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마(魔)의 개척지 (1)
“방주님!”
“왔느냐? 한 점 먹을래?”
“아…… 괘, 괜찮습니다.”
“쩝쩝, 그래. 뭐가 좀 나왔느냐?”
“이것을.”
전평이 거지가 내민 서신을 빼앗았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서신은 거의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거기에 쓰인 글씨도 어지럼증을 유발할 정도의 악필이었다. 게다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도형 비슷한 것도 그려져 있었다.
글자도, 도형도 범인(凡人)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전평은 그 낙서 같은 글을 읽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열심히 개고기를 뜯으며 서신을 보던 전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오? 이것들 봐라?”
“굉장합니다. 이런 것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전평의 얼굴에 감탄이 묻어 나왔다.
“하오문이 작정을 했구만. 이 정도로 복잡한 정보망은 나도 몇 번 본 적이 없어.
게다가 시기를 보면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세부 계획까지 몽땅 짜 넣은 듯한데…….”
“하오문주가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닐는지요?”
“그럴 리가 있나. 관짝에 들어갈 나이가 다 된 양반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
“하면……?”
“뭐가 됐든, 이건 절대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그린 게 아니야. 하오문에 말도 안 되는 천재들이 무수히 많지 않은 이상은 말이지.”
전평의 눈이 반짝였다.
“소문주인가?”
“소문주라면……?”
“공야치라고, 하오문주가 그렇게 아낀다는 천재가 있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이 정도 정보망을 구축해서 중원 전역에 혼란을 야기할 만한 인재라면, 딱 그 녀석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전평은 생각에 잠겼다.
‘개방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던 전전대 방주님께서 이와 비슷한 정보망을 구축한 적이 있었어. 달포 정도 걸리셨다던가?’
정보망의 크기와 촘촘함, 예상 반응과 그에 따른 대책까지 보면 달포든 한 달이든 거기서 거기다.
만일 이 정보망을 직접 그리고 실행까지 한 게 정말 공야치라면, 최소한 녀석의 잠재력이 전전대 방주님에 필적한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결국 이 모든 소행이 하오문의 짓이라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남은 살점 하나까지 쪽쪽 빨아먹은 전평이 뼈다귀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얌전히 쓰레기나 뒤지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달달한 열매에 눈독을 들이셨나.”
원한이든 뭐든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안 그래도 거슬렸던 하오문이다. 한번 건드리면 끝이 없는 싸움이 될 것이요, 돈도 많이 잡아먹을 테니 적당한 선에서 내버려 두었건만 숨어서 이런 짓까지 벌이다니.
‘문제는 이놈들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이냐는 건데.’
담사영과의 대화에서 그는 하오문이 철혈성과 손을 잡았으리라 생각했다. 반면 담사영은 마교를 꼽았다.
‘제대로 파 보기도 전에 놈들은 호북에서 사라져 버렸다. 행선지는 안휘로 추측…… 안휘에는 남궁이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철혈성의 입김도 강한 곳이다.’
장난기 넘치던 전평의 눈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이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면 놈들도 안전한 구역으로 일시 후퇴를 감행하고 싶었겠지. 그렇다면 정말 철혈성과?’
그때였다.
“방주님!”
문을 열고 들어온 거지는 칠 결의 매듭을 건 자, 개방의 장로 중 하나인 풍영개(風影丐)였다.
“무슨 일이신가?”
“이걸 보십시오!”
풍영개가 건넨 서신을 본 전평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남쪽에서?”
“그렇습니다!”
“귀신같이 흉흉한 기를 풍기는 일단의 무리라…… 그것도 무려 백 명이나?”
“또 다른 보고로, 그들의 기운은 마주하는 순간 몸이 얼어붙을 만큼 섬찟하다고 합니다!
인세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흉포함은 정파의 신공이나 사파의 사공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고 하였습니다!”
중원의 남쪽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진군하는 무인들.
정파의 무공도, 사파의 무공도 아닌 독특한 기를 풍기는 고수들.
“……마교?”
철혈성, 그리고 마교.
전평이 벌떡 일어났다.
“너! 맹주님께 전하거라. 하오문이 확실하다고.”
“예!”
“십삼장로는 지금 당장 구안조(狗眼組)를 파견하게! 남쪽에서 올라오는 그놈들의 동선을 매 순간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하면 방주님께서는……?”
전평이 한구석에 나뒹굴던 몽둥이를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하오문주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야겠다.”
* * *
“쿨럭!”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남궁대산.
말 그대로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지만,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화아아아악!
나무와 나무 사이,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전파되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없던 힘도 쥐어짜게 만든다.
전력이 아님에도 관절이 삐걱거리고 등허리가 서늘해진다. 장담컨대, 남궁대산은 지금껏 이보다 더 흉흉하고 두려운 기운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흐음? 일어났나?”
오싹!
“튼튼하군. 그게 음…… 그렇지, 창궁심법(蒼穹心法)이라고 했던가?”
남궁대산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앞에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서 있었다.
‘크다!’
자신도 어디 가서 키와 덩치로는 꿀린 적이 없는데도, 이 청년에게는 안 되겠다.
자신보다 세 치는 더 큰 키에, 넓은 어깨와 길쭉한 팔다리가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육체였다. 게다가 은연중 풍겨 나오는 존재감이 청년의 몸을 두, 세 배는 더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시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무리하지 말게. 그러다가 진짜 죽겠어.”
까마득히 높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말투였다. 천성이라기보다는 지금껏 이루어 낸 실력과 경험이 만들어 낸 탄탄한 위엄이 엿보이는 듯했다.
남궁대산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팔 하나가 잘리고 남은 팔다리도 죄다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괴인이 있었다.
‘저놈?!’
얼굴도 거의 곤죽이 되다시피 했다. 저렇게 당하고도 안 죽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당신이…… 저리 만들었소?”
“나? 글쎄, 내가 손을 쓰진 않았지만 시킨 건 나니까 결국 내가 한 거나 마찬가지겠지.”
“어, 어떻게?”
언뜻 봐도 이 청년이 굉장한 고수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저 괴인이다. 이 청년이 괴인보다 강하다 해도, 괴인은 전설상의 강시처럼 굉장한 회복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사람에겐 수명이 있고, 무공에도 한계라는 게 있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회복력이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지속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나.”
남궁대산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말해 준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궁대산이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소. 감사하오.”
짧고 담백한 인사였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자넬 도우려고 온 건 아니었어.”
“어쨌거나 살았으니 구원의 은(恩)을 입었소.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내가 마인(魔人)이라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겠나?”
순간 남궁대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마인?”
그러고 보니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한옆에서 검을 안고 조용히 서 있는 삼십 대 장한에게서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깊이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다는 느낌이랄까.
“마기?”
“처음 보나?”
후우웅.
남궁대산의 몸에서 은은한 청색 기운이 일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은 진기였다. 지옥의 구렁텅이처럼 깊고 살벌한 마기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서량이 손을 저었다.
“자네랑 다툴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게. 지금 몸으로 섣불리 기를 발산했다간 돌이킬 수 없어.”
“……당신은 누구요?”
그때, 마동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교주님. 이만 가시지요.”
“그럴까?”
소교주라는 호칭.
굳을 대로 굳은 남궁대산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번졌다.
“마교?!”
서량은 남궁대산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괴인을 툭툭 걷어찼다.
“야, 일어나.”
“끄으윽!”
“엄살 부리지 마, 인마.”
팔다리가 부러지고 얼굴까지 곤죽이 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괴인이 몇 번이고 꿈틀거렸지만, 결국 그것이 전부였다.
흑사신목공의 기력이 다 떨어져 버린 지금의 그는 어린아이의 돌팔매질로도 죽을 만큼 위험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량이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린아.”
“네.”
“아까 이놈이 말했던 거 싹 외웠지?”
“물론이죠.”
“방향 잡아.”
“그러죠.”
여상린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서량의 옆에서 떨어져 걸었다. 괴인의 망가진 몸을 볼 때마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서량이 남궁대산에게 말했다.
“가주에게 연락하게. 우리는 자네를 도와줄 수가 없어. 운기를 도와주려 해도 기질(氣質)이 상극이라 오히려 자네에게 해가 될 것 같군.”
“가주님을…… 보셨소?”
“아까 봤지. 당장 우리가 싸울 일은 없으니 안심하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먼저 잡아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 줘.”
그 말을 끝으로 서량 일행이 떠나 버렸다.
남궁대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멀어져 가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마교의 소교주라고? 저 사람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들어 왔던 마교에 대한 인상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마교 소속이라 하면 흉측한 외모에 사람 죽이길 벌레 잡듯 하고, 음행(淫行)을 좋아하며 광기에 차 적아(敵我)의 구분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저들은 어떤가?
“……진짜 마교도가 맞나?”
남궁대산을 두고 이동하는 일행.
마동필이 후방을 힐끔거렸다.
“괜찮겠습니까?”
“뭐가.”
“아무리 봐도 당장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서량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마인 주제에 남궁세가의 검사를 걱정하다니, 너도 참 착해 빠졌다.”
마동필이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인상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지나치게 부드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쨌거나 남궁가주는 진짜야.
진정한 검사, 진짜 협객 소리를 들을 만한 사내지. 그런 가주 밑에서 컸으니, 가인(家人)들도 하나 같이 담백하지.”
여상린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진짜 신기하네요.”
“뭐가?”
“이런 것도 다 공야 소문주가 알려 주던가요? 어떻게 그리 잘 알고 계세요?”
괜히 뜨끔하군.
서량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잖냐. 조사 열심히 했지.”
“단순히 조사한 것만 같진 않던데요? 듣다 보면 왠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날카로운 것.
“뭐 어떠냐? 어쨌든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되지.”
“만날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셔.”
“에헤이, 오늘따라 집요하구만.”
“엉망진창이 된 몰골이 뇌리에 콱 박혀서 지워지질 않는다고요.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싶어요.”
“익숙해져라.”
“그거 익숙해져서 뭐 한대요? 정서상 엄청 안 좋을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된다고 했더라?”
“얼마 안 남았어요.”
여상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이놈들, 진짜 작정을 했군요. 흑사신목공이라는 무공을 해체해서 초대형 진법을 만든다…… 그런 게 가능한가?”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천룡궁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방문좌도의 술에 능하다고 그랬어.
좌도를 파다가 어떻게 만들어 낸 모양이지. 이놈들 별종이라는 거야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그래서 걱정이에요.”
여상린은 드물게 앓는 소리를 했다.
“우리만 가도 되나 싶어요. 천룡궁은 옛날부터 음험하기로는 새외제일이라 불리는 놈들이거든요.”
여상린의 말은 불행히도 현실이 되었다.
일행이 이백여 장을 더 돌파했을 때였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멈춰.”
사박!
일행이 그대로 멈추었다.
여상린의 손에 은은한 백색 광채가 어리고, 마동필의 손이 검병을 쥐었다.
서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천룡궁?”
“그렇다.”
스스스스.
유독 큰 나무 앞, 희뿌연 안개가 일더니 여인 한 명이 등장했다.
순간 일행의 얼굴이 모조리 일그러졌다. 여인의 외형이 그야말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허락도 없이 천룡의 거처로 들어오다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서량의 안광이 은은한 청색으로 물들었다.
“썩은 눈깔이나 집어넣고 말해라.”
시퍼렇게 썩은 살점, 뼈가 허옇게 드러난 어깨와 갈빗대.
이와 잇몸이 고스란히 보이도록 썩어 문드러진 좌측 얼굴과 우측 눈알 하나가 빠져 덜렁거리는 모습에 천하의 서량도 욕지기가 나오는 걸 느꼈다.
“이것들 대체 뭐야?”
그때였다.
서량의 손에 잡혀 덜렁거리던 괴인의 몸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상린이 외쳤다.
“소교주님!”
퍼어어엉!
괴인의 몸이 산산이 조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