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파격적인 출도 (6)
마차가 멈춘 곳은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폭포 앞이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폭포수가 귀청을 울린다. 하지만 결코 시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왠지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느낌이었다.
“경치 좋군.”
일행 모두가 나와 폭포를 낀 기암괴석을 구경할 때였다.
“오셨습니까.”
폭포 옆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 봐라?’
마동필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내.
중키에 평범한 인상을 한 사내였다. 무공을 익혔지만 결코 고수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서량은 놀랐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극마의 고수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게 이동했다는 것.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서량은 천하제일살수로 불려 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은신술에 도가 텄다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 서량의 눈이 빛났다.
‘진법(陣法)이로군.’
그렇다.
이곳 폭포 인근에 거대한 진법이 둘러쳐져 있다. 흐르는 기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진법의 존재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저 폭포 때문이다. 폭포의 소리, 수면으로 떨어지는 충격과 돌을 때리는 정도까지 몽땅 진법의 일부야. 그래서 깨닫지 못한 거다.’
서량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법에 대해 나름대로 조예가 있는 그조차 감히 엄두를 못 낼 최상위 진법이었다.
판마정에 비할 순 없지만, 판마정은 애초에 규격 외이니만큼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적어도 중원 천하에 산재한 진법 중엔 수위를 다투는 진법임이 분명했다.
“하오문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정오 중으로 도착하신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요.”
넉살도 좋다. 이쪽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넨다. 보통 배포가 아니었다.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철혈성의 군사(軍師)를 맡고 있는 황곤(黃坤)이라 합니다.”
“사뇌(邪腦) 황곤.”
“알아봐 주시는군요.”
서량의 눈이 빛났다.
‘생각보다 훨씬 젊군.’
이 년 전, 새로운 군사가 된 천재.
병사(病死)한 기존의 군사와는 달리 상당히 격정적인 전략에 능하다는 철혈성의 두뇌가 여기에 있다.
‘최소한 호 군사,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다. 철혈성에서는 말이지.’
철혈성은 정사지간의 문파는 물론 온갖 사파 문파들을 규합한 초거대 연맹체다.
그러한 연맹을 이끌기 위해서는 성주의 무공과 정치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성주가 할 수 없는 일, 성주가 나서지 못할 법한 일을 모조리 도맡아 처리하는 사람.
그가 바로 황곤이었다.
“설마하니 소문 자자한 철혈성의 군사께서 올 줄은 몰랐소.”
“와야지요.”
황곤의 눈이 빛났다.
“당연히 와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오?”
“이곳으로 들어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두 분입니다.”
최소한 혼자만 들어오란 말은 안 한다. 하지만 굳이 딱 두 명을 집을 필요가 있었던 걸까?
“진법의 수용 인원 때문이로군.”
황곤의 눈이 빛났다.
“정확합니다.”
“알겠소.”
서량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동필과 여상린, 앵화까지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린이가 나랑 갈래?”
여상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요?”
“왜? 문제 있나?”
여상린이 저도 모르게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의 얼굴은 뜻밖에도 아주 담담했다.
“마 호위를 데려가시지 않고요?”
“혹시 모를 일이 터졌을 때, 마차를 몰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동필이밖에 없어. 너희 둘만 남겨 놓으면 아무래도 전력의 공백이 커지니까.”
철혈성의 군사를 앞에 두고 잘도 그런 말을 한다.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전력을 알맞게 조정한다는 것이로군요.”
“막말로 혼자 가도 상관은 없다.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할래? 같이 갈래,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래?”
여상린이 마주 웃었다.
“당연히 같이 가야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철혈성의 주인을 볼 수 있겠어요?”
뭔가 노리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 여상린은 순순히 서량과의 동행을 수락했다.
황곤이 웃으며 말했다.
“빙궁주의 따님이시군요.”
“반가워요.”
“저야말로. 하면 이만 들어가실까요?”
“좋지요.”
서량이 마동필을 힐끔거렸다.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시라는 뜻이었다.
“갑시다.”
그렇게 황곤을 앞세운 서량과 여상린이 폭포수 옆, 작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 * *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이 있다.
인세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별세계를 뜻하는 말로, 환상적인 광경을 비유할 때 종종 쓰는 말이었다.
지금 두 사람 앞에 보이는 광경이 딱 그러했다.
“……워어.”
“처, 천국인가?”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버벅거렸다. 서량도 할 말을 잃었다.
작은 동굴로 이어지나 싶어 걸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열 걸음 정도 걸었나 싶은 순간, 또 다른 입구가 보이더니 이내 선경(仙境)이 나타났다.
요란하던 폭포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무척이나 상쾌했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휘감다 흘러 나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엔 커다란 집이 있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든 큼직한 평상 하나가 놓여 있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평상 옆엔 사슴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천하에 아름다운 곳을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곳에 비할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무릉도원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대단한 경치였다.
“세상에나, 지금껏 여행하면서 본 중원의 명소들은 죄다 시궁창 바닥이었네요.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여상린의 얼굴에 황홀한 빛이 감돌았다. 유독 경치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그녀에게 이곳은 선물과도 같았다.
서량이 황곤을 보았다.
“별장(別莊)이오?”
“역시 아시는군요.”
그렇다. 이곳은 중원 곳곳에 지어진 철혈성주의 별장 중 하나였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곳에 외인을 들여도 되는 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후 이곳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멋진 곳을 무너트리다니? 공적인 자리가 아니었으면 바로 말릴 뻔했다.
“자, 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럽시다.”
두 사람이 황곤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우우우우웅.
일순 서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멈추자 여상린 역시 멈춰 섰다.
황곤이 서량을 돌아보았다.
“예서 기다리시라 말씀드리려 했는데, 먼저 눈치 채셨군요?”
“그렇소.”
“……역시 대단하십니다.”
순수한 감탄이 어린 말이었다.
“허락을 받지 않고 이쪽 개울물을 넘으면 그 즉시 진법이 발동됩니다. 천하십대고수라도 쉽게 벗어나기 힘든 죽음의 늪이지요.”
“그렇소?”
“지금껏 이 생사의 교차 지점을 알아챈 사람은 셋을 넘지 않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기별을 넣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황곤이 개울물을 넘었다.
여상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걸어가?’
물 위를 밟고 나아간다.
눈썰미 없는 사람이 본다면 신법의 고수들이 펼치는 등평도수로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깜짝 놀란 여상린은 곧이어 황곤의 걸음이 유독 딱딱하다는 것을 느꼈다.
물을 밟는 게 아니라 마치 단단한 땅 위를 걷는 것 같다. 그의 바짓단에도 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여상린의 얼굴에 실망이 드리워졌다.
“왜 그래?”
“아뇨, 그냥…… 김이 좀 새서요.”
“김이 새다니?”
“아무리 아름다워도 허상은 결국 허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진짜만이 가치가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네 말대로 허상은 허상일 뿐이야.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어.”
“맞아요.”
여상린이 서량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이유가 뭐예요?”
“그냥.”
“그냥이라니요? 무슨 대답이 그래요?”
“진짜야. 그냥 데리고 왔어.”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데요?”
“감이라고 해 두지. 동필이를 데려오는 것보다, 나 혼자 오는 것보다 너와 함께 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여상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서량의 감이라면 믿을 만하다.
서량은 종종 감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었고, 그런 경우엔 대개 그의 판단이 일행에게 이로웠다.
“어떤 사람일까요?”
“글쎄다.”
“적어도 솔직한 사람은 맞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굳이 거짓말로 상대방 비위를 맞춰야 할 위치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그리고 보란 듯이 첩실을 삼은 것도 그래요. 뭐, 그게 잘못은 아니지만 그 연배에 어린 첩실을 두는 건 여러모로 부끄러울 수 있는 거잖아요?
민망할 수도 있고요.”
여상린의 눈이 빛났다.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는 사람. 철혈성주는 아마 그런 사람일 거예요.
욕망에 솔직하고 자신의 추함도 거리낌 없이 보여 주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디 네 예상이 맞는지 확인해 볼까?”
“네? 기다려야 하지 않아요?”
그때였다.
“나이도 어린 소저가 제법 날카로운 구석이 있군.”
우우우웅!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거부할 수 없는 역도가 실려 있었다.
위잉! 위이잉!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던 세상 곳곳이 일그러졌다.
졸졸 흐르던 개울물이 갑작스레 곡선을 그렸다. 풀을 뜯던 사슴 몇 마리가 순식간에 몇십 마리로 늘더니, 다시 한두 마리로 줄어들길 반복했다.
땅이 푹 꺼지는 곳도 있었고, 흘러가는 구름이 제멋대로 일그러지기도 했다. 마치 진법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그때와 비슷하다.’
이천상과 비무를 벌일 때.
구유마공의 삼 단계, 열세마왕공포식을 열지 못한 그의 성취를 올리기 위해 마공의 출력을 올렸던 그때.
이천상의 마기로 유지되던 판마정이 무너져 내리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힘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무너지는 진법의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비슷했다.
‘역시…….’
서량의 마안이 번뜩였다.
‘강해. 엄청나게 강한 상대다.’
훅.
별장의 문은 열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별장과 평상 사이,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번쩍하고 나타났다. 어떤 조화로 그와 같은 등장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치이이이익!
서량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본능적인 대처였다.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파가 삽시간에 일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기파에는…… 놀랍게도 살기가 섞여 있었다.
‘철혈성!’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지만.
그래도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완전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인, 자신이 가장 괴롭혔던 단체의 수장.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커져만 가는 증오의 그물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우우웅! 우우우웅!
서량은 애써 살기를 억눌렀다.
“흥미롭군.”
두 사내 중 한 발 앞에 있는 자.
오십 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반백의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넘긴 체격 좋은 사내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좋은 사이는 될 수 없다지만 초반부터 살기라? 그것도 내 앞에서? 과연 다르긴 다르군.”
작게 심호흡을 한 서량이 웃으며 물었다.
“철혈성주님이십니까?”
“그렇다네. 내가 바로 철혈성의 주인일세.”
천하십대고수의 일인.
의천무제 담사영과 함께 당대 무림 최강에 가장 가깝다는 수라제(修羅帝) 송금백(松錦伯)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