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마(魔)에 종착지는 없다 (4)
검절(劍絶) 남궁단(南宮端).
당대 남궁세가의 가주로, 안휘제일의 검사라 불리는 초절정고수다.
대개 단호하고 냉정한 면이 있던 이전의 가주들과 달리 상당히 부드럽고 온화한 성정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량이 아는 남궁단은, 그런 세간의 평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사 년, 아니 오 년 만인가?’
살왕 천하진으로 살아갈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대면을 한 것은 아니었고, 남궁단이 담사영과 대면할 때 은신해서 본 것이었다.
꽤나 인상적인 사람임은 분명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대부분이 담사영의 세 치 혀에 농락당했지만, 남궁단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상냥했으며 도리를 알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면 때문에, 당금 남궁가의 발언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내 중진 중 서넛이나 있을까 싶었거늘 가주가 직접 왔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뜻이겠지.’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남궁가주 검절 남궁단, 맞소?”
처음 본 사람이 대뜸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다. 대외적으로 얼굴이 제법 팔렸다지만 경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남궁단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귀하는 누구시오? 누구기에 이토록 섬뜩한 기를 풍기고 있는 게요?”
마인과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서량의 기가 마기라는 것도 모른다.
서량이 당당하게 말했다.
“신교(神敎)에서 왔소.”
“……신교?”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소교(小敎), 서량이라 하오.”
남궁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마……신교?”
“…….”
“……설마?!”
“그렇소.”
차차차차창!
남궁단의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검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았다.
서량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남궁단 정도 되는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멈춰라! 모두 납검(納劍)하도록!”
스르르릉.
수십 자루의 검이 검갑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딱 한 자루의 검을 납검한 것 같은 깔끔한 소리였다.
“발검 준비.”
번쩍! 번쩍!
수십 쌍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리 어둡지 않은 숲속, 날카로운 눈빛이 서량 일행을 주시했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검을 집어넣으라 말했으면서 다시 발검을 명한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당신이 진정 천마신교의 소교인지는 모르겠소. 다만 이토록 위험한 기를 풍기는 자를 앞에 두고도 경계를 풀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무리라오.”
남궁단이 살짝 포권을 취했다.
“이해해 주시길.”
물끄러미 남궁단을 보던 서량이 마동필과 여상린을 돌아보았다.
마동필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여상린의 얼굴에도 감탄이 드리워졌다.
‘대단한데?’
남궁단이 서량의 기파에 경악했다면, 서량과 두 사람은 남궁단의 언행에 놀랐다.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고들 하지만, 살벌한 무림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만으로도 남궁단의 인품이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물며 남궁단은 한 가문의 주인이었다. 적대 세력이라 볼 수 있는 천마신교의 소교주에게 먼저 인사까지 한다는 건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서량은 감히 남궁단의 인사를 가벼이 받지 못했다.
“딱딱했던 말투를 용서하십시오. 다시 인사드립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 서량이라 합니다.”
“남궁가를 이끄는 남궁단이외다.”
종사끼리의 인사였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엄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남궁세가의 검사들이 있다는 정보는 들었습니다만, 설마하니 가주께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외다. 설마 이런 곳에 신교의 소교주가 올 줄은 몰랐소.”
다른 이들처럼 마교가 아니라 신교라 한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남궁단의 눈빛에 혼란이 깃들었다.
“그 강렬한 기파는 필경 마기겠지.”
“그렇습니다.”
“미안하오. 쉬이 믿기지가 않소. 귀교는 삼십 년이 넘도록 중원에 나서질 않았거늘, 대체 언제부터…….”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꽤 되었습니다. 물론 저와 몇몇 일행들만이 나왔을 뿐입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이다. 이런 식의 대면은 처음이지만, 다소 딱딱하던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귀 가문과 마찰이 있을 시 전투를 불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가주께서 저희를 존중해 주시는 듯하니 서로 쓸데없는 칼부림은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이오. 천하에 누가 있어 신교의 마인과 싸우고 싶겠소. 다만…….”
남궁단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서로 간의 목적이 충돌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물론 그렇겠지요.”
남궁단 정도의 고수라면 서량의 실력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 그에 대해 놀랐겠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게다가 충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각자의 위치를 확실하게 해 두었다.
무공을 떠나, 성정과 인품만으로도 찬사를 받아 마땅할 종사였다.
“우리는 모종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왔소.”
남궁단은 먼저 본인의 목적을 밝혔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 모종의 세력은 천룡궁이겠군요.”
“……잠깐의 대화로 서 소교의 목적도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소. 내가 유추한 바가 맞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칼부림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려.”
진심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남궁단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상대는 수천 년 무림사에서도 최강, 최악이라 불리는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다.
“한데 서 소교는 무슨 일로 천룡궁을……?”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의천맹은 빙궁을 제외한 나머지 삼궁과 손을 잡았습니다. 한데 왜 그들과 대치하시는 겁니까?”
남궁단이 한숨을 쉬었다.
“그 부분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소. 내용도 많을뿐더러, 내 비록 현 정권을 싫어하는 쪽이나 명백히 백도(白道)를 걷고 있소이다.
귀교와는 명백한 대립 관계인 만큼, 섣불리 말하기는 힘들겠소.”
“이해합니다.”
“당연히 서 소교도 본인의 목적을 말해 주긴 힘들 거라…….”
“힘들지 않습니다. 딱히 숨길 것도 없고요.”
남궁단의 눈이 커졌다.
“하면 대체 왜?”
“언젠가 부딪쳐야 할 적이기 때문입니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간단한 이유였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전혀 다르지요. 천룡궁이야 박살 내 봤자 거기서 끝이겠지만, 귀 가문과 싸우면 전쟁이 터집니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간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시발점이 제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가만히 서량을 보던 남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 소교의 의지를 존중하겠소. 하면…….”
“우리는 이대로 갈라지면 될 것 같습니다.”
목적한 바가 같으니, 굳이 서로 싸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합공(合攻)은 불가하다. 손발도 안 맞을뿐더러, 아무리 그래도 정파 최고의 명문과 마도 총본산의 수뇌부가 손을 잡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남궁단이 포권을 취했다.
“별다른 분란이 없었으면 싶소.”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그럼 이만.”
서량이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마동필과 여상린이 따랐다.
멀어져 가는 일행을 보는 남궁단의 눈빛이 점차 깊어졌다.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이라…….”
그때, 한 여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지금은 공석이다.”
“네, 가주님.”
장난스레 혀를 삐죽 내민 여인, 남궁화(南宮花)가 물었다.
“이대로 보내 주어도 괜찮을까요?”
“하면 싸우기라도 하잔 말이더냐?”
“그건 아니지만 상대가 정말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면 그냥 보내는 것도…….”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의 병력으로 저이들과 싸워 봤자 좋을 게 없다.”
“네?”
“나와 너, 그리고 정찰을 나간 섬영조(閃影組)와 뇌왕검단(雷王劍團)이 전부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판단이 안 선다.”
남궁화의 눈이 부릅 뜨였다.
“말도 안 돼요! 저들은 고작 셋…….”
“고작이 아니다. 삼백, 삼천이 될 수 있는 셋이야.”
남궁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린 나이에 벌써 화경, 아니 극마에 오르다니.”
“……!”
“강한 존재감을 발하던 천마신교가 어찌하여 대외 활동을 축소한 것인지 의아했거늘, 저런 괴물을 키워 내기 위해 그랬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네 조부와 견주어도 크게 부족함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 그럴 수가.”
충격을 받은 남궁화가 퍼뜩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대 조부님에 비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 절대의 경지에 올랐더라도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게다가 저희의 모든 병력을 쏟아부으면 십대고수라도 무사하기 어려울걸요.”
“그 역시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력의 질과 양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환경, 상황, 그리고 변수를 포함한 운이다.
승부란 언제, 어떤 식으로 결과가 날지 모르는 법. 남궁단은 그런 부분은 아직 남궁화에게 이르다고 생각했다. 아니,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경험해 보기 전까진 절대로 모르는 것이 승부의 세계니까.
‘충격적인 무공이다. 단순한 극마가 아니야. 십대고수와 비해도 손색이 없어.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저 성품이다.’
어린 나이에 극마에 올랐다. 오만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교의 소교주는 예의를, 그리고 물러날 때 물러날 줄을 알았으며 선을 지킬 줄도 알았다.
성품과 성정은 때로 무공보다도 무서운 힘이 될 수 있다.
“중원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지겠어.”
* * *
“왜 그냥 가시는 거예요?”
“뭐가?”
“남궁세가와 손을 잡으면 일이 더 쉬워지잖아요?”
“마인과 정파제일의 검가가 손을 잡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소교주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시는 분이잖아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네 말이 맞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그런데 왜……?”
“난 아니지만, 저이들은 신경을 쓰겠지.”
“아.”
“강호 무림 최악의 단체라 불리던 악귀 집단의 작은 주인이 삼십 년 만에 세상에 나타났다.
그런 마귀와 손을 잡았다간, 차후 남궁세가의 위신이 바닥을 치게 될 거다. 가주의 평판도 생각을 해 줘야지.”
여상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가주가 마음에 드셨군요?”
“넌 아닌가?”
“……쩝.”
마동필이 말했다.
“비로소 정파인다운 정파인을 본 것 같습니다.”
“그래.”
서량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어쨌든 남궁가와 싸울 필요는 없겠어.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제대로 하자고.”
파아아악!
일행이 다시 달려 나갔다.
광목림이라 하더니, 이름 그대로 정상적이지 않은 나무들만 한가득이다. 내부로 향하면 향할수록 숲의 분위기도 점점 음험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타닥!
불거져 나온 굵은 나무뿌리 위에 선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피 냄새?’
기척 없는 피 냄새, 그리고 사기(死氣).
짐승의 피 냄새가 아니다. 사기에도 원한이 느껴졌다. 사람 시체였다.
백여 장을 더 나아간 일행.
“……!”
마동필과 여상린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 이게 뭐야?!”
위이이잉! 위이이잉!
수천, 수만 마리의 날벌레들이 꼬인 곳에 이십여 구의 시체가 끔찍한 몰골로 나뒹굴고 있었다.
서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꿈에서 본 광경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벌레의 수가 더 많다는 것과 바닥에 너부러진 시체가 마동필과 여상린, 앵화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때였다.
쿠우웅!
북쪽에서 강력한 파동이 느껴졌다. 익숙한 검기(劍氣)와 낯선 사기(邪氣)의 부딪침이었다.
서량이 외쳤다.
“천룡이다!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