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파격적인 출도 (8)
송금백의 얼굴에 더 이상 미소는 없었다.
“의천맹주, 의천무제 담사영에게 직접 찾아가겠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는 서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렬한 눈빛, 그 눈빛보다 열 배는 더 강한 목적의식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송금백은 확신했다. 이놈의 말은 진심이라는 걸.
이 말도 마귀 놈은 정말로 의천맹주를 찾아갈 생각인 것이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내 보기에, 자네는 의천맹주를 무척이나 증오하는 것 같군. 맞나?”
“그렇습니다.”
“대체 이유가 뭔가? 조금 전 자네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가 만들어 낸 증오의 사슬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얼마나 의천맹주를 증오하는지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저 하늘에 진정 신(神)이라는 존재가 있어, 제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저는 고민 없이 의천맹주를 죽이러 갈 겁니다.
그 한 번의 기회에 천하 만민이 불타 신음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서량의 목소리는 갈수록 담담해졌다.
반면 그의 증오는 갈수록 깊어졌다.
“제가 들이마시는 공기를 그놈이 함께 마시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한 번씩 불쑥 떠오르는 그러한 생각에, 어느새 문고리를 잡고 뛰쳐나가려는 저 자신을 보며 놀라곤 합니다.”
“…….”
“제게 의천맹주란 그런 존재입니다. 때로는 천만 명의 의천맹주가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놈을 천만 번이나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제 증오를 이해하십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군.”
“아니요, 성주님께선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저의 증오와 한을 이해할 수 없지요. 설령 사신(死神)이라도 제 증오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서량을 주시하던 송금백이 힐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의복에 가려진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이놈…….’
다시 서량을 보는 송금백의 얼굴에 헛웃음이 깃들었다.
‘완전히 미친놈이었군.’
사람이 누군가를 증오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증오할 수는 없다.
그저 그럴듯한 단어의 나열 정도가 아니다.
이놈은, 자신의 증오를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어휘력을 갖고도 자제하고 있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담아낼 수 있는 증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섬뜩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한 인간이 이렇게까지 깊은 증오를 품을 수 있을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음?”
“이 불타오르는 증오는 의천맹주 하나만을 노리고 있지 않습니다.”
장담컨대 송금백은 근 몇 년 내에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
“그렇습니다.”
“말해 줄 수 있나?”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말할 수가 없었다. 송금백과 비요왕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증오와 한은 잘 알았네. 자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천맹주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겠어.”
“그랬으니 연락을 드린 겁니다.”
“그렇지. 말하자면 자네는 날 설득하기에 앞서 행동으로 보여 준 격이네.”
어느새 송금백의 얼굴에도 진지함이 어렸다.
“자네.”
“말씀하십시오.”
“내 첩을 납치한 것이 자네지?”
서량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렇습니다.”
“솔직하군.”
“거짓을 입에 담아야 할 만큼 약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래 보이는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송금백이 다시 물었다.
“묵풍대를 몰살시킨 것도 자네겠지?”
“그렇습니다.”
황곤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송금백이 웃으며 말했다.
“향이를 납치한 거야 그렇다 치세. 어쨌든 안전하게 본성으로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자네 손에 본교 최정예 부대 중 하나가 증발해 버린 것이네.”
“그랬군요.”
“어떻게 배상할 셈인가?”
“꼭 배상을 해야 합니까?”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그간 성주님께서 알음알음 빼 드신 본교의 사업체 몇 개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순간 송금백과 황곤의 눈이 번뜩였다.
“그걸 알고 있었나?”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성주님과 만나러 왔겠습니까.”
“하오문에서 얻은 정보겠지?”
“그것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송금백이 고개를 저었다.
“송곳니 날카로운 범인 줄로만 알았더니, 여우도 이런 여우가 없었군.”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는 듯싶던 송금백이 무릎을 쳤다.
“좋네. 묵풍대 건은 이대로 묻어 두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감정 소모해 가며 대화를 질질 끌어 봤자, 서로에게 악영향만 줄 뿐이었다.
시원시원한 송금백의 말에 이번에는 서량이 부담을 느꼈다.
‘부하들의 목숨을 장기의 졸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도 판단을 내림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만만치 않군.’
지금까지의 대화는 서량이 주도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었다. 송금백이 여유 있게 받아 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대화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해 보라는 배포, 그리고 넉넉하게 받아 주는 여유.
서량이 처음 보는 부류의 위정자였다. 한없이 딱딱하고 오만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밀어붙일 땐 누구보다도 화끈하게 움직일 테지만, 계산된 신중함과 여유 또한 품에 안고 살아가는 자였다.
너무나도 강해서 감히 마주 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절대마신 이천상.
너무나도 교활해서 한 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어둠의 통치자 담사영.
송금백은, 그 둘과 달리 솔직함이란 무기를 바탕으로 강유(强柔)를 완벽하게 조화시킨 속세의 위정자였다.
필요하다면 지금 보여 주는 화통함을 젖혀 두고 언제든 악귀처럼 돌변할 수 있는 자였다.
“돌고 돌았지만 결국 자네가 내게 바라는 건 아직 말하지 않았군. 묻겠네, 이 내게 무엇을 바라나?”
서량의 눈이 빛났다.
“분위기를 몰고 가 주십시오.”
“분위기라…….”
송금백이 황곤을 힐끔거렸다.
황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실례하겠습니다.”
평상에 올라온 황곤이 송금백의 우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교는 지난 삼십 년간 대외 정책을 극도로 축소했습니다.
본교의 소교주인 제가 만남을 청한 연락에, 성주님께서 직접 나오신 것은 그만큼 놀라셨기 때문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네.”
“말하자면 본교는 삼십 년간 허깨비 같은 존재가 된 것이지요.”
순간 황곤의 눈이 빛났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중원을 자유로이 활보하고 싶다…… 그게 그 뜻이었군.”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다음 할 말을 알아챈다. 무척이나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당금 천하에 마인이 등장하면 여러 반응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반응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감정이 중원을 어지럽히겠지요.”
서량의 눈이 빛났다.
“바로 공포입니다.”
“그럴 걸세.”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겠지. 그만큼 호기심도 느낄 테고.”
“철혈성에 바라는 게 그것입니다. 공포를 희석하고 호기심을 극대화해 주십시오.”
“철혈성이 나서서 마인의 활보가 괜찮다는 걸 중원 천하에 보여 주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수는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겠군.”
“정확하십니다.”
송금백이 황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교의 소교주는 이 중원 땅에, 강호삼세의 무인들 모두가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라는 말인 듯하네만.”
황곤이 고개를 저었다.
“부(否), 안 됩니다.”
느닷없이 반대 의견이 나왔다. 서량의 시선이 황곤을 향했다.
“세상이 다소 어수선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민중은 정파 무림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본성이 나서서 신교의 마인이 출몰한 것을 두둔한다면, 흐트러진 정파 무림의 힘이 한군데로 집결될 확률이 높습니다.”
중원 정세를 단숨에 관통하는 말이었다.
“만일.”
황곤의 눈이 번뜩였다.
“정파 무림의 힘이 집결되기 전, 소교주가 직접 의천맹주를 만나러 간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 중에 죄송하오만, 의천맹주를 죽이면 정파가 더더욱 집결되지 않겠소?”
“어차피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다면, 집결되기 전에 없애 버리는 것이 이득입니다.”
이런 무서운 사람을 보았나.
서량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뜸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군.”
“의천맹주는 지금도 충분히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런 그가 정파 무림의 힘을 온전히 집결해 한판 승부를 벌이려 한다면, 안 그래도 힘든 싸움이 두 배는 더 어려워질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즉, 이 만남이 끝나자마자 내가 의천맹주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이군.”
“나아가 죽이셔야 합니다.”
황곤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소교주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성주님의 반응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시간에 의천맹주를 죽이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합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오.”
황곤이 송금백에게 말했다.
“여기까지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의 전부입니다.
서 소교(小敎)의 제안은 분명 매혹적입니다만, 함부로 손을 잡았다간 적의 몸뚱이만 불려 주는 꼴이 됩니다.”
“그렇군.”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파 무림과 마도 무림이 사상 초유의 연수 관계를 맺어야 상대가 가능하겠지?”
황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의천맹을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요.”
“알았네.”
황곤이 고개를 숙이곤 평상 밑으로 내려갔다.
잠시 고심하던 송금백이 문득 여상린을 힐끔거렸다.
“빙궁에서 온 소저, 이름이 무엇인가?”
여상린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여상린이라고 해요.”
“나더러 도둑놈이라고 했다 들었네.”
“……윽.”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들으셨어요?”
“한 이불 덮고 사는 사이일세.”
“그냥……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라……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잠시 우물쭈물하던 여상린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네.”
송금백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황곤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환야만이 불편한 눈으로 서량과 여상린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네. 난 도둑놈일세.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 이 나이에도 손에 넣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지.”
“예에.”
송금백이 웃으며 서량을 보았다.
“서 소교.”
처음으로 서량에게 제대로 된 호칭까지 붙여서 말을 거는 그였다.
“말씀하십시오.”
“내 욕심은 천하(天下) 그 자체일세. 나는 천하일통을 원한다네.”
“…….”
“하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진척을 못 봤지.
천하를 일통하든 어쩌든, 일단 누군가가 시작을 해야 틈을 노리든지 정면 승부를 벌이든지 해 볼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간 고민이 많았네. 어떻게 천하를 뒤흔들어 볼지.”
송금백의 눈이 묘해졌다.
“방금까지도 고민했네만, 저 소저와의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마음을 다잡았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 역시 마주 일어났다.
가만히 서량을 보던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봐주지.”
서량이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린 여전히 동맹이 아니네. 나는 그저 자네를 장기의 말로 쓰려는 것뿐이야. 동시에 자네 역시 우리를 이용하려 들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마음에 들었어.”
송금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섣불리 손을 잡자거나 아부 따위로 내 마음을 흔들려 했다면 절대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걸세. 자네 같은 제자를 두다니, 교주가 부럽구먼.”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즉흥적으로 선택을 했다?
그렇다. 송금백은 그런 사람이었다. 계산을 할 땐 누구보다 냉정하지만, 한 번 마음에 들면 그대로 쭉 나아가는 화통함도 갖추고 있다.
비록 그것이 철혈성의 존립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지라도.
바꿔 말하자면, 철혈성을 뒤흔들 선택을 내릴 만큼 서량이 보여 준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한번 화려하게 출도해 보게. 정파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봐. 날카로운 우박 몇 조각은 알아서 막아 줄 테니.”
“감사합니다.”
서량이 포권을 취했다.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기대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