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마(魔)의 개척지 (3)
인신공양(人身供養)이란 신(神)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걸 말한다.
문물의 교류가 잦지 않은 고립된 지역에 종교가 생기면 종종 그러한 관습이 생겨난다. 어쩌면 아직도 변방에선 인신공양이 횡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신공양은, 적어도 행하는 자들에게 있어선 성스러운 행위였다. 엄숙하고 절제된, 말 그대로 의식(儀式)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천룡궁이 벌이는 인신공양은 빈말로도 성스럽다 할 수 없었다.
주르르륵.
광장의 너비는 못 해도 반경 삼십여 장은 넘어 보였다.
그 널찍한 광장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흩뿌려졌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광장 중앙.
장정 열 명이 누워도 넉넉할 크기의 흑색 제단 위에 어두운 피풍의를 입은 누군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여상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것도…… 환상인가요?”
“아니, 환상이 아니야.”
시체 썩는 냄새나 피비린내가 풍기진 않았다. 그래서 여상린은 이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타다다닥.
광장 너머 회랑(回廊)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의 존재를 깨닫고 또 다른 고수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서량이 광장 중앙,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붉은 핏물이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튀었다.
바로 그때, 피풍의를 걸친 사람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반동도 없이 일어난다. 마치 귀신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魔)의 숨결이 느껴지는구나.”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다소 낮은 목소리였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두운 피풍의로 전신을 감싼 자는 여인이었다.
“여느 흔한 마공이 아니야. 쓰고 텁텁한 이 냄새…… 설마 천마신교의 마인인가?”
서량은 대답 없이 여인을 노려보았다.
피풍의로 머리까지 뒤덮고 있어서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목소리만 들어 보면 나이가 많은 것 같진 않았다.
“마교도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지? 설마 혈목신기(血木神氣)에 이끌려 왔나? 마공에 적합한 힘이 아닐 텐데? 하기야…….”
번쩍!
코밑까지 가려진 얼굴. 시커먼 천 안에서 붉은 광채가 이글거렸다. 서량의 핏빛 안광과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런 마병(魔兵)을 소지하고 있다면 혈목에 홀릴 리도 없겠지.
내 온갖 신병과 마병을 두루 보아 왔지만, 그처럼 대단한 마병은 본 적이 없다. 가히 절대마병이라 할 만해.”
서량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천마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초대천마의 마도(魔刀)와 칠대천마의 사도(死刀), 그리고 유성쌍도라는 신기(神器)에 이천상의 마기까지 더해진 천마도는 그녀의 말마따나
절대마병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서량의 안광이 점점 진해졌다.
“이게 그 칠요집전술이라는 거냐?”
“집전술을 알다니,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때, 여상린이 서량 옆으로 다가왔다.
“목정(木晶)의 대사제(大司祭)로군요.”
“음?”
펄럭!
여인이 머리를 덮은 피풍의를 뒤로 젖혔다.
평범한 인상의 삼십 대 여인이었다. 다만 도도한 표정과 붉은 안광이 신비로움을 안겨 주어,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묘한 품격이 묻어 나왔다.
“빙궁?!”
“그래요.”
“북천괴성(北天魁星)의 딸년이로구나! 네년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서량을 대할 때보다 훨씬 격앙된 목소리였다.
여상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더 궁금하네요. 중원 진출이야 당신들이 그리도 염원하던 것이니 놀랍지 않지만, 이토록 잔혹한 짓을 벌이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닥쳐라! 네까짓 천한 년이 용신(龍神)을 향한 신성한 의식을 모욕해? 사지를 찢어 죽일 년!”
느닷없는 폭언이었다. 여상린의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일었다.
“소교주님.”
“그래.”
우우우웅.
서량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조지려고 했는데, 그 정도로는 안 되겠군.”
콰득!
서량의 두 발이 땅을 파고들었다.
후우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사방을 밝히는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구유마공의 완전한 개방이었다.
대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럴 수가!”
처음부터 대단한 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구유마공을 전력으로 끌어 올린 서량은 가히 마신(魔神)의 위용을 보여 주고 있었다.
대사제는 피를 너무 많이 취해서인지 정신이 혼미했다. 애초에 이곳까지 들어올 만한 실력자라면 긴장을 늦추지 말았어야 했는데 간과하고 말았다. .
그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대비를 했다 한들 막을 수 있는 전력이 아니기도 했다.
파바바바박!
기다렸다는 듯 회랑에서 빠져나온 무인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들?’
익숙한 진기, 그리고 사기다. 이 구덩이로 들어오기 전에 박살 냈던 그 괴인과 같은 기운을 풍기는 놈들이었다.
대사제가 외쳤다.
“목령귀(木靈鬼)들은 저 천한 년을 죽여라! 마인은 건드리지 마!”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치리링!
천마도를 쥐지 않은 좌수(左手)가 수도(手刀)로 바뀌었다.
여상린의 눈이 커졌다.
‘여기서?!’
파아악!
순간의 의문, 하지만 몸은 이미 회피하고 있다. 서량이 어떤 무공을 펼치려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집약된 붉은 마기가 어느새 타오르는 화염의 형상을 취했다. 구유인화도법, 지옥풍을 건너뛴 종극무간도(終極無間道)가 펼쳐진 것이다.
번쩍! 콰르릉!
서량의 전면 오 장 거리가 통째로 부서지고 박살 났다.
“크아아악!”
“끄아아!”
대사제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수백, 수천 개의 작은 도기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목령귀들을 박살 냈다. 게다가 그 도기에는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준하는 화기까지 깃들어 있었다.
삼십 구나 되는 목령귀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댔다. 온몸에 불이 붙은 그들이 마구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이런 양강기공을!’
오행(五行)은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을 반복한다. 화기(火氣)는 수기(水氣)에 약하지만, 목기(木氣)에는 강한 법이었다.
이곳은 목기가 워낙에 풍성해서 화기로도 큰 타격을 주기 어렵지만, 그것이 극마의 고수가 펼치는 화공(火攻)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극한의 회복력을 자랑하는 흑사신목공이 뿌리부터 타격을 입는다. 남은 목령귀가 육십 구가 넘었지만, 저 정도 절대자에게 덤비게 할 순 없었다.
‘후웁.’
서량의 좌수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힘들군.’
제대로 위력을 실었으면 천장까지 무너졌을 것이다.
기공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제어하는 데 힘이 드는 건 당연하다.
종극무간도를 제대로 펼쳤으면 공간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을 터, 목표한 바만 타격하기 위해 힘을 조절하려니 내공 소모가 심했다.
“어디서 이런 놈이!”
이를 갈던 대사제가 일순 번쩍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황색 빛무리가 일었다.
“유행장목(流行長木)!”
콰드드득!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거?”
천장과 벽에서 굵고 질겨 보이는 나뭇가지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었다.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대사제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는데, 그 움직임이 무척이나 빠르고 부드러웠다.
여상린이 외쳤다.
“쳐야 해요!”
파아아앙!
여상린의 빙혼수가 펼쳐지기도 전에, 서량은 이미 대사제 앞에 도달해 있었다.
마황군림보와 함께 마경각에서 얻은 신법, 능공만리행(凌空萬里行)의 신기(神技)였다.
퍼어어억!
서량의 손이 두꺼운 나무 벽에 박혀 들었다. 신병이기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수도(手刀)였다.
그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콰드득!
굵은 나뭇가지들이 통째로 부서지며 그 안에 있는 대사제가 드러났다.
대사제의 얼굴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혈목신기를 머금은 나무들은 그 강도가 철에 준한다.
그런 나뭇가지가 족히 다섯 겹은 되는데 수도만으로 깨부수고 뜯어내다니,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너희의 패배는 당연해.”
흑사신목공은 사공(邪功)이다.
가히 절정의 사공이라 불릴 만하지만, 천하를 논할 정도의 무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량의 마공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이다.
사공은 곧 마공에 귀속되기 마련이다.
절대마공을 익혀 극마에 오른 서량에게 이 정도의 사공을 부수는 건,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 목기.
구유마공과 군림마황기는 양강의 무공이니, 작정하고 화기를 발산하면 이곳 전체를 불태워 버릴 수 있다.
말하자면 천적(天敵)이라는 것이다. 무학의 상성에서도, 무공의 경지에서도 이들은 서량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흡!”
서량이 그대로 수도를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굵직한 나뭇가지들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이놈!”
번쩍!
대사제의 붉은 안광이 샛노랗게 변했다. 흑사신목공을 운용하는 것이다.
퍼어어억!
‘흐음.’
끝이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사방에서 서량의 몸을 찔러 댔다.
하지만 뚫리지 않았다. 구유마공을 완전히 개방한 서량의 육신은 도검불침의 강도를 자랑한다.
내공을 실은 보검(寶劍)이나 보도(寶刀)가 아닌 바에야,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다.
서량의 주먹이 겹겹이 쌓인 나뭇가지에 닿았다.
곧이어 그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콰아앙!
“컥!”
그 굵은 나뭇가지들이 모조리 뜯겨 나갔다. 대사제 역시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파아악!
서량은 멈추지 않았다.
목령귀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이들 중 정점이 저 대사제라면 회복력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회복되기 전에 아예 박살을 내 놔야 수월하리라.
그때였다.
사락!
서량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대사제의 몸이 측면으로 물러나 있었다. 십여 장이나 되는 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한 것이다.
‘목기로군.’
풍성한 목기로 사공의 힘을 증폭시켰다. 내력이 증대되고 운용 속도가 빨라지니 전반적인 무력이 상승한 것이다.
대사제가 왈칵 피를 토하며 외쳤다.
“이때다! 목령귀들은 저년을 죽여라!”
파아아악!
목기로 인해 무력이 상승한 것은 목령귀도 마찬가지였다. 무서운 속도로 여상린에게 덤벼드는데, 하나하나가 여상린에 필적할 만한 기파를 뿜어냈다.
서량의 몸이 움직였다.
번쩍!
순식간에 여상린 옆으로 이동한 서량이 좌수에 폭경의 기운을 담았다.
콰앙!
비명도 없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목령귀 셋의 몸뚱이가 처참하게 박살 났다.
그게 전부였다. 대사제가 혈목신기를 활성화하니, 목령귀들의 육신과 회복력도 더욱 향상됐다.
콰드드드득!
“제기랄!”
여상린이 욕설을 내뱉었다.
저 멀리서 흑사신목공을 운용하는 대사제가 이곳 일대의 나무를 조종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오는 나뭇가지들이 창날처럼 꼿꼿해져 두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술법이 정점에 이르렀다더니 한 수, 한 수가 놀라움의 극치였다.
까드드드득!
빙혼수의 한기가 나뭇가지들이 쏘아지는 속도를 대폭 늦췄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불길한 기운을 뿜는 나뭇가지들은 점점 붉은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혈목신기, 피를 머금은 나무들의 무자비한 공세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도 끝도 없겠다. 이곳 자체를 무너트리면 두 사람도 위험해질 테고, 혹시 모를 생존자가 도주할 위험도 있다.
순간 서량과 여상린의 눈빛이 부딪쳤다.
‘할 수 있겠냐?’
‘버텨야죠.’
‘조금만 참아라.’
눈빛으로 뜻을 주고받은 두 사람.
서량이 여상린의 멱살을 쥐었다.
파아아앙!
여상린의 몸이 대사제에게 무서운 속도로 쏘아졌다.
퍼버버벅!
핏빛 나뭇가지가 서량의 몸을 마구 때렸다. 이전보다 더 강하고 날카로운 공격이지만, 여전히 서량의 몸을 뚫지는 못했다.
전방에는 목령귀, 후방에는 혈목.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몽땅 불살라 주마.”
우우우웅.
시커먼 천으로 돌돌 매인 천마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화르르르르륵!
천마도를 감싼 천이 불에 타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