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파격적인 출도 (3)
“좋지 않네.”
“예?”
이천상이 턱으로 무담의 잔을 가리켰다.
“별로 좋지 않은 술이야. 숙성을 잘못했네.”
“……아, 예.”
“마시다가 별로면 말하게. 다른 술을 주지.”
“괘, 괜찮습니다.”
하늘 같은 교주님께서 따라 주신 술이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절대로 별로일 수가 없다.
“교주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아랫것들에게 일러 더 좋은 술을 가져오게…….”
“괜찮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예에.”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그래서, 호법원을 움직여 보겠다고?”
“교주님께서 허가해 주신다면 그래 볼 생각입니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감수하겠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마음이 정히 그러하다면 그리하게나.”
“감사합니다.”
“다만 호법원만으로는 부족해.”
“…….”
“애들 보낼 때 형법당주도 같이 보내도록 하게.”
무담의 눈이 커졌다.
“형법당주를……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형법당주가 신교를 비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어떤 의미론 호법원주인 무담보다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 형법당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게.”
그때였다.
마신궁의 문이 벌컥 열렸다.
“교주님! 어? 대호법도 계셨군요?”
무담이 담담하게 말했다.
“교주전에 들어올 때는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소.”
“아, 죄송합니다.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라.”
이천상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무담이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호요성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담의 옆에 섰다.
이천상의 눈에 작은 흥미가 어렸다.
“무슨 일인가?”
“중원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순간 이천상과 무담, 두 사람의 안광이 동시에 번뜩였다.
중원에서 서신을 보내올 자는 한 명뿐이다. 즉, 저 서신은 소교주 서량이 보낸 것이다.
“한데 이게 참…… 골 아픈 주제로 보내온 서신이라 말이지요.”
“주게.”
서신을 받아 든 이천상.
곧이어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답답하기도 했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소교주님도 한숨 돌릴 수 있고, 재미도 있기야 하겠습니다만.”
“너무 위험하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철혈성주 그 양반이 어떻게 나올지는 저로서도 짐작하기가 어려워서요.”
무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닷없이 철혈성주라니? 그 위험한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하오문의 소문주가 믿을 만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물론 능력도 뛰어나고요.”
“량이가 지금껏 함께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네.”
서량의 안목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뜻이었다.
잔을 빙빙 돌리며 생각에 잠겼던 이천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 하게.”
“역시 그렇게 되는 겁니까?”
본인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책임지면 된다는 뜻일까?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교주가 될 놈일세.”
“그렇지요?”
“그런 놈이, 고작 주위의 시선이 무서워 스스로를 꼭꼭 숨기고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
“더하여, 만일 그 아이를 건드리는 놈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나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걸세.”
섬뜩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당대 무림에서 이천상과 견줄 수 있는 무인은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금을 논하는 신(神)과 같은 존재가 직접 중원을 엎겠다고 나선다면 천하는 불바다가 될 것이다.
“량이는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되는 아이야.”
호요성이 장난스레 몸을 떨었다.
“그 정도가 아니잖습니까? 마존들도 소교주님을 보곤 얼어 버렸는데요.”
십대고수라 해도 저마다 편차가 있듯, 구대마존들 사이에도 편차가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서량에게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 예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구유마공의 힘이었다. 실제 경지를 떠나, 군림마황기와 비견되는 최강의 마공을 익혔기에 마존들은 서량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스스로를 숨기지 않아도 될 이유가 하나 더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그 녀석이 소교주이기 때문일세.”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군요.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네.”
감히 서량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실력들이지만, 서량은 한 조직의 작은 주인이었다. 일파의 수장이 아니란 말이다.
제아무리 악랄하다는 천마신교라 한들, 격이 맞지 않는 상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화산 장문인에 종남 장문인까지 납치했지만, 남은 이들은 오히려 두 장문인을 비웃었으면 비웃었지 서량이 대단하다고 생각진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지. 실력보다는 명성을 중시하고, 실용보다 체면을 우선시하는 놈들이야.”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정파 무림 특유의 기조가 오히려 소교주님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란 말이로군요.”
“안전하진 않겠지. 하지만 개떼처럼 몰려와 물어뜯으려 들진 않을 걸세.”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의천맹주, 그 영악한 여우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은.”
호요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뜻대로 하라는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그러게.”
그때, 무담이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평소의 무담이라면 예의 때문에라도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화에 철혈성주와 소교주가 언급되자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호요성이 사정을 설명했다.
무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일이 있었소?”
“예. 정말이지 소교주님의 파격적인 행동이란…….”
“용서할 수 없군.”
“……에?”
“정파 놈들 말이외다.”
“아.”
무담이 이천상에게 절을 올렸다.
“휘하 호법들에게 명을 내리러 가 보겠습니다.”
이천상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게.”
“그럼.”
무담이 교주전을 나섰다.
호요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 겁니까?”
“저이의 충성심이 유독 깊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이천상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하늘, 환한 햇살이 두 눈 가득 비쳐 들고 있었다.
“앞으로가 더 힘들 것이다.”
* * *
짹짹!
“……응?”
눈을 뜬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레? 시간이?”
햇빛 쨍쨍한 오후에 수련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동이 트고 있다. 아침이 밝은 것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 버렸어?’
서량이 가부좌를 튼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천에 쌓인 천마도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의 눈이 빛났다.
‘신기하구만.’
호사가들은 무아지경(無我之境)을 두고 무인이 인생에 몇 번 들지 못하는 영역이라 떠들어 대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틀린 소리다.
무아지경이 별건가? 그저 집중하고 또 집중하면 그것이 곧 무아지경이다.
책에 집중하다 보면 옆에서 소리를 질러 대도 모르는 것처럼, 무인의 무아지경 역시 집중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극마의 고수인 자신이 하루가 지나는지도 모른 채 명상에 집중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누구보다도 날 선 감각의 소유자기에 오히려 무아지경에 들기가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전과 같군.’
종남 장문인과 한판 하기 전, 군림마황기를 수련할 때도 이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리고.
‘공력이 엄청나게 급증했었지.’
서량은 재차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했다.
‘헉!’
핏빛 용암처럼 이글거리던 구유마공과는 다른, 진중하고 격조 높은 푸른 불꽃의 향연.
군림마황기가 이전보다 크기를 불렸다. 그것도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뭐가 이렇게 빨라?’
서량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한결 더 가벼워진 듯했다. 당장이라도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우우우웅.
주먹을 말아 쥐니 은은한 청색 광채가 모여들었다.
의지가 일면 이미 그곳에 기(氣)가 도달하는 경지다. 그간 군림마황기의 양과 순도가 부족해 불가능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가능했다.
서량이 한옆의 나무를 보았다. 여상린의 장법으로 부러진 나무였다. 새하얗게 맺혀 있던 서리가 없어진 걸 보니 하룻밤 새에 전부 녹은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에 공력을 집중했다.
치이이익.
은은하던 광채가 어느새 넘실거리는 불꽃처럼 변했다. 실제 불꽃은 아니지만 오히려 불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섬뜩한 기운이었다.
‘광무호야(光武呼夜), 신마양천(神魔揚天).’
엄청나게 복잡한 구결이었다. 운기(運氣)의 속도가 번개처럼 빠른 서량조차 잠시지간 공력을 집중해야 할 정도였다.
‘능천마라수(凌天魔羅手).’
그가 손을 내질렀다.
후우웅.
부드럽게 뿜어져 나온 경력이 부러진 나무에 닿았다.
푸스스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부러진 나무가 그대로 부스러져 흩어졌다.
‘……뭐가 이렇게 살벌해?’
굉음은 없었다. 살 떨리는 살기나 패기도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목표물을 갈아 버린다. 하늘조차 능가하는 파순의 손짓이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무시무시하군.”
이천상은 이런 무공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공력으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인화도법의 유혼비천 정도는 돼야 어찌저찌 상대가 되겠는걸?”
어검(馭劍) 정도는 되어야 상대라도 된다. 왜 천마(天魔)의 무공을 고금제일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내부를 관조했다.
으르릉.
구유마공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세상에, 자신과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을 품은 괴물의 씨앗이 자라나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잘 다독여야겠어. 섞을 수도, 섞을 필요도 없다면 공존이라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
성장이 느리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프지만, 너무 빨라도 문제가 된다.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면 언젠가 큰 화(禍)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서량이 천마도를 어깨에 걸치곤 숲에서 나왔다.
“아? 나오셨습니까?”
“어어.”
마동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땀범벅이 된 걸 보니 새벽부터 열심히 수련한 모양이었다.
“어라? 너 어제보다 기도가 훨씬 안정적인데?”
“예?”
“하루 새에 내외상이 거의 다 아물었잖아. 굉장한데?”
“아…….”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응? 뭘?”
“소교주님께서 수련에 들어가신 후 닷새가 지났습니다.”
“뭐, 뭐라고?!”
서량은 깜짝 놀랐다. 그럼 무려 닷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단 말인가?
“몇 번이고 찾아갔었지만,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셨습니다. 아무래도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아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요.”
“허어…… 어쩐지 배가 엄청 고프더라니.”
서량이 배를 쓰다듬었다.
‘군림마황기가 그렇게나 성장한 이유가 있었구만.’
물론 닷새라 해도 믿기기 힘든 속도였다.
‘어? 잠깐?’
서량이 서둘러 물었다.
“공야치는?”
“매일 진시(辰時)가 넘어갈 때쯤 찾아왔습니다. 딱히 특이 사항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 그건 다행이구만.”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넌 하던 거 계속해. 내가 알아서 차려 먹을 테니까.”
“아, 아닙니다.”
“괜찮아, 인마. 그리고 너, 허리에 힘을 반 푼만 더 빼라. 검격(劍擊)에 무게감을 더 실으려면 말이야.”
“아, 예!”
그 말을 끝으로 서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뭔가 달라지셨다?’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서량의 변화.
우르릉.
맑은 하늘에서 은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