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파격적인 출도 (5)
“고생 많으셨소.”
“푸헐! 고생이랄 게 무에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해서, 결과는 어찌 되었소이까?”
“찾지 못했습니다.”
“음.”
담담한 얼굴 속에 불편한 심경이 있는 대로 묻어 나왔다.
정보는 곧 힘이다. 담사영이 의천맹주에 오르기 전, 가장 먼저 포섭한 것이 바로 개방의 방주였다.
실제로 개방 덕분에 많은 것이 한결 쉬워졌다. 개방이 없었다 한들 맹주가 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개방 덕분에 보다 빨리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건 확실했다.
당연히 이번 일도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거늘, 그 믿음에 금이 갔다.
“그것이 그리도 어렵던가.”
자연스레 하대가 나왔다.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 천곤개(千棍丐) 전평(全萍)이 히죽 웃었다.
“어려웠습니다. 방주가 되고 난 이래, 이렇게까지 막막했던 적은 없었지요.”
“…….”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짚이는 곳이 있습니다.”
담사영의 눈이 빛났다.
“짚이는 곳?”
“예.”
“말씀하시게.”
“본방의 능력은 맹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천하제일방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요.
하지만 본방에 필적할 만한 정보 단체가 없느냐면, 그건 또 아닙니다.”
“……!”
“철통같은 정보 통제 능력, 숙련된 정보원들도 알아채기 힘들 만큼 은밀한 정보 조작. 이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어디로 생각하고 있는가.”
“이런 경우 확신 어린 대답을 드리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다만 추려 보자면 딱 세 군데가 있지요.”
항상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던 전평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가장 낮은 확률로 철혈성의 음무단(陰霧團)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 높은 확률로 마교의 비각(秘閣)이 있을 겁니다.”
음무단 그리고 비각.
의천맹과 함께 강호삼세로 꼽히는 나머지 두 집단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 단체를 말함이다.
두 집단의 능력은 의천맹에 비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휘하 정보 단체의 힘 역시 막강하다.
“음무단일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철혈성은 분명 강하지만, 조직의 체계화 정도는 본맹이나 마교에 비하기 어렵지요.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십 할 활용하진 못합니다. 그래서 철혈성일 확률은 낮습니다.”
“마교는?”
“그에 비하면 마교는 지독하게 위험하지요. 집결력만 따지만 삼세 중 제일이라 할 만합니다.
게다가 자금력도 굉장해서, 작정하고 일을 벌이면 참으로 상대하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지난 역사가 설명해 주고 있지요.”
전평이 고개를 저었다.
“철혈성과 마교 중 어디냐고 생각하면 명백히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마교가 개입했다는 것인가?”
“그럴 확률이 낮진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단체에 비할 순 없습니다.”
“어딘가?”
“하오문입니다.”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오문이라고?”
“그렇습니다.”
“하오문의 정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네만, 설마하니 그놈들이?”
“맹주님께서도 이리 반응하실 만큼 하오문은 별것 아닌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들의 정보력은 본방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습니다.”
담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네. 하지만 어째서 그들이 이 사태에 관여했다고 보는 겐가?”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왜 그들이 이 사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예, 그렇지요. 바로 그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오문을 경시하는 이유는 신분이 천해서가 아닙니다. 천하기로는 우리 거지들이 제일 아닙니까?”
전평이 확신하듯 말했다.
“하오문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거대 연맹의 일에, 무림 거파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명백하지요.
그들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담사영은 결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숨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더욱,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잡아내기가 골치 아프다는 것이로군.”
“정확하십니다.”
전평이 적극적인 자세로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확신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 가능성으로 봤을 때, 하오문이 가장 유력합니다.”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을 납치한 이들은 빙궁 소속이네. 말하자면 하오문이 빙궁과 손을 잡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지나치게 멍청한 것일세.”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전평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이 드리워졌다.
“만일 정보를 교란한 쪽이 하오문일 경우, 그 납치범 일행에는 단순히 빙궁인(氷宮人)만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
“놈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신들이 하는 짓이 의천맹에 대한 명백한 적대 행위라는 것을.
그들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그런 일을 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면…….”
“철혈성, 혹은 마교.”
“……!!”
“만일 그렇다면, 하오문은 두 단체와 협력을 맺었을 확률이 지극히 높습니다. 빙궁이라는 뒷배만 믿고 설치기엔 사안이 너무 커졌어요.”
담사영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개방에 비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정보력이라면 그 자체로 심각한 위험이다. 그런 단체가 철혈성이나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제대로 조사를 해 봐야겠지요. 아직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교로군.”
“예?”
담사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만약 놈들이 빙궁만이 아니라 다른 단체와도 손을 잡았다면, 마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네.”
전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오히려 철혈성과 연수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 빙궁 일행이 철혈성주의 첩을 납치했다고 하지 않나. 철혈성주는 인내심이 깊은 자가 아니야. 첩을 납치한 조직과 손을 잡았을 확률은 결코 높지 않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철혈성주는 인내심이 없는 대신 배포가 대단하지요.”
“더 조사하게. 조사하다 보면 뭔가가 나오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 섣불리 결론짓고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저희의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일세.”
전평이 말했다.
“해서, 맹주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화산과 종남을 몰이꾼으로 쓸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십시오.”
“몰이꾼?”
“본맹의 다른 문파들은 이 일을 심각한 사안으로 보되, 직접 나서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도리어 그 두 문파를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일 걸세.”
“반면 화산과 종남에는 비상이 걸렸지요. 두 문파는 섬서 일대를 장악하고 호북까지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어떻게든 장문인들을 찾으려 들고 있지요.”
“자네 말은, 화산과 종남이란 패를 써서 하오문을 압박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하오문을 방심하게 만들고, 그 틈을 개방이 치겠다?”
전평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떠올랐다.
아무리 똑똑한 위정자라도 정보전(情報戰)의 생리를 알긴 어렵다.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의천맹주는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보려 합니다.”
“그러시게.”
담사영이 미소 지었다.
“결과만 좋으면 결국 그들에게도 좋은 일 아니겠나. 혹시 모를 뒷일은 확실하게 막아 줄 테니 마음 놓고 달려 보시게.”
“감사합니다.”
시원하게 뒤를 봐주겠다고 한다. 이제는 작정하고 중원을 들쑤시는 일만 남았다.
욕심은 많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한 그들이었다. 한정된 정보와 정세의 흐름만으로도 거의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해내는 건 누구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박자 늦었다.
제대로 사건을 파 보기도 전에, 범인의 윤곽을 확실히 그려 내기도 전에.
이미 그들이 노리던 이들은, 보란 듯이 호북을 가로질러 안휘에 들어서고 있었다.
* * *
“어머, 앵화야. 이거 맛있다.”
“그렇죠? 신경 써서 만들어 봤어요.”
“그냥 편히 쉬지 뭣 하러 이런 것까지 만들었다니? 덕분에 입은 즐겁지만.”
“헤헤, 시간이 좀 남았을 뿐이에요.”
여상린은 간이 잘 된 육포를 씹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육포인데도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적절히 밴 간과 감칠맛에 씹을 때마다 눈이 다 돌아가는 것 같다.
“나중에 앵화랑 혼인할 남편이 부럽다.”
“네에?!”
“어라? 뭘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있어?”
“아, 아니에요.”
“요고요고 아주, 응? 벌써부터 엉큼해 가지고 말이야.”
“아니에요! 아니에요!”
“뭐가 아닌데?”
앵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여상린이 킥킥대며 앵화의 어깨를 두들겼다.
“언젠가 앵화도 좋은 사람 만나서 알콩달콩 살아야지 않겠어?”
“아직…… 그런 생각 안 해 봤단 말이에요.”
“거짓말.”
“진짜예요!”
“알았다, 알았어. 앵화가 목청이 제법 좋잖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여상린이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때, 서량이 말했다.
“앵화 그만 놀리고 먹던 거나 마저 먹어라.”
여상린의 표정이 대번에 찌그러졌다.
“네네, 그래야지요. 어찌나 시녀를 그리 잘 챙기시는지.”
“아직도 삐졌냐.”
“안 삐졌어요!”
여상린이 씩씩거렸다.
“저 그렇게 오래 담아 두는 사람 아니거든요?”
“알았다.”
“모르시는 거 같은데요?!”
“알았다니까 그러네. 찔리냐?”
복장이 터질 것 같은 기색이었다. 가슴을 퍽퍽 때린 여상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됐어요.”
내심 한숨이 나왔다.
‘쓸데없는 짓거리 한 거지, 내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구겨진 청색 서신은 아직도 그녀의 품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버지께서 직접 서신을 보내셨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안정적이라는 거야.’
여상린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한 번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그녀가 서량을 힐끔거렸다.
눈을 감고 담담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는 서량.
‘뭐, 잘 생기긴 했어.’
전설의 미남이라는 송옥이나 반안이 떠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찬사를 받을 만한 외모다.
골격도 큼직큼직하니 참으로 믿음직하지 않은가.
막말로 능력도 좋고, 돈도 많다. 훗날 한 조직의 수장으로 내정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무림 최고의 신랑감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중원 무림 모두가 치를 떠는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라는 거지.’
뭐, 사실 그거야 알 바 아니다. 애초에 상대의 배경도 안 보는 성격인데 평판이라고 볼까. 게다가 그 악랄한 평가도 서량 때문에 생긴 게 아니지 않나.
‘좋기야 좋은데…… 쩝.’
한참 입맛을 다시던 여상린.
그때, 서량이 눈을 떴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그냥 얼굴 구경 좀 했네요.”
“새삼?”
“참 잘생겼다 싶어서요. 소녀들 방심을 어지간히 뒤흔들었겠어요.”
서량이 코웃음을 쳤다.
“그따위 거 관심도 없다. 나 살기도 바쁜 판에 뭔.”
무시무시한 진심이 묻어 나온다.
그렇다. 이 양반은 그런 사람이다.
이성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원체 목적이 명확해서 다른 데에 신경을 안 쓴다. 내 사람은 확실하게 챙기지만 딱 거기까지다.
“참 소교주님답습니다.”
왠지 떨떠름하면서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여인한테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니까.
‘하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걱정되는 것은 하나다.
‘절대 아버지랑 만나게 해선 안 돼.’
조용히 결심하는 여상린.
그때, 마부석에서 마동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위장님.”
“그래.”
덤덤하던 서량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리고 그 진지함 속에 약간의 긴장도 드리워졌다.
덜컹!
마차가 멈추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한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