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마(魔)의 극치 (2)
“어?”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량한 절벽이었다. 기억에 있는 듯하면서도 조금은 생소했다.
‘뭐야, 여기는?’
순간 서량은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가 본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장소였다.
이천상과 마지막 비무를 했을 당시.
이천상의 만압금마장을 찢고 나와 세 번째 지옥문을 열었을 때, 판마정이 만들어 낸 광경이 이와 같았다. 까마득한 높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절벽.
‘흐음.’
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군. 이건 꿈이야. 그때의 악몽처럼.’
그렇다.
이건 마동필과 여상린, 앵화의 시체를 봤던 그 악몽과 같은 종류다. 단 두 번의 경험만으로 서량은 꿈이 꿈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때, 절벽 끝에 한 사람이 보였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교주님.”
뒷짐을 진 이천상이 서량을 돌아보았다.
“이리로.”
꿈속의 이천상이 말을 건다.
환상임을 알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은 여전했다. 서량은 이천상의 옆으로 걸어갔다.
이천상은 서량을 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엔 특유의 권태로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서량이 물었다.
“뭡니까?”
여러 가지 의문이 깃든 질문이었다.
이천상은 서량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빛이,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서량의 질문과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마(魔)에는 끝이 없다. 한없이 커지고 깊어질 뿐이다.
결국 마(魔)를 몸에 담은 인간의 그릇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때까지가 한계라면 한계겠지. 즉, 마의 끝이란 결국 인간 본연의 그릇이 결정짓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다.
하지만 서량은 이천상의 말을 경청했다. 이것이 환상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사람의 그릇이란 건 타고나는 법이다. 어지간해선 늘릴 수 없어. 하지만 넌 본래 마(魔)보다 죽음(死)에 가까웠다.
넌 스스로 마공을 창안한 그 시점에 이미 그릇을 늘려 본 것이야.”
“…….”
“한 번 가능했던 일이 두 번이라고 불가능할까.”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제가 군림마황기의 성장을 억제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천상은 답하지 않았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극치를 엿보지 못했다.”
이천상이기에 할 수 있는, 하지만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아직 더 담아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난 강해지고 있다.
내가 한계를 짓기 전까지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은 끝없이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서량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것은 꿈이지만 동시에 현실이기도 했다. 이천상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 지금의 이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천상이 하는 말은 진실하였다.
극마에 오른 서량은 아직 이천상을 당해 낼 수 없지만, 그의 경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멀었어.”
“압니다.”
“군림마황기는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마공이다. 네가 한계를 짓지 않았다면 그따위 잡스러운 사기(邪氣) 따위에 고초를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량이 고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이천상의 말임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이 발하는 말이기도 했다. 즉, 그는 자신이 한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계를 두지 말라. 넌 신교 최초로 두 개의 절대마공을 연성한 천마(天魔)다.
네가 걷는 길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길에 오른 자가, 더 욕심을 내지 못할망정 한계를 그어 둔다면 절대 대성하지 못하겠지.”
이상하다.
이 말에는 자신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은 역대 천마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이 말은 누가 하는 거지?
“오르고 또 올라와라. 네가 제대로 올라오지 못하면, 네가 위하는 사람들은 너로 인해 죽게 될 것이다. 나의 사형제들이었던 신마회의 회원들처럼.”
순간 서량의 눈이 커졌다.
이천상의 말을 듣고 떠오른 것은 일전의 악몽이었다. 그 악몽에서 세 남녀는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부디 내가 포용하지 못한 것들을, 너는 포용할 수 있길 바란다.”
“예?”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이천상이 사라졌다.
동시에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 * *
“음? 정신을 차렸소?”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창가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따가웠지만, 시야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여기는……?”
“어디일 것 같소?”
서량이 고개를 돌렸다.
뒷짐을 진 남궁단이 보였다. 잘 차려입은 청백색 의복이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남궁가입니까?”
남궁단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서 소교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오. 열흘 만에 깨어났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그 심혼(心魂)이 놀랍소.”
“열흘이나 지났습니까?”
“그렇소. 의원이 몇 번이나 다녀갔지만 따로 손 쓸 것은 없다고 했소. 자력으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으니, 그저 옆에서 간호만 하면 된다고 하더이다.”
“하면 여태 가주님께서?”
“그럴 리가 있겠소. 우연히 한 번 들렀는데, 마침 소교가 깨어난 것이오. 서 소교와 함께 다니던 검사가 지금껏 그대를 지키고 있었소.”
“음.”
서량이 상체를 세웠다.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이 무거웠고, 뱃가죽이 찢어질 것 같았다.
우우웅.
내공을 운용하여 근육을 풀었다.
‘다행이군.’
혈맥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위험한 상태도 아니었다. 혈도도 제법 깨끗했고, 기의 흐름 역시 정상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하면 동필이는?”
“문밖에 서 있소. 지금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있겠지.”
감각을 개방하니, 확실히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데 그 기척이 무척이나 은밀하다. 일부러 기척을 숨기는 게 아니라 마기가 알아서 갈무리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서량이 말했다.
“들어와.”
드르륵.
문이 열리고 마동필이 들어섰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깨어나셨습니까.”
“미안하다. 걱정 많았지?”
“예, 걱정했습니다.”
고개를 든 마동필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좀 컸다?”
“다 소교주님께 배운 것입니다.”
농담 같은 대화 속에 진한 정이 흐른다.
남궁단은 은근히 놀랐다.
‘소교주와 호위무사의 대화가 맞나?’
서량 일행이 보여 줬던 언행은 마인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꿔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둘 사이가 이토록 격의가 없을 줄은 몰랐다.
천마신교의 상하 관계는 중원 무림의 그것보다 훨씬 엄정해서, 윗사람 앞에선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다고 들었다.
여러모로 놀라운 이들이었다.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덕분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궁단이 살짝 몸을 비틀었다.
“부담스러운 인사외다. 그저 강호인의 도리를 다한 것뿐이오.”
“훗날 남궁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평판에 좌우되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외다. 나는 그저 내 신념에 따라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러니 내게 감사할 것 없소.”
담백하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한 가문의 주인은 단순히 신념대로만 일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량도 알고 남궁단도 알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남궁단은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감사할 일이 또 있지요.”
“음?”
“사기(邪氣)의 근원을 베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가주님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서 소교는 죽지 않았을 것이오.”
서량이 남궁단을 직시했다.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내 이날 이때까지 쉼 없이 검을 연마했소만, 서 소교가 이룬 경지에 도달하진 못했소.
하나 무인을 보는 안목만큼은 저 십대고수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자부하오. 그런 내가 봤을 때, 서 소교는 그 사기를 감당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량의 육체는 불괴(不壞)의 강도를 자랑한다. 단순히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유연성도 갖추었다는 말이다.
진정 육체가 붕괴되기 전, 몸에 밸 대로 밴 깨달음은 사기를 증발시킬, 혹은 수용할 방법을 순식간에 찾아냈을 것이다.
굳이 남궁단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죽진 않았을 거란 뜻이다.
다만.
“제 마기에 내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귀 가문의 검사들도 휩쓸릴 뻔했지요.”
바로 이게 문제였다.
서량은 죽지 않았을 테지만, 제때 갈무리하지 않았으면 근처에 있던 마동필과 여상린, 자칫 잘못했다간 남궁의 검사들까지도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남궁단은 서량의 목숨이 아니라, 서량 일행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모두가 살았으니 그것으로 되었잖소. 굳이 공치사 받고 싶진 않소이다.”
“뭐, 그리 말씀하시니 더 이상 금칠은 안 해 드리겠습니다.”
남궁단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과 농담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서량의 어휘에 재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닐 것이오. 이왕지사 본가에 들어오신 것, 회복될 때까지 쉬다가 가시구려.”
“가주님의 배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남궁단이 방을 나섰다.
서량이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뻐근하구먼.”
“누워 계시지요. 제가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배가 고프긴 하다.”
서량이 힐끔 문을 엿보았다.
“굉장하지?”
“예?”
“남궁가주 말이다.”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보다 대단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궁가주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훗날 남궁단과 적으로 마주하게 되더라도 서량의 성격상 절대 그에게 검을 겨누지 못할 것이다. 생명과 마음의 빚을 졌기 때문이다.
즉, 남궁단은 자신보다 강한 서량을 이미 이겨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정도(正道)다. 칼을 마주하기 전에 마음으로 상대를 꺾어 버리는 것.
남궁가주의 저 성정이 무뎌지지 않는 한, 남궁세가는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거야.”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그와는 별개로, 남궁가주와 검을 나눠 보고 싶습니다.”
“지금의 너에게 멋진 상대가 될 거다. 그러고 보니 너, 묵왕검을 개방했지?”
“아, 예. 어쩌다 보니…….”
“너답다. 천고의 마병은 어쩌다가 개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서량이 힐끔 구석을 바라보았다.
천마도가 길쭉한 받침대에 놓여 있었다. 요요한 자흑색 도신(刀身)에선 어떠한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골치 아픈 물건이로군.’
내외기(內外氣)의 균형이 어떻게든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얌전히 잠든 천마도는 세상 어떤 병기보다 고풍스러워 보였다.
“아, 근데 앵화는?”
“그렇지 않아도 하오문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대략 이틀 뒤면 남궁가에 당도할 것입니다.”
“좋아. 상린이는?”
“쉬고 있습니다. 내상을 제법 입어서 치료 중입니다. 다행히 차도가 빠릅니다.”
어쨌든 다들 안전하게 있단 말이었다.
서량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드리워졌다. 일행 전부의 안전을 확인하니 그제야 피곤이 몰려온 것이다.
“휴, 죽겠구먼.”
오랜만에 이삼일 푹 쉬어야겠다.