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파격적인 출도 (4)
“음.”
이천상이 정자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요성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
“교주님?”
이천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확실히 습득은 빠른 놈이야.”
“예? 누가요?”
“량이 말일세.”
시원하게 잔을 비운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벌써 욕계문(欲界門)을 열었어.”
“욕계문은 또 무엇입니까?”
“군림마황기의 진정한 시작을 말함이네.”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소교주가 군림마황기를 제대로 익히고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네. 언제나 제대로 연마할까 싶었거늘, 드디어 시작한 모양이야.”
호요성은 혀를 내둘렀다.
“여기서 호북까지의 거리가 얼만데 그걸 아십니까?”
“하늘 아래, 군림마황기를 익힌 자는 오로지 나와 량이 둘뿐일세.”
“그래도요.”
이천상이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군림마황기를 제대로 익히면 마기에 영성(靈性)이 실리지. 하지만 그러한 마기를 형성하기 위해선 노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네.”
“영성이라…….”
“비록 전반부에 불과했지만, 관용이도 욕계문을 열지 못했네. 만일 그 녀석이 욕계문을 열고 극마를 깨우쳤다면 폐관을 나오기도 전에 내가 알았을 걸세.”
“그렇군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호요성이 말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로군요. 욕계문이라는 것을 열지 못해도 군림마황기는 천고의 마공이라 연마의 정도에 따라 충분히 극마에 들 수는 있다.
하지만 군림마황기 자체를 대성키 위해서는 무조건 욕계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다네.”
“욕계문을 열기란 당연히 어렵겠군요.”
“본교 십대마공을 대성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십대마공의 대성보다 마황기의 입문이 더 어렵다는 것. 군림마황기가 왜 천하제일마공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그 욕계문을 연 자만이, 천마(天魔)의 칭호를 받을 수 있네.”
“……!”
“본교의 천년 역사에, 한 시대에 두 명이나 욕계문을 연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네. 천마가 둘일 수도 없고, 그만한 재능을 가진 자도 없었으니까.”
호요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욕계문이라는 게 단순히 무공의 대성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욕계문의 개문(開門)이란 그 자체로 천마의 상징성이라는 것이다.
이천상이 서량에게 군림마황기를 전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군림마황기의 욕계문을 열지 못하면 무공이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천마의 칭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교주는 정말이지…….”
괴물이다.
듣자 하니 욕계문을 여는 것은 극마에 도달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게 분명했다. 한데 그것을 전수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열어 버렸단 말인가.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 이미 극마도 깨우쳤고, 군림마황기에 비견될 만한 마공도 익히고 있었으니까.
나아가 내가 만들어 준 칼로 끊임없이 기(氣)를 불렸으니 남들보다 속도가 빠를 수밖에.”
이천상이 다시 잔을 비웠다.
“그래도 대단하긴 하군.”
이천상의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이 나왔다. 엄청난 칭찬이었다.
“만일 철혈성주가 직접 대면하자고 한다면 상황이 재미있어지겠어.
욕계문을 연 자와 열지 못한 자의 차이는 명백하지. 아마 철혈성주도 량이의 심상치 않은 기질을 읽어 낼 수 있을 걸세.”
* * *
“수련은 끝나셨습니까?”
“어, 미안해. 나도 그럴 줄은 몰랐어.”
“아닙니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 수련이지요. 오히려 제가 신경 쓰이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없이 집중하느라 그런 생각은 아예 못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그나저나…….”
서량이 의아한 눈으로 공야치를 보았다.
“어디 아픈가? 아니면 뭐 안 좋은 일이라도?”
흑백 또렷했던 눈이 상당히 탁해졌다. 다소 충혈된 눈과 거무죽죽해진 눈 밑을 보면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것 같았다.
“일이 좀 많았습니다.”
“그렇구만.”
“아, 그리고 신교 측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하오문을 통해서 보냈군.”
그냥 보내도 될 것을 굳이 하오문을 통했다는 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받아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다급하다는 뜻인가? 역시 내 정체를 까발리는 건 반대하는 모양이야.’
공야치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넸다. 흑색 바탕에 보일 듯 말 듯한 용무늬가 새겨진 봉투였다.
서량이 봉투를 열고 서신을 펼쳤다.
“이잉?!”
“왜 그러십니까?”
“…….”
“……소교주님?”
서량이 혀를 내둘렀다.
“이 양반들, 자신감 미쳤구만.”
“무슨 내용이기에…….”
“당신도 볼 텐가?”
대답도 안 듣고 서신을 넘긴다. 얼떨결에 서신을 받아 든 공야치가 내용을 읽었다.
순간 그의 충혈된 눈에서 생기가 치솟았다.
“진행해도 되는 것이군요.”
“정확하게 말하면 본교의 의향만 알게 된 거지. 결정을 내리는 건 나야.”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셨습니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난감함이 묻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정하고 말고도 없어. 당신과 상의한 후, 가장 효과적인 길이 열리면 그 길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공야치가 의외라는 듯 서량을 보았다.
‘상의라?’
물론 지금까지 두 사람은 항상 상의를 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상의라고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대부분의 결정은 서량이 내리고, 이후 공야치가 그를 보조해 주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왜? 의외인가?”
“……그렇습니다.”
“솔직하군.”
“이런 걸 숨기면 나중에 큰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맞아. 앞으로도 당신의 의견과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차를 한 모금 마신 서량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뭐가 어찌 됐든 난 내가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릴 거야. 그 마음은 변치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켜 봤을 때, 나의 방법이 언제나 효과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
“저지른 후 수습한다. 속 시원해서 좋긴 하다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지. 지금까지 그래 왔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나 싶어.”
“……그러셨군요.”
“천만다행히도 나에게는 천군만마 같은 조력자가 있잖아?”
서량이 턱으로 공야치를 가리켰다. 공야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좋은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역시 대단하십니다.”
“뭐가?”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일 뿐이에요.”
공야치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 양반은 못 당하겠다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 갖고 있던 천성인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
천마신교의 소교주 정도가 되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단단히 틀어박힌 생각을 고치려 들 필요도 없다.
서량은 달랐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맞는 건지, 더 나은 방법은 없었던 건지 자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정해지면 화끈하게 달려 나간다.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때는 바로 달릴 때다.
‘달릴 땐 확실히 달리고, 돌아볼 땐 확실히 돌아본다.’
공야치의 눈이 번뜩였다.
‘이 사람은 진짜다. 일파의 종주가 될 자격이 있어. 소교주지만 이미 완성이 된 사람이야.’
그의 상체가 조금 더 앞으로 기울어졌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자세였다.
“제 생각은 명백합니다. 철혈성주에게 알리고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제거한 후, 확실하게 의천맹을 공략하는 것. 그게 맞다고 봅니다.”
“그런가.”
“예. 소교주님께서는 함께 상의하자고 하셨지만, 사실 이미 상의는 끝났습니다.
지난 닷새 동안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지 여러모로 고민해 봤습니다만,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화끈하게 나가 보자고.”
“결정하신 겁니까?”
“물론.”
공야치가 웃으며 일어났다.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힘이 난다.
이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또 다른 사건데 대한 기대가 그에게 활기를 주고 있었다.
“성주가 직접 나서서 대면하자고 할 확률은 높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대변인으로 누굴 보낼지가 궁금해.”
“그렇다고 소교주님을 무시할 수도 없을 겁니다.
지난 삼십여 년간 대외에 거의 나서지 않았던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라면, 제아무리 철혈성주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 또한 그렇지.”
“가장 믿을 만한 사람, 그러면서도 이쪽 의중을 간파할 눈치와 머리가 있는 사람. 동시에 무력으로도 꿀리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을 보내올 겁니다.”
“누구로 예상하나?”
“신창(神槍) 언극(彦剋)입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호오.’
신창 언극.
당금 철혈성의 무상(武相)이다.
철혈성주가 가장 총애하는 무인 중 하나이자, 창술(槍術)의 신(神)이라 불리는 남자가 그였다.
성주를 향한 충성심만큼이나 머리도 좋고 판단력도 괜찮은 자라고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십대고수가 직접 나선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철혈성주에 비해 아래라 하지만 신창 언극 역시 십대고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절대고수였다.
이전 살왕 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정면 승부로는 이기기 어렵고 암습을 가한다면 어떻게든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고수.
말하자면 각자의 장기가 다를 뿐, 등급으로 치면 동급의 고수라 할 수 있다.
‘절대 이전과 같진 않을 거야. 더 성장했겠지. 물론 본 적은 없지만.’
십대고수로 꼽힐 무력이라면 당연히 재능도 엄청날 것이다.
이천상은 구대마존도 끊임없이 성장 중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십대고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아주 기대되는군.”
“가능성이 클 뿐, 실제론 언극이 나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주가 직접 나설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 나설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두근거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울림이 전해진다. 살수 시절에는 감히 마주한 적 없던 적진의 절대고수들과 당당하게 마주할 순간이 온 것이다.
“소교주님께서는 지금껏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딱히 준비할 것은 없습니다.”
“아니, 준비할 게 있어.”
“예?”
바로 무공이다.
철혈성주든 신창이든, 절대로 이쪽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결국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의 서량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무력의 소유자지만, 그는 그 이상을 바랐다.
성주와 소교주가 아닌 동등한 고수로서.
각자의 조직을 대표하는 절대고수로서 마주할 것이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언제든지 받아 줄 수 있을 만큼의 거인이 되어야 한다.
“지금 바로 움직이면 언제쯤 연락이 오겠나?”
“심사숙고할 시간까지 계산한다면 최소 보름에서 한 달 사이로 예상됩니다.”
“좋아, 시작해 보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교주님.”
“음?”
“감사합니다. 제 고집을 따라 주셔서.”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 일 잘못되면 머리통을 두들겨 줄 테니까 서로 열심히들 하자고.”
“물론입니다.”
그렇게 공야치가 안가를 떠났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량의 얼굴에 강한 의지가 깃들었다.
“이왕이면 성주가 직접 나와 줬으면 좋겠는걸. 사파의 절대자는 어떤 낯짝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
약 한 달 후.
“소교주님. 철혈성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야치의 얼굴에 격동이 드리워졌다.
“보자고 합니다. 성주가 직접.”
서량이 씨익 웃었다.
“약속 날짜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