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파격적인 출도 (7)
“별로로군.”
십색지화 한 송이를 살펴보던 담사영이 이내 꽃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땅에 툭 하고 떨어지자마자 꽃이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마음이 심란하니 키우는 꽃도 이 모양 이 꼴이군.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야.”
의자에 앉은 담사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완연한 가을이었다. 겨울도 곧 찾아오리라.
뜨끈한 차를 마시던 담사영이 돌연 피식 웃었다.
“하오문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었다. 용두방주는 확률을 말했지만, 그가 그리 말했다면 그냥 하오문이 끼어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진정 예상치 못한 변수거늘.”
정보 단체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여론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 없었던 때도 정파 무림이 끝끝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바로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는 이들도, 굳이 손을 들라면 정파 무림에 손을 들어 주었다.
협(俠), 그리고 의(義).
무림인이란 족속들은 하나같이 도덕적 결함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정파 무림은 민중이 간지러워하는 곳을 긁어 줄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의리와 협을 세상에 각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정보 단체, 대표적으로 개방이었다.
“만일 하오문이 그것을 방해한다면, 참으로 골치가 아파질 터인데.”
담사영이 혀를 찼다.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맨손으로 올라와 지금의 위치를 얻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여느 위정자들과 달리 스스로에게 솔직할 줄 알았다.
“순백의 화선지에 먹물을 뿌려 구겨 놓았거늘, 이리되면 내 행동에도 제약이 걸릴 터인데.”
욕망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 왕좌(王座).
왕좌가 흔들리는 순간, 겨우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은 구대문파가 다시 움직일 터였다. 정확히는, 현세대에 밀려 뒷방에 나앉게 된 전대의 인물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들까지 잡아먹으라 한다면야 못 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자칫 지금의 체제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정파 무림 안에서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
“흐음, 설령 하오문이 아니라 해도 문제야. 언제라도 변수가 될 만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구먼. 물꼬 하나는 터놓을 수밖에.”
그가 허공의 줄을 당겼다.
그러자 곧이어 무인 한 명이 들어와 부복했다.
“강 노선배에게 연락하거라.”
* * *
서량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이건 뭐 정신을 못 차리겠군.’
우우웅. 우우우우웅.
짓눌릴 대로 짓눌린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허공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개울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딪치는 두 절대자의 기파가 진법에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원한을 떠나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서량은 송금백의 무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구유마공의 세 번째 지옥문을 열고 진정한 극마에 오른 그였다. 순수한 실력만으로도 구대마존보다 한 수 위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무형의 압력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그 늙은이보다도 강하지 않을까?’
담사영이 떠올랐다.
살왕이었던 시절, 굳이 혈고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옭아맬 수 있을 만큼 강했던 또 하나의 절대자.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담사영보다 기질이 더 거칠기에 그렇게 느껴졌을 뿐, 실제 기량은 붙어 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이천상이 말하길 담사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강해지고 있다 하였다. 지금의 담사영은 옛날의 담사영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송금백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이 안정되는군.’
첫 만남의 충격이 커서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드러냈지만, 심호흡 몇 번으로 들끓던 살의가 진정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상대의 무력에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만큼 서량 역시 성장했다는 뜻이리라. 제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하게 상대를 평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서량이 포권을 취했다.
“서량입니다.”
소속도, 위치도 밝히지 않고 그저 이름만 밝힌다.
예의가 없진 않지만, 한 세력의 주인을 향한 인사로는 충분하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송금백은 그런 서량을 책잡을 수 없었다.
‘굉장하군.’
은근하게 전해져 오는 기파가 상상을 초월한다.
‘반로환동의 고수? 그럴 리가.’
서량이 송금백을 마주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면, 송금백 역시 서량에게 충격을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어지간한 무인은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기도의 압력만으로 무릎을 꿇릴 수 있다.
한데 눈앞에 저 녀석은 자신의 압력에 맞서는 걸 넘어, 도리어 이쪽에까지 강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송금백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마교가 괴물을 키웠군.’
그가 자신의 옆을 돌아보았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은 바로 그의 제자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준급의 무위를 자랑하는 그의 제자는 얼마 전,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절정의 벽을 뚫었다.
찬사를 받아 마땅한 재능이었다. 철혈성의 차기 주인으로 손색이 없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저 녀석에 비하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부족함이 느껴진다.
“마교의 작은 주인을 이렇게 보는군.”
서슴없이 마교라 칭한다. 하지만 서량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희가 건너가면 되겠습니까?”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그러게.”
서량이 거침없이 걸어 나왔다. 여상린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발이 개울물에 닿았다.
치이이이익!
물을 밟자마자 희뿌연 수증기가 올라왔다.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개울물을 증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송금백이 저 멀리 뒤에 선 황곤을 돌아보았다.
황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법의 결계를 거두었다는 뜻이었다.
송금백은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대단하군.”
결계를 거두면 저 개울물은 진짜가 된다. 등평도수를 펼치지 않는 한, 발이 젖어야 정상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물이 증발하고 있다. 진짜이면서도 허상인 저 개울물은 외부 요인에 의해 증발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극강의 마기가 허상조차 날려 버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 진법에 저항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침내 서량과 여상린이 개울물을 넘어왔다.
송금백이 뒷짐을 지곤 몸을 돌렸다.
“올라오게.”
잠시 후.
평상 위에 서량과 송금백이 마주 앉았다. 서량의 뒤에는 여상린이 서 있었고, 송금백의 뒤에는 제자 환야(幻夜)와 황곤이 섰다.
“술은 좀 하는가?”
“가끔 즐기지요.”
“한잔하겠나?”
“얘기가 잘 마무리되면 그때 하도록 하지요.”
명백한 거절이었다.
환야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황곤의 얼굴엔 흥미가 일었다.
송금백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이 많군.”
“호탕함으로 포장된 어설픔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호탕함으로 포장된 어설픔이라…… 맞는 말이다만, 적어도 난 공적인 자리에서 술수나 부리는 사람은 아닐세.”
“믿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환야의 볼이 미미하게 떨려 왔다.
송금백의 얼굴에 작은 흥미가 일었다.
“믿을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날 앞에 두고 그리 말하는가?”
“오히려 덜컥 그러자고 하는 게 성주님을 우습게 보는 처사가 아닐는지요?”
“왜 그리 생각하나?”
“밑바닥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그 자리까지 올라가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상상할 순 없지만 아마도 하루하루가 살벌한 전장의 연속이었겠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속임수가 난무하는 사파라는 전장에서 끝끝내 승리를 쟁취한 사람을 믿으라는 것은, 며칠 굶은 대호(大虎)가 사는 굴에 맨몸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호오?”
“안타깝게도 저 역시 그리 물렁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닙니다. 최소한 칼 한 자루 차기 전까지는 위험 지역에 얼씬도 안 하지요.”
칭찬에도 종류가 있다지만, 이런 종류의 칭찬을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꿈보다는 해몽이라지. 그래도 그리 띄워 주니 기분은 좋네.”
“기분 좋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허허.”
결국 송금백은 웃고야 말았다.
이 애송이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동시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은 쉽게 보기 힘들다.
“혹시 이건 아는가?”
“무엇을 말씀입니까?”
“난 이 자리에 앉기 위해 수많은 살상을 저질렀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나보다 약한 이들이었어.”
송금백의 눈이 번뜩였다.
“나보다 약한 자를 그리 많이 죽였던 이유는 단순하네. 싹을 뽑아 버리기 위함이지.”
“…….”
“잘난 놈들은 많네. 하지만 괴물이 될 놈들은 그중 한 줌도 되지 않아. 나는 그런 놈들을 죄다 죽이거나 포섭하면서 이 자리에 섰네.”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또한 칭찬이군요.”
“잘 아는군. 자네의 무공과 성정,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면 줄수록 나는 자네를 경계할 수밖에 없네.
삼세의 관계가 있어 죽일 수야 없겠지만,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내 후계를 위해서라도 자네를 짓누르고 싶어지는군.”
“솔직하시군요.”
“진짜 강함은 솔직함에서 나오지. 아까 저 어린 소저가 말했듯, 나는 거짓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는 사람일세. 그렇기 때문에 강한 것이야.”
송금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자,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을 해 보게. 자네를 경계하는 나를 어떻게든 설득해 보게.
상황에 따라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자네에게 힘을 실어 줄 수도 있는 사람임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보네.”
서량이 안광이 번뜩였다.
몇 마디 대화로 서로가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걸 충분히 보여 주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저의 정체를 알려 드린 이유는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중원에서 활동하기 한결 편해지고자 함이겠지.”
“그렇습니다. 이 자리가 끝나고 성주님께서 제 뒤통수를 치시면, 저는 제법 곤란해질 겁니다.”
“곤란해지기야 할 테지만 딱 그 정도가 전부겠지. 자네를 진짜 곤란에 빠트리려면 내가 직접 손을 써야 해.”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서량이 미소가 사라졌다.
송금백의 눈이 깊어졌다. 서량이 비로소 본심을 꺼내려는 순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저는 철혈성을 무너트릴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은 성주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본교를 지상에서 지우고 싶으시지요?”
위험천만한 말을 잘도 내뱉는다.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뜯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리할 걸세.”
“저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저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풀 수 없는 증오의 사슬을 만들어 버렸지요.”
“…….”
“그 사슬을 잠시 옆으로 치워 두었으면 합니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의천맹부터 잡자?”
“‘잡자’가 아니지요.”
“……?”
“제가 잡을 겁니다.”
그 말에 송금백은 물론 환야와 황곤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의천맹을 잡겠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의천맹주 휘하, 그와 함께하는 이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 버릴 참입니다.”
강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을 지탱해 주는 것은, 너무나도 깊고 깊어서 오히려 사람을 담담하게 만드는 한(恨)과 증오였다.
“어떻게?”
바로 지금이다.
번쩍!
서량의 마안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빛을 발했다.
“맹주를 직접 찾아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