무너질 거야. 털어 보려 해 봤자 우리 머리만 복잡해져.”
“알겠습니다.”
서량이 마동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나저나, 넌 몸 좀 어떠냐? 기도가 제법 안정되긴 했다만.”
“괜찮습니다.”
상각을 잡아 온 지 열흘이 지났다.
고작 열흘 새에 마동필은 그 심각한 내외상을 어느 정도 다스린 것이다. 아무리 마공이 신공보다 치유력이 좋다지만 빨라도 너무 빠른 회복 속도였다.
마공에 대한 이해도가 시시각각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며, 마기가 질적 향상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리하면 안 된다. 마인들끼리의 승부였다면 모를까, 넌 종남의 신공(神功)에 노출됐어. 체내에 남은 신기(神氣)가 끊임없이 탁기를 유발할 거다.”
“예.”
“그래도 이렇게 보니, 확실히 괜찮아지긴 한 것 같군.”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상대였습니다.”
“그랬겠지.”
서량이 창고처럼 생긴 뇌옥을 힐끔거렸다.
“상각이나 홍산자나 장문인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
하지만 자격이 없다면 오를 수 없는 자리가 장문인이란 자리다. 단순히 정치에 능하거나 덕(德)이 높다고 전부 장문인이 될 순 없다는 거지.”
중요한 건 결국 무력이다.
특히나 이러한 난세에 강하지 못한 수장은 타 문파의 비웃음만 살뿐이다. 그것은 구대문파라고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상각은 코앞에서 화산파와 대립하고 있었다. 항상 화산에 뒤지고 있었던 만큼, 이 악물고 단련했겠지. 네가 그렇게 당한 것도 이상하지 않아.”
구파 장문인의 무공.
마동필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왜 그들을 정파 무림의 기둥으로 부르는지.
만약을 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지만, 만일 순수하게 무공으로 붙었다면 십중팔구 자신이 패했을 것이다.
“여하간 고생했다. 쉬어, 너도.”
“아, 예.”
그대로 마동필을 지나친 서량이 거처 뒤 숲으로 걸어갔다.
숲을 둘러본 서량은 나직이 감탄했다.
‘확실히 능력이 좋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이런 거처를 중원 전역에 수십 개나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아마도 살왕 시절, 자신이 직접 만든 안가보다도 그 수가 많을 것이다.
‘내가 만든 안가와는 전혀 다르다. 완벽한 휴식이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어.’
살수의 안가는 긴급 피난처에 가깝다. 그래서 은신은 확실하되 다소 좁을 수밖에 없다.
진짜 휴식을 할 거면, 하오문의 안가로 오는 게 백배는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응?’
까드드드득.
숲속 공터 인근이 온통 얼어붙어 있었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선수를 뺏겼군.’
파파팡!
힘차게 내지르는 권장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공기가 일렁일 때마다 차가운 한기가 일대의 온도를 조금씩, 조금씩 낮추고 있었다.
“헉헉.”
여상린의 호흡은 무척이나 격했다.
서량이나 마동필에 준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 역시 내가고수(內家高手)로서 손색이 없는 무인이었다.
내가 기공의 핵심인 호흡이 흐트러졌다는 건 그만큼 여상린이 지쳤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호흡을 두어 번 고르더니 곧장 움직였다.
파아아악! 퍼엉!
쌍장을 내리꽂은 나무가 중간에서부터 뚝 부러졌다. 부러진 나무에 새하얀 서리가 맺혀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보통 무공이 아니다.
내치는 손짓 하나하나에 강렬한 한기를 불러일으키는 구결이 한가득한데, 저런 식으로 기공을 발산하면 내공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구력에 큰 문제는 없다. 폭발적인 위력과 장기전을 상정한 연환기(連環技)를 아우른 것이다.
“쿨럭! 아, 시바! 더는 못 해 먹겠다!”
여상린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떤 매정한 놈 때문에 혼자 이 난리를 쳐 대자니 힘들어서 도무지 못 하겠네!”
서량이 머리를 긁적이며 공터로 나왔다.
“알고 있었냐?”
“어? 언제 오셨어요?”
“연기 잘하네.”
여상린이 콧방귀를 뀌었다.
“남의 무공 수련을 엿보다니. 그러는 거 아니에요, 진짜.”
“새삼스럽게 왜 그래?”
“새삼스럽다뇨? 제가 뭘요?”
“……됐다.”
서량이 헛기침을 했다.
“수련 끝났으면 이만 가 봐.”
“안 끝났는데요? 계속할 건데요?”
“…….”
“다른데 찾아보세요.”
“아직도 삐져 있냐?”
여상린이 상체를 벌떡 세웠다.
“네! 삐졌어요. 됐어요?”
“아, 좀 그러지 마.”
“내 마음이에요! 세상에, 사람이 무릎까지 꿇었으면 그 성의를 봐서라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이라도 하겠네.
응, 안 돼? 세상에 그렇게 성의 없는 거절은 처음 봤구먼!”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만.
“야, 나는 교주가 아니라 소교주야. 어떻게 널 제자로 받아? 그러고 넌 이미 빙궁의 무공을 익히고 있잖아? 그걸로 충분하면서 왜 그래?”
“몰라요, 몰라. 스승님 안 해 줄 거면 저리 가요. 참나, 우리 집안 명성에 똥칠도 했으면서 이 정도 부탁도 안 들어주네.”
“미치겠네, 진짜.”
서량이 여상린의 맞은편이 털썩 주저앉았다.
여상린이 움찔했다.
“솔직하게 딱 말해 봐. 왜 갑자기 제자가 되겠다는 거야?”
“…….”
“말해 보라니깐? 네 본심이 뭔지 알아야 고민이라도 해 보지, 인마.”
“……말 못 해요.”
“그럼 사제지간은 무리야.”
“어차피 말해 줘도 사제지간은 무리라고 할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서량이 손을 내밀었다.
“전에 말했지? 나랑 육장 수련 좀 하자고. 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재능도 있고, 감각도 좋잖아? 그거면 됐지 굳이 왜 사제지간을 바라는 거야?”
“…….”
“명색이 소교주니까 본교의 무공 몇 개를 전수해 줄 수도 있다. 그 정도 힘은 있어. 그걸로는 안 되는 거야?”
“무공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뭔데 여기서 화풀이나 하고 있냐?”
여상린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우다다 말을 쏟아 낼 땐 언제고 갑자기 기분이 축 처진 듯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갈게요. 수련하세요.”
“어? 야! 어이!”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죠? 뭔 일 있으면 불러 주세요.”
여상린이 비틀거리며 공터를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뭐, 알아서 기분 풀겠지.
“어쨌든 자리는 났구만.”
서량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었다. 이미 여상린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고, 그의 머릿속은 이제 군림마황기를 수련할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오늘도 아주 왕성하게, 아름답게 만들어 봐야지!”
* * *
거처로 돌아온 여상린은 푸른 봉투에서 반쯤 비져 나온 서신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서신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또다시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개 같은 인륜지대사, 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